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신화, 분기점(1)
존재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녀석은 잠시간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녀석의 표정에선 더 이상 웃음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한가.]“확실해.”
[···.]대신 의심하는 눈빛으로 녀석은 현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의심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아직, 알을 깨고 나오기엔 너무 이른 것 같은데. 내가 계산한 바가 맞는다면, 앞으로 적어도 수 천···. 아니, 수 만 번 이상은 더 죽음을 반복해야 가능하다.]“아니.”
그러나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충분해.”
[흠.]존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보기에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까딱 고개를 흔드는 녀석.
현우는 가만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둘 중에 어느 쪽이냐.]강렬하고 현실적인 죽음.
실은, 이 심연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모두 현실이다.
다만 현우가 죽는 순간, 죽음의 사실마저도 하나의 불확실한 가능성으로 승화되어 사라질 뿐.
그러나 목숨이 무한하다고 하여 인간이 지닌 본연의 정신력까지 무한해 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끝없이 반복되는 죽음은 정신을 갉아먹으며. 영혼 그 자체를 피폐함이라는 감정 속으로 끌어당기기 마련.
이는 인간의 정신을 서서히 마모시켜 미치게 만들기엔 충분한 경험이다.
최악의 경우···.
산채로 미처 버리게 된다는 것.
“안 미쳤다.”
[그럼 전자인가?]“그것도 아니야.”
현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귓구멍이 막혀 있는 게 아니라면, 내 말을 제대로 들었을 텐데. 이번이 마지막이고 확실하다고 말이야.”
[당연히 제대로 듣기야 했다. 다만,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되물었을 뿐이지. 이번 한 번을 마지막으로 끝내기엔 아직 네 성취가 많이 부족하지 않은가 싶은데 말이야.]존재는 비죽, 웃음을 머금었다.
의도가 어찌 되었건 간에, 마지막이라는 말의 의미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가 준비한 안배를 이번 차례에 극복하겠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
[설마, 포기하는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확신이었다.
단순히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아닌,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수 밖에 없을 거라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
“알을 깨라고 했지.”
꾸욱, 현우는 주먹을 쥐었다.
녀석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물음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이 그 순간이다.”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하다.
현우의 발이 지면과 자신의 몸을 동시에 밀어냈고. 얼마 되지 않은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러나 이곳에서 거리는 무의미하다.
[아직 부족하다니까.]존재의 짧은 한 마디.
무형의 힘이 두꺼운 벽이 되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것만으로 둘 사이의 거리는 무한에 가깝게 늘어진다.
“아니, 충분해.”
현우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의념이 마치 그물처럼 뻗어나갔고. 이는 곧,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의(意)와 념(念)에 반응한 심연이 무한히 늘어진 거리를 현우의 코앞으로 당겨온 것이다.
그렇게.
바랐던 대로 거리가 좁혀졌고. 현우는 그저 당연한 결과라는 듯. 존재를 향해 전력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흐음.]작은 탄성.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도 다행히 미친 것은 아니었고. 과도한 자신감에 눈이 멀어 주제 파악을 그르친 것뿐인 모양이었다.
존재는 뒤로 반보 물러나며 빙글 허리를 돌렸다. 그렇게 일격을 회피함과 동시에 회전력이 더해진 주먹이 현우의 옆구리를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이미 현우의 눈은 그 주먹을 좇고 있었다. 터억! 서로의 손과 손이 얽혀들었고. 한 걸음을 사이에 둔 거리에서 순식간에 수 십 합이 지나갔다.
[아쉬워.]맞닿았지만, 꿰뚫지는 못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단을 맞춰주었으나. 이 정도로는 희박한 승산조차 주현우에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허세에 불과했나.]존재가 중얼거렸다.
현우는 답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가볍게 들어 올린 손이 그의 주먹을 단단히 막고 붙잡았다.
[한 번, 더 죽어라.]그리고 대처를 하기도 전에 존재가 현우를 주먹 채로 잡아당겼다. 당연히 그 힘에 의해 균형이 무너지며 무방비한 틈을 드러낼 수 밖에 없으리라.
실수와 오판.
여기선 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현우의 주먹이 모래처럼 손아귀 사이에서 사라졌다. 계산에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 존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마치 존재가 주먹을 붙잡고 당길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현우가 그가 당긴 방향을 향해 뛰어들며 새로운 투로를 열어낸 것이었다.
“말했잖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뒤로 당겨져 있던 오른손이 펼쳐진 일장(一掌)이 되어. 존재의 목전까지 치닫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
설마, 벌써 여기까지 성장했나.
[아주 좋군.]놀라운 진보였지만···.
이 또한,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존재는 현우의 속도를 웃돌고 있었다. 그건 ‘이상적인 가능성의 결합체’인 존재에게 있어선 필연적인 결과였다.
주현우가 진일보 하는 만큼.
그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가능성 역시, 그와 함께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테니까.
그건 이른바 무한이었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성장으로 이 존재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점을 넘기 위해선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결합체라는 존재는, 주현우가 도달해야할 통과점과 현재 지점의 거리를 한 없이 잡아 늘린다.
과정만이 계속 반복된다면.
결코 결과에는 도달할 수 없다.
현우는 강하다.
또한, 완성에 한 없이 가까워진 변수다. 그러나 그렇기에 아직은 이 ‘보다 이상적인 가능성’의 결합체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니, 그래야 했다.
일장을 막아내려 팔을 교차시키는 순간.
쩌적─!
심연을 관통하는 소음이 들렸다.
[음?]이 심연은 무한히 일그러지고 변화하는 공간이다. 모든 가능성이 흘러들어와 섞이고 뒤틀리는 곳이지만. 소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제 끝내자.”
바로, 그 ‘무한’ 속으로 주현우라는 변수가 섞여 들어갔다.
무질서와 혼돈으로 이루어진 심연이 그의 의념에 반응해 움직인다. 이윽고 심연이란 공간은 통째로 타오르는 백색의 불꽃이 되었다.
신화(神火).
그건, 신화(神話)에 이른 권능이자.
수많은 죽음의 경험 속에서 트인 시야로 완성해낸 완전한 합일의 결과였다.
[오오···!]불꽃으로 변한 세계에서.
존재는 진심으로 경탄을 내뱉었다.
신화, 백주(白晝).
찬란한 백색 불꽃이 현우의 전신을 휘감으며 타올랐고. 이내 그 앞의 모든 것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한 걸음.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던 일격이.
그 순간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변모한다. 모든 가능성이 얽히고 뒤바뀌고 ‘이상적’인 개념이 뒤틀린다.
이상이 불타 사라진다.
가능성과 가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신화(神火)의 맹렬한 불길 속에 삼켜진다. 전진하는 일장 앞을 막아섰던 팔이 무력하게 으깨지고 부서진다.
“어금니 꽉 물어.”
그런다고 의미는 없겠지만.
어쨌든 현우의 손바닥은 전진했다.
그리고···.
퍼억─!
흡사 잘 익은 수박처럼.
현우와 똑같은 외모를 취하고 있는 존재의 머리가. 터져 나온 일장의 위력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했다.
처음 선언했던 그대로.
이렇게 현우는 수 없이 이어진 죽음에 종지부를 찍어냈다.
***
“이걸로 끝난 거냐.”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심장은 여전히 쿵쿵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처음으로 심연과 동화된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증거였다.
스르륵─
수많은 육편으로 화했던 존재가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현우의 일격에 박살나기 직전, 본래 취하고 있던 원형을 되찾아 간다.
[흐흐···.]가벼운 웃음.
현우는 살짝 눈을 찡그렸다.
녀석이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터트린 자신과 완전히 동일한 얼굴이 되돌아오는 광경은, 그리 볼만한 것이 못되었다.
[더 해보고 싶은가.]“아니.”
고개를 저었다.
지치거나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 이 짓거리를 더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사실 더 해볼 필요도 없지.]존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현우는 그가 바라던 선을 넘어섰다.
자신이 갇혀 있던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왔으니. 여기서 몇 번을 반복한다고 해도. 계속해서 같은 결과만이 반복될 뿐이다.
극복한 가능성은···.
더 이상 주현우의 발목을 잡지 못한다.
[축하한다.]“좆까.”
[흠, 진심이었는데.]존재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반대로 현우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녀석 덕분에 인지하고 있지도 못했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 모든 경험은 현우에게 있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미 한 번 죽어본 경험이야 있었지만.
이렇게 셀 수도 없는 죽음을 반복하며. 자신보다 조금 더 완벽한 자신과 주먹을 맞대어 벽을 느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고작 이번 한 번으로 만족하나. 지금까지 네가 죽어온 횟수를 생각하면, 적어도 몇 번은 내게 쌓인 감정을 쏟아낼 거라고 예상했다만.]“굳이?”
[의외로 이성적이군.]존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녀석은 정말 현우가 자신에게 달려들어 화풀이라도 할 것이라 짐작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다.
죽음이라는 것은 몇 번을 반복한다고 해도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고. 매 회마다 쌓이는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피로는, 말 그대로 영혼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 한 상흔이 되어 현우를 괴롭혔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죽지도 않을 텐데.”
의미 없는 짓이라는 것이 자명한 이상. 현우는 그런, 쓸데없는 곳에 체력과 심력을 동시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이제 네가 준비한 안배인지 뭔지. 그건 확실히 통과한 것 같은데. 그래서 이 모든 염병들에 대해서 설명이라도 해줄 거냐?”
[아, 그래. 그래야지.]하지만.
존재는 그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네게 전부 설명해주고 싶기야 하다만.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군.]“엿 먹이겠다는 거냐.”
[아니, 정말 그런 게 아니다.]고개를 가로젓는 존재.
녀석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이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현우에게 앉으라는 듯, 턱 끝을 까딱 움직여 맞은 편을 가리켰다.
“···.”
현우는 불쾌함이 묻어나오는 시선으로 존재를 노려보았으나.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여 일단 녀석이 원하는 대로 맞은편에 똑같이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의 입이 열렸다.
[네게 설명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게 우리가 합의한 유희의 규칙이거든.]유희와 규칙.
어느 것도 현우에겐 분명히 와 닿는 단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희라는 것을 보아하니. 분명, 자신을 아자토스라 소개했던 이 존재가 무언가를 꾸미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우리’라는 건?”
[아, 거기서 부터가 좋겠군. 물론 말했듯이 전부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아무것도 안 알려주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거슬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녀석의 입에서 정보를 꺼낼 방법도 없었다.
쥐어 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으나.
이 공간에서는 녀석도 현우도 죽지 않을 테고. 심지어 저 존재에게는 고통이란 감각 자체가 없는 것 같았으니까.
[‘우리’는 외신이다.]존재가 입을 열었다.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막상 이렇게 직접 녀석의 입으로 확인하고 나니. 뭔가 김이 빠지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런 자그마한 불평은 자연히 사그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유희다. 물론, 너를 비롯한 미물들은 알지 못하겠지만.]“유희···.”
처음 본 순간.
녀석은 현우를 변수라고 칭했다.
기나긴 유희를 끝낼 변수.
이제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감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직, 녀석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많이 남았다.
[대전이, 게이트, 마족 등등··· 이 모든 것은 매번 반복되면서 세부적인 과정은 조금씩 변하지만. 결국, 유희의 끝은 매번 정해져 있는 결과로 끝을 맺는다.]“···블랙 가문의 승리인가.”
[아니, 그 녀석들은 수많은 수단 중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방식은 매번 달라지나 유희의 끝은 언제나 멸망이라는 결과로 수렴하게 되지.]멸망.
그건 현우에게 있어 크게 와 닿지는 않는 단어였다. 그러나 가벼운 농담처럼 넘길 수 있는 말도 아니었다.
외신이란 존재들에 대해.
정확히 파악한 것은 없다시피 하나. 일단 호의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으니.
[너는 그 정해진 결과를 바꿀 변수다.]“그래서.”
현우는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냐.”
[다니엘 블랙을 죽여라.]그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녀석의 이야기엔 ‘왜’가 빠져 있었다. 현우가 질문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떼는 순간, 녀석이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 뒤의 일은, 경험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그게 이 유희··· 아니, 이 세계의 마지막 분기점이자.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테니까.]현우는 잠시 녀석을 바라봤다.
그렇게 어떤 질문을 꺼내야할지. 조금 고민하다 결국 한 가지를 결정하고 입술을 뗐다.
“그럼 다니엘 블랙 다음은 너, 아니면 네가 ‘우리’라고 일컫는 외신이란 존재들의 차례가 될 지도 모르겠군.”
[허어?]웃음과 불쾌함 사이의 표정으로.
녀석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