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신화, 분기점(3)
하루 전.
“아버지!”
답답한 듯한 주영미 이사의 목소리.
그러나 그녀의 말은 완고한 주양태 회장의 귓가에는 좀처럼 닿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부른다고 결정이 바뀌는 일은 없다. 그리 아비의 선택을 막고 싶었다면, 네가 회장 자리를 이어받지 그랬느냐.”
“그건···.”
주영미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이윽고 그녀는 퉁명스러운 톤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이야기가 끝난 사안이잖아요.”
“네가 원한다면 뒤집지 못할 거야 없지.”
“아버지가 보시기엔 제가 그런걸 원할 사람 같은가요. 적어도 저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
바로 그 점이.
지금까지 그녀가 본인보다 뛰어난 오빠들 사이에 끼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무그룹 내에서 가장 안정적인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회장 자리에 앉아서 그룹을 이끌어나갈 사람은, 이미 정체된 경지에 머물러 있는 저보다는 아버지의 비전을 이은 현우 그 녀석이 훨씬 어울려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미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지. 정말 많은 것이 변했고, 이젠 나도 물러날 때가 되었어.”
“그럴 지도 모르죠.”
주영미 역시.
달라진 건우의 모습을 보곤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기에 주양태 회장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천무그룹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전례 없는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주양태 회장이라는 커다란 기둥이 본가를 떠나게 된다면, 이는 이후 여러 예기치 못한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천무그룹의 지존.
주양태 회장이 자리를 비운다.
그것만으로도 주제를 모르고 호시탐탐 천무그룹에 이빨을 드러낼 기회를 노리는 놈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될 테니까.
“이런 시기에 천무그룹을 떠나시겠다니. 저는 아버지 생각에 무조건 반대에요. 부디 다시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주영미는 반대였다.
안 그래도 그가 현우에게 그룹을 승계하면, 한동안 내부를 단단히 결속하기 위해 사력을 기울여야할 텐데.
여기서 괜한 문제가 생겨버리면, 차후 그룹의 안정성 자체가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게 되니까.
“마음이야 그러고 싶다만.”
주양태 회장.
그는 가볍게 혀를 차보였다.
“나도 본래는 정식으로 현우에게 그룹을 승계한 이후에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현우가 이래서는 본가에 발이 묶인 채 시간만 흘려보내는 꼴이 아니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오늘로 벌써 며칠 째, 현우는 의식을 잃고 회복실에 누워 있는 상황.
치유사는 생명에 지장이 없다곤 했으나. 이런 시기에 그가 의식을 되찾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만약 유럽지부 쪽에서 실종된 혈족들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의 생존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희박해져만 가겠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 가능성 또한.
아예 없다고는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블러드 서커.
녀석의 습격으로 인해 유럽지부가 무너진 것은 확실하나. 현우를 통해 전해들은 의외의 사실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녀석이 유럽지부를 습격했을 당시.
주진석 부회장을 포함한 다른 천무그룹의 혈족들은 찾아보지 못했다는 것.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블러드 서커의 습격 직전,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됐다.”
주양태 회장은 가볍게 손을 드는 것으로, 이어지려던 주영미의 말을 끊어버렸다.
이미 그가 확고하게 결정을 내린 사인이니.
더 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주영미는 그를 설득하기 위한 뒷말을 삼킨 채.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윽고 그녀는 한숨과 함께 입을 뗐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주양태 회장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언제 출발하시겠다는 건가요.”
“지금 당장, 유럽으로 떠날 생각이다.”
‘어떻게’라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주양태 회장이라면, 맨몸으로 세계를 주파한다고 선언해도 이상하게 들릴 것이 없었으니까.
“회장님.”
그때, 구동철이 나섰다.
“혼자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질문이었으나.
실상 주양태 회장에게 답을 요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이미 질문을 던지면서도 구동철은, 그에게 어떤 답이 돌아올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다른 놈들은 거추장스럽다.”
“한 번만 더, 결정을 재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진석이 녀석을 비롯해서 태우, 아라, 그리고 영우까지. 이번 유럽지부 본가의 혈족이 넷이나 실종되었다. 내가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
구동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내,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재차 입술을 뗐다. 웬만하면 주양태 회장을 거스르지 않는 그였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회장님, 이미 저희 측에서도 며칠 전에 조사대를 구성해서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들로 부족하다 생각하시는 거라면, 오늘이라도 바로 2차 조사대를 조직하여 출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필요 없다.”
구동철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
주양태 회장은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애초에 굽힐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은 구동철이었으나. 그래도 그 또한 오랜 시간 주양태 회장을 보필한 사내였다.
“회장님이 직접 나서시는 것 보다는 못미더울 수밖에 없겠지만. 이리 혼란스런 시기일수록 회장님께서 천무그룹 본가에 있어주셔야 합니다.”
그는 재차 말했고.
주양태 회장이 한 발 물러나길 바랐다.
“아니, 내가 가야만 한다.”
하지만···.
오히려 주양태 회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평소였다면 슬슬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자신이 원하는 뜻을 그대로 밀고 나갔을 그였겠지만. 이번엔 입을 여는 분위기부터가 뭔가 달랐다.
“우리가 조직할 수 있는 조사대 수준으론, 분명히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다. 되레 괜한 목숨들만 희생되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해야겠지.”
“···.”
구동철과 주영미.
두 사람 모두 그 논리에는 반박을 꺼낼 여지가 없었다.
주진석 부회장.
주양태 회장에 이어 천무그룹의 2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가. 바로, 유럽지부를 담당하고 있던 이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분명 이건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이는 내가 회장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기도 하다.”
“···아버지.”
입술을 꾸욱 깨무는 주영미.
그러나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도 잠시, 주양태 회장이 짧게 이어지고 있던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현우가 깨어날 때까지.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본가를 수호하도록 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구동철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고.
그제야 주양태 회장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등을 돌렸다.
“이 배후에 누가 있던···.”
주양태 회장의 눈이 날카로운 살기로 번뜩였다.
“일이 아무리 잘못 된다고 해도. 내 반드시 그놈만큼은, 함께 저승으로 데려가고 말 것이다.”
***
‘생각보다 시간이 더 지났네.’
이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줄이야.
현우는 가볍게 혀를 차며, 괜히 자신의 뒷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무려 일주일.
그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기간이었다. 심연이라는 공간 속에서 아자토스와 대면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모양이었으나.
그 이후, 신화의 불꽃을 흡수하고.
이로 인해 신체의 재구성, 환골탈태라는 성취를 경험하면서. 의식을 잃고 일주일이나 누워 새로운 신체에 적응하는 기간을 거친 것이었다.
‘설명이라도 제대로 하던가.’
그 빌어먹을 녀석.
앞에서 계산이니 안배니 떠들어대던 모습을 돌이켜 보니. 아마 현우가 이렇게 될 거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테지.
“도련님.”
언짢은 기분을 가라앉히고 있자니.
류한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성취는 있으셨습니까.”
“당연하죠.”
현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곤 가볍게 손을 들어 손바닥 위에 새롭게 손에 넣은 권능, 그 증거인 순백의 불꽃을 띄워보였다.
“오오···!”
주건우가 눈을 반짝 빛냈다.
녀석은 백색의 불꽃이 그리도 신기하게 보였는지. 요리조리 현우의 침대 주위를 돌며 불꽃을 섬세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굉장하군요.”
작은 탄성과 함께.
류한나는 불꽃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자그마한 불꽃 안에, 얼마나 방대한 힘이 응축되어 있는지 명확히 느낄 수만 있다면 말이다.
“형, 그래서 이건 뭐라고 부를 거야?”
신나서 묻는 주건우.
현우는 씨익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신화(神火).”
“신화···!”
녀석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무래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짝짝짝─
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현우는 예리한 기감을 통해. 이미 그 박수의 발원지를 인식하고 있었다.
“훌륭합니다.”
어느새 열려 있는 회복실의 문.
그곳엔 지난 천마산의 이변 이후.
줄곧 천무그룹에 신세를 지고 있던 성녀, 아그네스 그레고리오 본인이 서 있었다.
“···성녀 님.”
“애칭으로 부르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용사님께선 그러실 마음이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예, 그건 뭐···.”
평생 안 부를 것 같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의식을 잃은 동안 자신을 간호해준 것은 물론. 이변의 해결에 도움을 요청하자마자 한 달음에 달려온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미약한 부채의식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앞으로 노력해보도록 하죠.”
“흐음···.”
아그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윽고 그녀는 미끄러지듯이 걸어 현우가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류한나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으나.
그녀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조용히 아그네스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방금 그 불꽃.”
아그네스가 현우의 손을 가리켰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그의 손바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가 나타남과 동시에 신화를 소멸시켰기 때문이었다.
“보셨군요.”
알고는 있었으나.
현우는 의도적으로 물으며 다시 손바닥 위로 신화의 불꽃을 만들었다.
“예, 일부러 엿본 것은 아닙니다.”
아그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현우가 만들어낸 신화의 불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불꽃이 그녀의 손을 태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봄볕처럼···.
그녀의 손을 온후한 온도로 감싸며 조용히 타오를 뿐이었다.
“성화···.”
아그네스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현우가 만들어낸 신화의 불꽃에서 신성력과는 다르나. 그 궤가 비슷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역시나 제 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곧,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았다.
“본교에 귀의하지 않았음에도 이와 같은 힘을 다루신다니. 주현우 님께서는 명실상부 용사님이신 겁니다.”
그녀가 눈을 빛냈다.
방금 전, 주건우의 눈에 깃들었던 빛과는 사뭇 다른 색채. 현우는 그녀의 눈빛 속에서 왠지 모를 꺼림칙한 예감을 느꼈다.
그 예감의 적중 여부를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털썩─
현우는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무릎을 꿇는 아그네스를 보며 좋지 않은 예감이 그대로 적중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일단 물어보기는 했지만,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 자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질문까지는 필요 없긴 했다.
그건 기도였다.
현우는 치밀어 오른 한숨을 뱉으며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
“이 또한 위대하신 분께서 세상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마련하신 안배. 그러니 마땅히 그분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올려 않겠습니까.”
현우는 입술을 꾹 닫았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진상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여기서 진실을 폭로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지는 않는다.
“아.”
아그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느새 맞잡았던 손을 풀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현우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불편하셨던 모양이군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리 염려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릇 신앙이란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법. 제가 감격에 겨운 나머지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아그네스.
현우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저었다. 딱히 사과를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고. 이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뭐, 그건 그렇고.”
그래서 바로, 화제를 돌렸다.
당장 중요한 이야기는 따로 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이야깁니다만.”
현우의 한 마디.
주양태 회장이 본가에서 떠난 지금. 이는 지금부터 천무그룹을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의 첫 번째 명령이 될 것이다.
잠시, 현우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건, 천무그룹의 행보는 물론이고. 이후 세계의 운명까지 결정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선택일수록 빠르고 간단하게.
그게 바로 지금까지 현우가 가지고 실천해온 모토였다.
“총력전을 시작할 겁니다.”
계획은 간단했다.
현재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 적을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게 파괴해버리는 것.
바로 이 순간을 기점으로.
다니엘 블랙과의 오랜 악연은 새로운 분기점을 지났다.
“총력전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블랙 가문을 완전히 끝장낼 거라는 소립니다.”
그건, 지금부터···.
이번 전쟁의 판도를 완벽하게 기울여버릴 것이라는 예고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