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9
연록흔 – 19화
비축비축.
록흔은 무거운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척거렸다. 더듬어 손에 잡히는 대로, 온몸에 아프게 부딪히는 대로……. 안 보이는 눈 대신이라야 독 입어 무뎌진 감각뿐이라 별 소용이 되지 못했다.
‘이건…….’
딱딱하고 서늘했다. 곧게 뻗은 것이 기다랬다. 록흔은 손으로 더듬어 무언가 살폈다. 감촉이 매끈하고 옹이가 진 것, 대나무가 틀림없었다.
[우리 아가, 록흔아. 대나무는 말이다.]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록흔은 늘씬하게 뻗은 줄기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기를 가졌단다. 솜대의 얇은 속껍질은 ‘죽여’라고 부르는데 해열제를 만들 때 이용되지.]록흔은 힘껏 잡고 흔들었다. 사삭사삭, 뾰족한 댓잎이 팬들팬들 날렸다.
[또 댓잎으로는 죽엽죽을 만드는데 그것 역시 열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단다.]언젠가 들었던 말. 선명하게 살아나 무딘 머릿속에서 춤을 추었다.
투둑!
록흔은 댓잎 몇 개를 따내 입에 물었다.
꾸욱, 꾹!
입속에 말아 넣고 씹으니 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었다. 록흔은 죽지 않으려고 질긴 것을 이로 발기고 또 발겼다.
‘결국, 사념에게 당했군. 간사한 게 사람이다. 그새 땅 위에 적응해 마도굴을 잊었으니.’
록흔은 쩔쩔 끓는 몸을 식히려 잡히는 대로 눈을 뭉쳤다. 그마저 쉽지 않아 손이 자꾸 엇나갔다.
“하아, 하아…….”
힘겹게 부스댄 끝에 눈덩이가 이마에 올라앉았다. 록흔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열이 높아 차다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정신이 조금 또렷해졌다.
사박바삭.
록흔은 무릎까지 차오른 눈더미를 팠다. 그리고 향로 단지를 묻었다. 몸이 나으면 다시 찾을 터였다.
“후우, 후…….”
대충 덮어 두는 것도 힘이 들어 숨이 가빴다. 록흔은 고개를 꺾었다. 눈 녹아 이마에서 돋던 물이 방향을 꺾어 귓불로 흘러내렸다. 이미 볼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륜은 아무도 모르게 진세전을 나왔다. 청죽원으로 가는 중. 세상 모두가 경외하는 황제라지만 홀로 숨을 수 있는 곳은 오직 그곳뿐이었다. 지난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바람이 불면 눈가루가 날렸다. 밟고 지나면 무릎까지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보송보송하게 쌓인 눈밭 그대로였다.
휘이익…….
기쁜 날이라 하건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문서상의 탄일이든, 진짜 탄일이든 감흥 없긴 매한가지였다. 단명한 어미나 서조모만 아니라면 둘 다 필요 없으니 치우라 했을 터. 가륜은 눈귀를 조프렸다.
‘아비를 누를 아들…….’
가광이 몹시도 두려워한 말이었다. 그는 천관의 말에 격노하여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동궁의 생시를 바꿔 버렸다. 정월 열이틀은 범재로서 적합한 날, 열엿새는 천룡으로서 태어난 날……. 천단에도 거짓 생일이 올랐으나, 가륜이 타고난 몫까지 바꿀 순 없었다.
‘누가 좋은 날인가?’
허허롭게 웃는 이, 권력에 찌들어 속 검은 이, 거짓웃음을 짓느라 경련 이는 이, 더 큰 고기 조각 물려 애쓰는 이…… 가륜은 피곤했다. 혼탁한 이들이 너무 많아 귀가 시끄러우니, 차라리 고적한 게 나았다. 홀로 성내다 보니 어느새 목적한 곳. 그는 잠시 멈춰 섰다.
“하아, 하…….”
무언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가륜은 귀를 바짝 세웠다. 청죽원에 풀어 놓은 노루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칠었다.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그는 발원을 찾아 몸을 돌렸다.
사사삭, 사사삭.
설원 위에 펼쳐진 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눈 시리도록 하얗게 쌓인 눈, 그 안에 다리를 잠근 푸른 대나무, 검남색 고적한 하늘, 월광 흩뿌리는 황금의 달…… 덧붙여 아름다운 그 무엇.
사샥사샥!
무성한 죽엽이 바람에 휘둘리면 눈꽃이 성글게 일었다. 가륜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샤악샤악!
댓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쌓인 눈 못 이겨 휘어진 댓가지 아래, 하늘거리는 옷자락이 비쳐 보였다.
사박사박!
곧기만 한 것이 스스로 휘기도 하는가? 선한 대나무는 날씬한 몸 길게 늘여 어느 여인을 가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댓잎 사이, 배꽃 닮은 얼굴이 애처롭게 피었다. 하늘 향해 꺾인 것이 달빛이라도 바라는 것 같았다. 먼빛이나 그 태가 몹시 고왔다.
“하, 하아…….”
여인은 온몸을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가끔 열에 들뜬 신음도 흘렸다. 몸이 아파 낯선 이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기척이라…….’
가륜은 그리 생각하다 입귀를 틀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불성설이라 고소가 절로 나왔다.
파랏!
훤칠한 인영이 날파랍게 움직였다. 둘 사이 간격이 좀 더 좁혀졌다. 그러나 가륜은 바짝 다가서지는 않았다.
“후우, 후…….”
눈에 반쯤 파묻힌 미희, 가륜은 입 실긋하게 늘이고 바라보았다.
“하아…….”
비록 감은 눈이나, 그 선이 시리도록 고왔다. 열에 들떠 벌어진 입, 야무지지 못하나 오히려 말랑하게 부푼 것이 탐스러웠다. 깊게 젖혀진 턱, 유려히 흐른 곡선이 고혹적이었다.
툭!
사사사샤!
순간의 일, 여태 허리를 굽히고 있던 대나무가 벌떡 일어섰다. 달빛 아래, 여인이 완연히 드러났다.
파삭파삭!
댓잎이 요란스레 몸을 겯고 나붓댔다.
사사샤.
눈꽃이 은빛 나비마냥 하르르 떨었다.
똑똑.
눈 녹아 흐른 물이 눈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은 갸름한 얼굴에서 돋아 가느다란 목을 타고 내려 가슴께까지 흘렀다. 얇은 비단옷은 이미 젖어 있으나마나,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흐윽…….”
여인의 손엔 댓잎이 쥐어져 있었다. 아마도 이때껏 댓줄기를 잡고 있었던 듯, 급작스레 놓쳐 대나무가 요란을 떤 것이다. 뜯긴 댓잎이 사방에 널렸다.
“하아하아!”
숨소리가 더 가빠졌다. 소담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움직임대로 살갗에 밀착된 비단이 오르르 부드럽게 말렸다. 젖은 천 아래, 투명하도록 하얀 속살이 비쳐 보였다. 달빛을 받으니 눈이 부실 지경, 가륜은 미동 없이 응시했다.
“허억!”
입술은 진홍빛, 열이 많았다. 가륜은 이제 여인의 앞에 서 있었다.
‘중독이군.’
그것도 맹독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의 몸 상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륜은 사태를 유추했다. 궁녀 차림이긴 하나, 분명 궁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객도 아닌 듯싶었다. 언뜻 보기에도 변변한 무기 하나 지닌 것이 없고, 살수라는 자가 진세전을 지나치고 청죽원에서 헤매지는 않을 터였다.
‘달 아래 아름다운 여인이라…….’
봉안이 차갑게 식었다. 만년설만큼이나 단단하게 얼어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거둬들여야겠군.’
가륜은 곱다란 몸을 안아들었다. 그는 땅에 닿지 않은 발걸음으로 흔적 없이 청죽원 깊숙이 스며들어갔다. 더 안에 들은 세죽관을 향해 가는 차, 굳센 팔에 걸린 비단 옷자락이 하늘거렸다. 긴긴 겨울밤, 차가운 바람이 눈 쌓인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누구지?’
조금 쉬었다가, 열이라도 내리면 운기조식을……. 록흔은 웅얼거렸다.
“가만있어.”
낯선 팔, 낯선 가슴……. 누가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실지로 다가와 록흔을 들어 옮기고 있다.
‘누구냐?’
록흔은 눈을 떴다. 하지만 시계는 부드드하기만 했다. 높은 열만큼 시야는 흐릿했다. 귀도 멍해져서 소리가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
‘사내?’
여인이라면 이리 가볍게 안지는 못할 터. 손아귀의 힘은 분명 사내다움이었다. 록흔은 정체불명의 사내에게서 나는 향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후각마저 마비되어 아릿아릿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건가? 해치려는 걸까? 아니면 구해 주는가?’
의식마저도 버거웠다. 달싹이던 입술이 곧 얌전해졌다. 록흔은 정신을 잃었다. 극심한 고통도 점점 멀어져 갔다.
“폐하!”
세죽관의 나인들이 급히 달려 나왔다. 진세전의 주연에 계실 황상께서 갑자기 납시니 하동지동할 수밖에 없었다. 맨발로 뛰어나와 맞는 내관들도 있었다.
털썩!
모두 넙죽 엎드렸다. 참으로 놀랍게도 황상께선 혼자가 아니셨다. 궁인 차림의 여인, 그것도 몸소 들고 오셨다. 궁녀 몇이 호기심이 동했는지 바닥에 엎드린 채로 눈만 살짝 치켜떴다. 지금껏 황제가 세죽관에 여인을 들인 일은 전무했다.
“폐하, 시중들 일은 없사옵니까?”
내관이 묻는 말에 가륜은 딱 잘라 말했다.
“공관!”
세죽관을 비우라는 말. 서릿발 같은 명에 궁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담장 너머로 물러나갔다. 이제 청죽원 안에 남은 것은 푸른 대나무, 차가운 달빛, 의식불명의 여인과 황제뿐이었다.
“후, 후우…….”
가륜은 품에 안은 여인을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환한 등 아래 두니, 달빛에 의지해 본 것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감은 눈 뜨면 어떠할까? 곱다시 누운 여인이 차가운 심장마저 움직였다.
‘안고 싶은 여자, 실로 오랜만이군.’
툭, 툭!
다소곳이 다물린 옷자락이 벌어졌다. 가륜은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다. 살갗으로 느끼는 여인의 속살은 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마치 옥으로 된 인형을 만지는 듯. 그러나 그의 인형은 살아 있어 매끄러운 데다가 따스하기까지 했다. 혈관을 독이 채워 체온이 높긴 해도 참으로 탐스러운 살결이었다.
“하아, 하아…….”
조붓하고 동그란 어깨 한구석에 초승달 모양의 상흔이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날카로운 잇자국 같기도 했다. 최근에 생긴 상처는 분명 아니나 유난히도 붉었다. 가륜은 그곳을 가만 쓸어 보았다. 완벽한 곳이니 흠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을 터. 그리 치부하면서도 왠지 가련해 보이는 상처였다. 그가 알 리 없으나, 그건 마굴의 사령이 물어뜯은 자리였다.
스르르.
옷과 함께 날캄한 시선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여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뜨거운 숨만 몰아쉬었다. 푸릇한 등불 아래서, 드러난 어깨는 하얗다 못해 파리우리하게 빛났다.
‘단단히도 여몄군.’
팍!
가륜은 홀맺은 가슴띠를 보다가 힘껏 잡아채 버렸다.
우드득!
띠가 끊겼다. 그리고 갇혀 있던 가슴이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연홍의 버찌가 함초롬히 맺혔다. 그 빛에 준수한 입매가 늘어졌다. 걸탐스레 빨고 싶을 만큼 어여쁘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시급한 건, 회생이다.’
사내답게 아름다운 기다란 손가락, 그것들이 서로 스치듯 부딪혔다. 즉시, 바람이 맵차게 일었다.
파륵파륵!
가륜의 손끝에서 퍼져 나간 기운은 높이 올라앉은 등잔을 향해 날았다.
타닥!
바람 닿자마자 심지에 불꽃이 일었다.
팟! 팟! 팟!
움직이는 기를 따라 불씨들도 날았다. 불의 종자는 어두운 방 이곳저곳에 놓인 어등으로 옮겨졌다.
화르륵!
차가운 기름에 불이 붙어 방 안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제야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인은 그저 그렇게 크게 다친 것이 아니었다. 목숨이 위험했다.
‘장독이군. 게다가 이건?’
여인은 이중으로 중독되어 있었다. 날캄한 눈매가 깊게 패였다.
‘왜 돕는 건가?’
가륜은 자신에게 물었다.
‘소중한 생명이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떨어졌다.
‘정녕 그게 단가?’
또 다른 가륜이 물었다.
‘아직은…….’
가륜은 소매를 걷었다. 입매가 단단해졌다.
“이상한 일이야.”
조각 같은 입술이 오므려졌다가 퍼졌다. 월한은 아까부터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가 말이냐, 월아?”
차라락!
기척 없이 움직이기는 남매가 마찬가지였다.
주르르…….
골똘히 생각하던 차라, 월한은 갑자기 들리는 오라비의 목소리에 기함을 하고 말았다. 거둬들인 반월침이 죄다 바닥에 쏟아졌다.
“아이참, 오라버니도……. 우리 남매끼리도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 있나요? 월아, 너무 놀랐습니다.”
“하하하, 녀석! 새가슴도 아니면서.”
진과는 빙그레 웃다 손바닥을 부챗살처럼 활짝 폈다. 그러자 쇠붙이가 자석에 달라붙듯, 반월의 암기가 딸려 올라왔다. 자장 대신 그의 역장이 작용한 탓이다.
“무에 놀랄 일이 있단 말이냐? 월아, 필시 네가 옳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로구나. 그런데 황궁 안에서 이 반월침이라니? 자객이라도 들었더냐?”
“아니에요.”
딱 잘라 대답하면서도 월한은 여전히 록흔을 생각했다. 돌아오지 않은 반월침 하나,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 행방이 궁금했다.
‘이상해.’
생각의 뿌리는 한없이 뻗어 나갔다. 술 취한 휘록전의 문지기, 술에 곯아떨어진 향지기 궁녀, 주연 내내 보이지 않는 연록흔, 반 시진 전에 진세전을 떠난 황제……. 왠지 그 네 가지 인자들이 연관된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얼까?’
모든 것이 어긋나고 있는 저녁,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건 돌아오지 않은 반월침이었다. 월한의 암기는 누구에게 박혔든 주인에게 반드시 돌아왔다. 그것이 사라진 건, 누군가 반월에 담긴 힘을 빼앗았다는 말이 된다.
‘우선 오라버니는 아니야.’
후보는 몇 되지 않았다. 황궁 안에서 월한보다 고강한 무공을 가진 이라면 황제, 호분중랑장, 좌우중랑장 정도였다. 그러나 우중랑장은 지금 황궁에 없고, 오라버니는 확실히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힘을 흡수한 자가 누군지 곱씹어 보았다. 그리하여 제하고 남은 건, 단 두 사람이었다.
“폐하께서는요, 어디 계신지 몰라요?”
“글쎄다. 폐하께서 하시는 일을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지 않느냐? 월아, 너 아무래도 오늘 좀 이상하구나.”
진과는 누이가 낯설어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따라 그 눈빛이 몹시도 현란했다.
‘잘못되었다. 흐트러졌어.’
오라비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월한은 계속 한 생각만 품었다. 그녀는 이리저리 따지다 마침내 대들듯이 말했다.
“어디 계신지 찾아야 해요, 오라버니.”
진과는 고개를 저었다. 누이의 말은 당치도 않았다.
“폐하께서 흔적 없이 다니시는 건, 혼자 계시고 싶을 때. 월아, 너나 내가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나도 안 되나요?”
갑작스런 옥음, 미랑 은소현이였다.
“마마.”
진과도 월한도 정중히 예를 갖췄다. 은소현은 뒤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운 낯빛이 이 밤엔 파르족족했다.
‘은미랑과 함께 계신 것도 아니라면, 폐하께선 도대체 어디에…….’
월한은 소현을 치어다보며 이를 사리물었다. 두근당두근당,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억누를 길 없이 뛰었다. 이 감이 정확하다면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둘이…….’
진과는 월한과 소현을 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왜 이리 성마르게 구는 것인가?’
저마다 폐하를 찾아내라 다그치니 몹시 언짢았다.
“장중랑장, 앞장서시오.”
그때 소현이 차갑게 내뱉었다.
“아버지…….”
붉게 달아오른 입술이 조그맣게 열렸다.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고열이 불러온 헛소리였다.
투욱!
가륜은 연약한 가슴을 힘 있게 눌렀다. 부드럽고 말랑한 덩어리가 손바닥에 애잔히 닿았다. 높은 체온만큼 빨리 뛰는 심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여인은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손에 더 강한 힘을 실었다.
두욱!
사념은 오른쪽 가슴을 지나갔다. 그곳이 장독이 퍼져 나간 중심지, 다른 곳으로 독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게 급선무였다. 가륜은 기로써 극악한 독을 억눌렀다. 손에 힘을 줄수록, 미감은 더욱 생생하게 닿았다.
“하늘에 아기 달님이…….”
무언가 헛것을 보는 듯했다. 가륜은 여인을 들어 안았다. 꼭 감은 눈 새로 물이 배어 나왔다. 눈물은 이슬처럼 동그래져 또르르 굴렀다.
‘아파서 우는가?’
보얀 얼굴이 금세 축축해졌다. 가륜은 손 내밀어 그 물기를 닦아 냈다, 한 손은 여전히 말랑한 가슴에 둔 채. 여인에게서 돋은 물은 몹시 따뜻했다.
“달님이…… 흐윽.”
마지막으로 눈물 흘린 것이 언제인가? 어쩌면 눈물 흘려 울어 본 적이 없는 것도 같다. 육친의 죽음 앞에서도 가륜은 울지 않았다. 아우 친사왕, 누이 소혜 공주, 어머니 명혜황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도 섧게 우는 모습은 바이없었다.
[너는 황룡의 황제가 될 터, 결코 울어서는 안 된다. 눈물은 나약한 이나 흘리는 것이다.]가륜은 항시 호되게 몰아붙이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따뜻하군, 눈물이 이런 것이었나?’
가륜은 고개 숙여 막 돋은 눈물을 들이마셨다. 짭짤한 온기가 되려 사랑스러웠다. 분명 수상한 여인이다. 그러나 끌리는 손을, 입술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버려 둘 터. 불식간, 지금껏 묻어둔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서서히 움을 틔었다.
“흑…….”
눈물 한 방울이 굴러내려 뺨을 타고 도르르 흘렀다. 옥루는 꼭 다물린 입술 새로 숨어들었다. 가륜은 눈물의 궤적을 좇아 움직였다. 입술 위의 입술, 그는 망설임 없이 연홍의 살을 물었다.
‘……!’
그저 피부 한 조각, 앓느라 열 많은 입술에 살며시 닿았을 뿐이다. 그러나 파장은 일파만파로 컸다. 단단한 가슴 한구석이 내려앉았다. 독하게 두터운 얼음장이 갈라졌다.
“으읍.”
다른 이는 아니어도 빙천자 가륜의 심장은 고체였다. 맵게 얼어 딱딱하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녹아 끓다가 타기 시작했다. 연약한 신음 소리에 불꽃은 더욱 거세게 일었다. 일순, 맞닿은 입술에 힘이 실렸다.
“하아…….”
입맞춤의 여파인지, 여인의 숨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사락.
하늘하늘한 비단옷자락이 발치로 흘러내렸다.
“…….”
둥근 어깨, 고운 그림자 드리워진 쇄골, 소롯이 솟아 미끄러진 가슴, 섬세하게 도드라진 빗장뼈, 잔약하게 꺾여 내린 팔, 절묘하게 휘어진 허리와 골반의 선, 반지레한 둔부, 투명하게 비치는 파르란 핏줄, 곱다랗게 흐른 다리의 선, 가느스름한 발목, 자그맣게 동근 복사뼈……. 일부러 옥으로 깎는다 해도 이보다 더 정교하지는 않을 터. 아름다운 나신은 태고의 모습 그대로였다.
‘설지 않다.’
의식 잃은 여인,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아아…….”
여인이 몸을 뒤채며 괴롭게 신음했다. 그 바람에 가는 팔 하나가 툭 처졌다.
가륜에게 있어 호분중랑장 연록흔과 품 안에 든 여인은 별개의 인물이었다. 지켜 주지 못한 어린 아우, 친사왕 정도로 생각하는 아이와 천생 여자인 눈앞의 미희가 같이 보일 리 없었다.
“월한인가?”
피 번진 여인의 팔, 헤진 상처 끝에 황금빛 반월침이 있었다.
샥!
추륵!
가륜이 단번에 빼내니 찢긴 곳에서 검붉은 피가 흘렀다.
“열심히 찾고 있겠군.”
가륜은 반월의 암기를 살폈다. 인두사의 독은 원래 투명하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은 희생자의 피 맛을 보아선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슉.
반월침에 실린 힘이 사라졌다. 월한의 미력한 기 따위, 가륜은 간단히 흡수해 버렸다.
‘무슨 일로 월한에게 당한 것인가? 그리고 이 가슴의 상처는…….’
핏줄마저 올올히 선 투명한 가슴 위, 붉은 반점들이 좁쌀처럼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퍼지는군.’
매화를 닮은 가슴 끝 봉오리, 그 주변에서 홍점은 여릿여릿 움직였다. 처음엔 몰려드는 것으로 보였으나, 가륜이 다시 살피니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불긋불긋한 기운이 겨드랑이 쪽으로, 매끄러운 복부로 희미하게 번져 나갔다. 죽음의 기운은 확산하고 있었다.
‘너를 살린다면…….’
가륜은 반월침을 날렸다.
핑!
날카로운 금속성을 흩뿌리며 반월침은 공간을 찢었다.
토옥!
가륜이 실은 힘만큼 반월은 반응했다. 암기는 벽을 뚫고 들어가 황금빛 꼬리만 조금 내보였다.
‘너는 매오로시 내 것이다.’
가륜은 여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직접 닿지는 않으나 온기는 느낄 수 있는 거리, 딱 그 자리였다. 곧 맥이 트이고 정수리에 뜨거운 기운이 몰려들 터였다.
‘온전한 내 것. 그저 한 사내가 소유하는 하나의 여인.’
짙은 눈썹 끝이 하늘을 향해 올랐다. 가륜이 가진 내공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내부에서 폭발했다. 봉안이 서서히 감겼다.
고물고물.
가륜이 뿜는 기운을 따라 피부 깊숙이 파고든 장독의 파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마치 핏빛 유충 같았다. 놈들이 구물거릴수록 여인의 입매는 비틀어졌다.
“참아라, 곧 끝나지는 않을 터.”
낯선 여인이나, 일그러진 입술 하나도 거슬렸다. 가륜은 자유로운 손으로 땀에 전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달랬다.
“고통스러워도 죽는 것보단 낫겠지.”
말하는 와중에도 힘을 늦추지는 않았다. 가륜은 정신 한 올 흩뜨리지 않으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장독이 머리까지 퍼지면 그때는 가망 없었다. 뇌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므로.
“아학!”
붉은 점이 허리께로 스멀스멀 기어 내려갔다. 장독의 파편은 점점 커져 좁쌀만 한 것이 팥알만 하게 변했다. 가륜이 손을 아래로 쓸어내릴수록 놈들은 끼리끼리 뭉쳤다.
“흐으윽…….”
점점 색깔이 더 진해지고 선명해졌다. 장독들은 죽은피를 먹으면서 자꾸 커졌다.
“하아, 하아…….”
그럭저럭 아는 이가 본다면 상태가 더 악화된 줄 알고 손을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륜은 이것이 호조라는 것을 알았다.
“하아…….”
여인의 몸 상태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열에 볶여 말라붙은 입술에 조금씩 물기가 차오르고, 뜨거웠던 숨결이 점점 서늘해졌다. 열이 내리고 있었다.
‘죽은 자가 내뿜은 독기인가?’
장독은 밀폐된 공간에서 시체가 부패하는 경우 발생하는 독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것은 그것과 같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의지를 가지고 움직였다.
‘의지를 가지고 있다?’
가륜은 여인의 새하얀 허벅지로 흘러내리는 붉은 덩어리를 보았다. 이제 그것들은 포도 알 정도로 커졌다.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갑작스런 각성은 곧 분노로 이어졌다. 준수한 이마에 핏대가 서고, 늘품 있는 입매는 얄긋하게 뒤틀어졌다.
‘망자가 현세에 끼어들다니, 사특하다!’
가륜은 침상에서 살천스레 일어났다. 잠시 힘이 느슨해지자, 허벅지까지 내려온 장독 덩어리가 다시 가슴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뉘 앞이라, 잔재주냐!’
날카로운 봉안이 극히 좁아졌다. 가륜은 지금 심기가 몹시 좋지 않았다.
“으…….”
힘이 드는지 여인은 자꾸만 몸을 뒤챘다.
깊은 늪 속에 빠진 것 같았다. 록흔은 너무 힘들어서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서서히 눈이 감겨 왔다. 죽음이 외려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젠 그만 쉬어도 될 것 같았다.
‘록흔아, 내 아가! 그러면 안 돼. 정신 차려, 내 손을 잡아.’
‘누구세요?’
몹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했다. 그렇다. 여인은 산해 아가씨를 많이 닮았다. 아니, 거울 속에서 보던 록흔 자신의 눈동자 같기도 했다.
‘록흔아, 엄마란다. 가여운 것. 조금만 참으렴. 넌 지금 죽어서는 안 돼.’
눈물 그렁그렁한 여인의 눈동자가 몹시도 고왔다.
‘어머니?’
그래,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눈물 갈쌍한 눈동자, 너무 맑아 푸르스름했다.
‘록흔아!’
자꾸 부르는 소리.
‘안 돼, 눈 떠.’
애달픈 목소리가 록흔을 놔주지 않았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들었다. 내밀어진 하얀 손, 어머니의 손……. 금방 닿을 것만 같았다.
파앗!
겨우 잡았다. 그러나 따스한 온기 느낄 새도 없이, 록흔은 빛이 가득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절대고수의 무공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가륜 같은 경우엔 기로써 나름의 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내부의 기가 주인의 의지로 밖으로 쏟아지면 무형의 것은 유형의 실체가 되었다.
시이이익!
빛의 칼. 극히 투명하여 범인에겐 보이지 않으나, 분명 날이 선 단도였다. 지금은 필요에 의해 짧아졌지만, 형태는 부리는 자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꼬물꼬물.
장독은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심장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설칠수록 끝은 비참해지는 법!’
시리리릭!
빛의 단도가 광채 드높게 부유했다. 칼은 무엇이라도 삭둑 벨 기세로 꼿꼿이 서서 주인의 명을 기다렸다.
위이익!
가륜은 여인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장독흔을 다시 다리 쪽으로 내려 보냈다.
‘빨리 손을 써야겠군.’
매끄러운 다리를 따라, 가륜의 기가 흘러내렸다. 장독덩어리는 그대로 내쫓겨 조그만 발에 모여들었다. 일순, 봉안에 날캄한 금이 그어졌다.
팃!
가륜이 부리는 대로, 기도는 빠른 속도로 날았다.
쓰윽!
보이지 않는 칼날이 보드라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캬악!
피가 튀었다. 거의 흑색에 가까운 죽은피다. 발바닥의 째진 상처에서 사혈은 격렬하게 분출했다.
사락!
여인의 발치에 걸린 옷자락이 팔느락거렸다. 하늘한 비단은 공중에 떠서 바람을 먹고 수수러졌다. 막 가륜이 손을 썼을 때였다.
차아아악!
튀어 오른 피는 검붉었다. 번져 들어가는 암적의 원, 푸른색 세사에 새로운 무늬가 생겼다. 가륜은 무감한 눈으로 독한 얼룩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가망 없었겠군.’
천에 묻은 피는 붉은 기가 거의 없이 검었다.
주륵!
찢긴 살갗에서 탁한 액체가 쉼 없이 흘러내렸다.
“후우.”
여인이 깊은 숨을 토해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빛으로 끌려나온 순간, 검은 피도 거의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