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반격 준비(1)
“오랜만···.”
까딱, 고개를 기울이는 형상.
“···이라고 말하긴 애매하네. 스위스에서 네가 나를 놓친 게 불과 얼마 전이었으니까. 아무튼, 반갑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건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는 한 없이 불길하고 불온한 무언가였다. 그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감이 블러드 서커의 피부를 따갑게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스름 속에서.
천천히 그 존재가 걸어 나왔다.
네크로맨서.
불과 얼마 전.
천무그룹 유럽지부에서 그녀가 벌인 학살 현장 속의 무력한 네크로맨서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저건···.’
블러드 서커의 눈썹이 떨렸다.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본디 제 몸도 가누지 못했어야 할. 그녀가 어떻게 이곳, 한국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부터 시작해서···.
저 압도적인 존재감.
분명, 존재해서는 안 되는 외신의 힘이 저 신체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손에 넣은 육신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범상치가 않다는 것이었다.
정면 승부는 절대 불가하다.
그녀의 직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한 걸음.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블러드 서커는, 네크로맨서가 눈치 챌 수 없도록 은밀하게 마나를 움직였다.
혈환무(血幻霧).
피를 사용해 불가시의 안개를 만들고. 그 일대를 그녀가 원하는 환상으로 가득 채우는 최고급의 환술이다.
‘내상 회복에 전념해야 하는 지금. 이런 환술에 피를 소모하는 것은 너무도 아까운 일이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일단은 이곳에서 살아 나가는 게 최우선.
그녀의 길쭉한 손톱 아래로 붉은 핏방울이 망울져 떨어졌다. 이윽고 핏방울은 지면에 닿기도 전에, 기척도 없이 허공으로 조용히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
“네 년이 다시 본좌의 앞에 나타날 줄이야. 지난번에 베풀어준 아량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지?”
블러드 서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바로 효과가 나타났겠지만, 지금 혈환무를 펼치기 위해선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량은 무슨, 방심했던 거잖아.”
“본좌의 가벼운 방심이 이리 돌아올 줄이야. 그때, 내 끝까지 네년을 쫓아 죽일걸 그랬느니라.”
입 안에 씁쓸한 맛이 퍼진다.
그녀는 쩝, 입맛을 다시며 네크로맨서를 위아래로 훑었다. 역시, 외신의 힘을 느꼈던 그녀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저 신체는···.
자세하게는 알지 못해도. 일단 평범한 인간이나 마족으로 제작한 것은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그 육체···.”
블러드 서커는 꿀꺽, 침을 삼키곤 천천히 입술을 뗐다.
검게 물들어 있는 눈동자.
그리고 은은하게 발산되는 녹색 빛의 안광은, 네크로맨서, 그녀가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언데드의 신체로 전부 대체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 이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네크로맨서.
이윽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치, 네가 놀랄 부분은 이게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아쉽게도 아직 미완성이야.”
“미완성이라.”
블러드 서커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게 미완성이라니.
그렇다면 완성품은 얼마나 대단할 거란 말인가.
그것까진 가늠할 수 없겠지만.
지금까지 네크로맨서가 다루었던 언데드는 물론이고. 자신이 보유한 혈령수라 이상으로 끔찍한 존재가 되리란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범상치가 않은 존재감을 지닌 육신이구나. 아무래도 평범한 소채를 사용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번엔 마족이라도 사용한 건가?”
“뭐, 이것저것···.”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
하지만, 블러드 서커 역시 굳이 알아내고 싶은 생각까진 없었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이곳에서 도망칠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까딱 고개를 기울이며, 네크로맨서가 생긋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뭔가 해볼 생각이라면 그만 두는 편이 좋을 거야.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마나의 흐름이 훤히 들여다보이거든.”
“흥, 이미 늦었다.”
블러드 서커의 육신에서 짙은 혈무가 피어올랐다. 눈치 챈 시점이 지금이라면, 이미 늦은 거나 다름없다.
“혈환무는 벌써 완성되었느니라.”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하다.
아니, 애초에 여기서 싸움을 벌일 이유 자체가 없었다. 네크로맨서가 환영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을 동안. 그녀는 최대한 이곳에서 멀어져 도망치면 그만이니.
“아, 완성 된 게 이거였어?”
그러나.
그녀의 바람대로 되진 않았다.
“···!”
네크로맨서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주변의 마나가 흐트러지더니.
블러드 서커가 준비하고 있던 혈환무가 무력하게 흩어져버렸다.
특별히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손을 휘저었을 뿐인데. 혈환무에 담겨있던 그녀의 의념이 거센 태풍을 만난 나무처럼 그 뿌리째 찢겨 사라졌다.
“어, 어떻게···.”
“개미가 인간의 뜻을 이해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해.”
블러드 서커의 몸이 떨렸다.
물론, ‘어떻게’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다고. 이 상황이 별반 달라질 일이 없다는 것쯤은 그녀도 이해하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뭐냐.”
“음, 이제야 말이 조금 통하네.”
딱, 손가락을 튕기는 네크로맨서.
“네가 자랑하는 혈령수라. 그리고 그 늙은 몸뚱이가 탐나서 말이야. 순순히 넘겨주면 더러운 꼴을 보진 않을 텐데···.”
비죽,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건 항복 제의 따위가 아니었다.
결국 블러스 서커의 몸이 탐난다는 소리는, 협력 같은 관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언데드의 소재로 사용하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으니까.
“참, 세계급 유물도 가지고 있지?”
네크로맨서가 한 발 다가왔다.
그건 단순한 질문이라기 보단 확인과 겁박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블러드 서커는 자신을 노리고 있던 맹수의 발톱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내놓고.”
“더러운 배신자 년이···!”
블러드 서커가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막다른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사자를 향해 털을 세우고 위협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배신자라.”
네크로맨서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는 모욕조차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녀는 다른 사흉들처럼. 다니엘 블랙을 진심으로 섬긴 적이 일 분 일 초도 없었으니까.
“그래, 맞는 말이지.”
“가문의 명예도 모르는 년!”
“글쎄···.”
고개를 까딱, 기울이는 그녀.
“너희들은 블랙 가문이 아니라 다니엘 블랙에게 충성하는 거겠지. 그런데 나는 누구 밑에서 똥꼬나 빨면서 살고 싶진 않거든.”
킥킥, 네크로맨서는 웃음을 흘렸다.
당연하게도 블러드 서커는 표정을 구기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잘 생각해보렴. 카린.”
카린, 그건 블랙 가문 내에서도.
이제는 몇몇 밖에 알지 못하는 블러드 서커의 본명이었다.
“여기서 목숨을 보전할 방법은 없겠지만. 내가 요구한 것들을 순순히 넘겨주면 적어도 비참한 꼴은 안 보게 될 거야.”
“이년···!”
블러드 서커···.
아니, 카린 블랙의 눈에서 끈적한 혈광이 타올랐다. 본래 힘의 절반도 끌어낼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극한의 분노를 내보였다.
“그 가증스럽고 역겨운 입으로 본좌의 본명을 입에 담지 마라. 만일, 한 번만 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간 입부터 찢어죽여버릴 테니.”
“어머나.”
배시시 웃는 네크로맨서.
그녀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네가 그럴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네크로맨서가 이곳에 나타난 시점부터.
이 만남의 결말은 벌써 결정 되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갈기갈기 찢어주겠노라!”
선택의 여지는 없다.
여유가 사라진 외침과 함께. 블러드 서커, 카린 블랙은 네크로맨서를 향해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
같은 시각.
천무그룹 본가의 인공 연못 앞에서. 주양태 회장은 현우를 향해 예고도 없이 휙, 하고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받거라.”
현우가 재빨리 받아 들어보니. 그건 무공 비급이었다. 다만, 전생을 통틀어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새로운 종류였다.
“이게 방금 말씀하신 비전입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주양태 회장.
“지금까지 내가 이룬 모든 무학을 담았다. 이건, 신공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내 일생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겠지.”
“무공의 이름은···.”
“이름은 아직 없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기듯. 무릇 신공이란 본디 완성된 이후에야 명명(命名)되는 법인데. 이건 아직 미완성의 신공이기 때문이다.”
현우의 눈동자가 주양태 회장을 향했다.
창천신공의 비밀과 핵심, 그리고 손에 들어온 이 비급까지. 모두 전생에서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신공이···.”
꿀꺽, 침을 삼킨 현우는 말을 이었다.
“···완성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래, 평생을 걸쳐 고안했지만. 결국 나는 완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미완성의 비급과 함께. 네게 천무그룹을 맡기고자 하는 것이지.”
그 말의 뜻은 명료했다.
주양태 회장, 그는 현우로 하여금 이 신공을 완성시키길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 펼쳐보지 않았기에 이 비급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이것만큼은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펼치기 전이기 때문에 묻고 싶었다.
“이미 창천신공은, 그 자체로 최강의 신공 아닙니까.”
“하하, 그건 아니다.”
주양태 회장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주먹을 몇 번 쥐락펴락 하더니. 이윽고 손아귀 안에 축염강기를 띄워 보여주었다.
“창염, 그리고 축염강기.”
그가 주먹을 쥐자.
손 안에서 흔들리던 축염강기가 허공으로 아스라이 흩어졌다.
“세상에 이보다 구조적으로 뛰어난 권능이 없을 것 같더냐. 나는 지난 50여 년간, 이를 뛰어넘는 권능과 무학을 몇 번이고 목격한 바가 있다.”
그러나···.
언제나 최강은 주양태 회장이었다.
“최강은 그 자체로 최강일 뿐.”
검과 검을 맞대었을 때.
반드시 더 단단하고 뛰어난 검을 쥔 자가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부러지지 않고, 상대의 급소를 찌른 검을 쥔 자가 승리할 뿐.
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최강의 신공이라 함은 결국, 최강이 사용하는 무공을 일컫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주양태 회장은 씨익 웃었다.
“하여 창천신공이 최강이라 불린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최강이었기에 창천신공 역시, 그간 최강의 신공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게지.”
“맞는 말씀이군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최강이라는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 불리며 꺾이지 않은 자가 최강이라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나를 뛰어넘거라.”
주양태 회장이 말했다.
가벼운 말투였으나.
그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자신을 꺾으라는 요구.
그건, 현우에게 새로운 최강자의 자리에 올라서라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쉽진 않겠군요.”
그러나 못하겠단 소린 하지 않았다.
불가능이라 생각하진 않았으며. 또한,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해내고자 했던 일 중에 하나였다.
“현우, 넌 이미 해내지 않았더냐.”
“해냈다니···.”
주양태 회장의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이내 그는 현우의 심장 부근을 검지로 쿡, 찔렀다.
“지금 네가 품은 불꽃 말이다. 그건, 내가 일평생을 바쳐 고안해낸 창천신공의 불꽃을 네게 맞추어 발전시킨 결과잖느냐.”
“···우레불꽃 말씀이시군요.”
“흠, 우레불꽃이라 부르나.”
주양태 회장의 입가가 씰룩였다.
아무래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게 출발점이 될 게다.”
일말의 의심도 없는 목소리로 그는 현우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리고 현우 또한.
그의 믿음에 부응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비급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
‘생각지도 못한 것을 손에 넣었군.’
현우는 의자에 앉아 조심스럽게 주양태 회장에게 받은 비급을 살폈다. 다시 봐도 역시, 이런 비급은 처음이었다.
그가 아는 한, 천무그룹의 비고 가장 깊숙한 구역에도. 이러한 비급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아마 주양태 회장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거나. 최근에 제작한 것이 분명한 비급이었다.
‘미완성이라고 했지.’
이름 없는 비급.
이걸 아티팩트 등급으로 따진다면···. 아니, 이건 애초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좋아.”
약간의 기대를 품고.
현우는 비급의 펼쳐 넘겼다.
첫 장을 펼침과 동시에.
머릿속에 작은 불씨가 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비급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지금 현우가 가진 오성(悟性)은, 비급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즉시 성취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장을 넘긴 짧은 순간에도 현우는 가벼운 심득을 깨우쳤고. 그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자신이 쌓아온 무학이 진일보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현우는 꿀꺽 침을 삼켰다.
확실히 주양태 회장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할 만한 물건이었다.
간단히 살펴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도무지 비급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비급을 한 쪽 넘길 때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머릿속에서 일었던 작은 불씨는, 어느덧 크게 몸집을 불린 거친 불꽃의 파도가 되어. 현우의 심상세계 안에서 한바탕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현우는 비급을 탐독하는 데에 전념했고. 어느새 비급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화아악─!
심상 속의 불꽃이 폭발하듯 부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격렬한 화마가 사고 전체를 감싸며 타오른다. 현우는 미간을 좁히며 눈을 찡그렸다.
마지막 구결.
미완성이라고 했던 주양태 회장의 말대로. 그 부분은 뚝, 끊어지듯 비어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되는데.
아쉬운 마음은 현우를 다시 비급의 첫 장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현우는 눈을 내리감고 비급을 넘기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준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지막 구결은 완성하지 못했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똑같았고. 심상 속에서 폭발할 것처럼 타오르던 불꽃은 다시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안 되겠군.’
아쉬운 마음을 접고 현우는 비급을 덮었다.
아직, 이를 완성하기엔 성취가 부족하다.
더 반복해봤자 해소되지 않는 미련이 심마(心魔)로 변해갈 뿐이다.
그런데···.
천천히 눈을 뜬 현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그곳엔 자신의 방이 아닌.
낯익은 심연이 펼쳐져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