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47
147화 사건의 전말(1)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도시 외곽에 존재하는 거대한 자작나무 숲. 그 한 가운데엔 거대한 회백색의 외관을 가진 저택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평소라면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겠으나.
지금, 저택은 외관부터가 험한 시기를 겪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그을리고 무너져 공격받은 증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저택 내부의 회의실.
“태상호법.”
소피아 미하일로브나 로마노바.
얼마 전 로파노프 가문의 젊은 여성 가주로 등극한 그녀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남은 인원은 어떻게 되죠.”
“저택 내부에는 장로 다섯과 호위대 전원 만전의 상태로 대기 중입니다. 아무리 못해도 당장 저택을 방어하기엔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다만···.
태상호법, 드미트리 로마노프는 뒷말을 흐렸다. 본가 저택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 정도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현재 외부로 나간 공략팀 대다수는 연락이 끊어진 상태. 이러한 정황이 어떤 사실을 시사 하는 바인지. 그건 굳이 말로서 전하지 않아도 너무나도 자명했다.
“본가 내부에 남아 있는 물자로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나요. 이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은 물자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닐 텐데요.”
“다행히 포션 등은 넉넉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포션 같은 소모품 외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소피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안 좋은 소식을 말해보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문제는 식량입니다.”
“···역시, 그 부분이 문제군요.”
“애초에 본가의 용도가 대피소가 아니기도 하지만, 민간인을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이래저래 변수가 많이 생겨버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에 거대한 사슬이 떨어지는 이변이 발생한 후. 도시 전체는 기본적인 기능이 마비될 정도로 엄청난 혼란에 휘말렸다.
협회와 군대는 철수했고.
사슬에서 소환된 마족 군단이 거리를 활보하며 민간인을 학살하는 상황. 유일하게 이를 막을 수 있던 것은 로마노프 가문뿐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적의 세력은 강했다. 마족 군단은 사슬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었고. 가문 소속의 헌터들은 죽고, 다치고, 도망치는 등의 아비규환 속에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본가의 저택은 최후의 보루.
이곳마저 무너진다면 그야말로 끝이다. 보호하고 있는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그녀, 소피아마저 희망보다는 절망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어떻게든 방어가 무너지지 않는다 해도. 결국 식량이란 문제에 당면한 이상. 끝이 다가오는 것은 시간문제야.’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외부와의 연락은 완전히 끊어져버렸고. 겨우 버티던 로마노프 본가 역시, 이제는 거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밖엔 볼 수 없었다.
‘외부의 지원도 기대하긴 어렵겠지.’
애초에 현재 노보시비르스크의 상황이 이 수준으로 악화된 까닭부터가. 협회와 군대가 도시를 버리고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악화되면 악화되지.
여기서 더 나아지기란 어려우리라.
“···전부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가주께선 옳은 선택을 하셨소.”
소피아의 자책에 드미트리를 필두로 다른 호법 장로들 또한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녀를 위로했다.
“전전대 가주, 미하일 님께서도 똑같은 선택을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가주를 대신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
소피아는 잠시 입을 닫았다.
입술을 꾸욱 깨물며 약해지려던 마음을 추스른 그녀는, 이내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현실과 마주했다.
‘그래도 버티는 수밖에 없다.’
사선(死線).
이들은 전원 그 앞에 서 있었다.
다들 아직은 괜찮다고 눈을 돌리고 있을 뿐. 모두가 사선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선이 무방비한 그들을 향해 속절없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겠군요.”
결사 항전.
이는 달리 그 외의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이나 다름없는 선택을 해야 함이었다.
“우선 남은 물자를 최대한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철저히 분배하고. 특히, 그 중에서도 전투와 저택의 방어에 투입되는 인력들에겐 가능한 부족함이 없게 신경을 써보죠.”
“예, 가주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고개를 숙이는 장로들.
이처럼 위기 앞에서 로마노프는 내적으로 더욱 견고한 결속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상황을 완전히 타파하는 데에는 이렇다 할 도움이 될 수는 없다. 다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여전히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다.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에···.
이들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유예가 멈추지 않는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빠르게 떨어져 사라져가고 있었다.
***
“총력전이라···.”
주영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양태 회장이 스위스로 떠난 것이 불과 어제다.
이들이 하루만 엇갈리지 않았더라도. 이런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건 현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총력전.
말은 쉽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룹 단위의 인원을 움직이는 것은 섣불리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현우는 강하게 주장했다.
외신이라는 존재 중의 하나, 아자토스는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오히려 이쪽이 불리해지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 이유는 모호하다.
지난번, 현우가 주양태 회장과 함께 녀석의 본거지인 복마전을 습격했을 때. 현우가 파악한 녀석의 전력은 지금이라면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녀석 또한 그 사이 가만히 숨어만 있진 않았다는 소리일 터. 결국, 이대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결론만 남는다.
“계획은?”
“간단합니다.”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 손을 들어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
“지금부터 우리는 두 곳을 동시에 공략할 겁니다.”
“···두 곳?”
주영미가 되물었고.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건우는 무영대 대주 구동철 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연락이 끊긴 이와카미 가문을 지원하고. 고모님께서는 본가에 남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계셔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현우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바로 스위스로 출발할 겁니다.”
목표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경로에 로마노프 가문이 있으니. 경유하면서 대략 어떤 상황인지 파악도 해볼 생각이고요.”
“음, 로마노프.”
“일단은 가문 연합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으니. 상황을 확인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가능한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총력전이란 가용한 모든 전력을 사용해서 적과 부딪히는 것. 그리고 현우는 그 전력에 당연히 로마노프를 포함시키고 있었다.
이들이 이미 전멸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아쉬운 일이겠지만. 만약 아직 버티고 있다면, 이용가치가 남아 있는 만큼. 손을 내밀 이유가 있었다.
“그래, 알겠다.”
복잡한 눈빛이었으나.
주영미는 결국 현우의 제안을 수락했다. 사실, 이건 제안이라기보다는 천무그룹의 새로운 정식 후계자로서의 명령이나 다름없었으니.
현우가 강하게 밀어 붙인다면,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의견을 구한 것만으로 그녀는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 전에 말이다.”
주영미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이내 어딘가 께름칙한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네게 손님이 찾아왔더구나.”
“···손님 말입니까?”
그건, 정말 이상한 소리였다.
이런 시기에 찾아올 만한 손님은 몇 없다. 그러나 주영미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반가운 종류의 손님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찾아온 건 어제였지만, 네가 의식을 잃고 있다는 것은 알리지 않았어. 그래도 네가 만나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더구나.”
대체 누가···.
현우는 짧은 시간, 그 손님의 정체에 대해. 기억을 포함한 온갖 가능성을 뒤져 추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
문 밖으로 다가오는 기척.
문이 열리기도 전에 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윽고 열린 문으로 들어온 이는 한 여성이었다.
“오랜만이야. 잠룡.”
가볍게 손을 흔드는 그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온몸에 외신의 기운을 두른 여성. 한 눈에 봐도 저것은 산 자의 육신이 아니었다. 또한, 인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종류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러니···.
손님의 정체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게 반가운 것인지는 일단 차치하고 말이다.
‘···네크로맨서?’
또 하나의 변수.
그러나 적인지 아군인지. 가장 불분명한 존재의 등장에 현우는 우선 부정적인 방향의 가능성을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현우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지금이 원한을 갚긴 좋은 때겠군.”
“아니, 잘못 짚었어.”
네크로맨서는 빙긋 웃었다.
그녀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만한 종류였으나. 일단 적의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뭐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해.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내가 그냥 빈손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점이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그녀.
허공이 쩌억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무언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건···.”
현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리 보기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걸 물건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폐가 있다.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현우에게도 조금 낯익은 인간의 수급(首級)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집들이 선물이야.”
당당히 말하는 태도.
현우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전혀 꿀리는 기색이 없었다.
“어때?”
방긋 웃으며 묻는 네크로맨서.
현우는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블러드 서커의 수급을 가볍게 발로 밀어 그녀 쪽으로 보냈다.
“···마음만 받지.”
“흠, 아쉽네.”
“받아서 쓸 데가 없잖아.”
“글쎄, 나한테는 많은 편인데. 정 직접 받기 싫으면, 그 나잇값 못하는 미친 적마녀에게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다 쓸 데가 있을 테니까.
네크로맨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킥킥 거리는 웃음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필요 없다.”
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적어도 녀석의 죽음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만큼은, 나름 현우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나. 이 따위 것을 선물로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용건은 이게 끝이냐.”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현우는 일부러 날선 태도로 물었다.
“에이, 당연히 아니지. 방금 그건 그냥 선물이었을 뿐이고. 중요한 용건은 따로 있어. 너와 나, 다시 한 번 손을 잡자는 제안을 가지고 왔거든.”
“손을 잡자고?”
“응.”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그리고 말 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손이라도 잡자는 건지. 그녀는 현우를 향해서 불쑥, 오른손을 내밀어왔다.
“우리가 처음 만났었던 사막 투기장 기억하지? 제안하는 이유는 그때랑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돼.”
“네겐 그 끝이 별로 좋지 않았을 텐데.”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쯧, 하고 혀를 차는 그녀.
한동안 현우가 내민 손을 잡아주지 않자. 그녀는 다시 한 번 혀를 차며 내밀었던 손을 회수했다.
“정이 없네.”
“정이 있을 만한 사이가 아니니까.”
“내가 혹시 잘못 알고 있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천무그룹의 본진인 한국에는 미운 정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없다.”
현우는 뻔뻔하게 부정했다.
아무리 네크로맨서라도 그런 모습엔 결국 손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진짜 찔러볼 틈이 없네.”
“정말 손을 잡고 싶은 거라면, 네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명확하게 어필해라.”
“알았어, 알았다고.”
푸욱, 한숨을 쉬는 그녀.
이내 그녀는 눈을 얇게 뜨며 입을 열었다.
“우선, 노보시비르스크. 그곳에 강림한 외신의 편린이 내가 원하는 목표야. 거긴 네가 신경 쓰는 로마노프 가문도 있으니. 동선이 겹칠 가능성도 높겠지.”
주영미와의 대화를 엿들은 걸까.
아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순수하게 여러 정황을 두고 추론한 결과겠지. 역시, 맹해 보여도 그녀 또한 나름 흑마법의 정점에 이른 명석한 마법사였다.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었지.”
네크로맨서가 히죽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현우가 자신의 제안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저렇게 헤실헤실 웃어댈 정도로 내게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제안을 가져왔다고 자신하는 건가.’
그리고 그 의심은···.
바로 이어진 네크로맨서의 말에 확신으로 변했다.
“유럽 지부에 벌어진 사건의 전말. 그리고 지금 그곳으로 향한 주양태 회장의 상황. 나와 손만 잡는다면, 전부 시원하게 알려줄 수 있어.”
그건, 지금의 현우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정보임과 동시에, 그냥 듣고 넘기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어때?”
네크로맨서.
그녀가 다시금 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