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전쟁(3)
“커헉···.”
폐부의 숨이 모조리 짜내어진다.
그저 단순히 숨만 토해낸 것이라면 별것 아니겠지만, 비릿한 혈향이 감도는 입에서는 선지와 닮은 내장 조각들이 꿀럭꿀럭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내장뿐만이 아니었다.
주양태 회장의 경우와는 다르게. 이번에 탑의 벽면에는 금조차 가지 않았고. 충돌의 여파는 그대로 현우의 신체에 전달되었다.
현우의 탈출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다니엘 블랙의 의지가 반영이라도 된 걸까.
진실은 알 수 없겠지만.
덕분에 척추가 완전히 바스러졌다. 현우는 잠시 전신이 마비되는 기분 나쁜 감각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부상은 빠르게 회복된다.
신화 속에 녹아든 재생의 불꽃.
바벨에서 손에 넣은 보스급 마족, 아수라의 권능이 현우의 몸을 불과 몇 초 만에 원래 상태로 복구시켰다.
“하,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현우는 벽에 처박힌 몸을 빼내었다. 아무리 부상이 금방 회복된다고는 해도. 느껴지는 고통은 고스란히 현우의 몫이었다.
고통엔 익숙해질 수는 있어도.
완전히 없는 것처럼 무시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 상황 역시, 그리 유쾌하게 넘기긴 어려웠다.
“아프잖아.”
그 한 마디에 다니엘 블랙은 잠시 할 말을 잊은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상처를 바로 회복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척추가 으스러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멀쩡한 태도로 다시금 투지를 불태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건가.”
“당연하지.”
현우는 침을 뱉었다.
붉은 선혈과 함께 여전히 입안에 남아 있던 내장 찌꺼기가 섞여 나왔다. 재생의 불꽃이 선사하는 불멸성이 어디까지 회복을 가능케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해볼 만했다.
아마 단숨에 머리가 파괴되어 사고가 끊어지는 정도가 아니라면, 인피니티 코어의 마나가 마르지 않는 이상. 재생의 불꽃의 기능은 끝없이 지속될 테니까.
고통만 감내하면 된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을 뿐이었다.
“억척스럽군.”
“남이사.”
혀를 차는 다니엘 블랙을 향해.
현우는 다시금 지면을 박차고 덤벼들었다. 파악! 현우의 주먹이 마치 스스로 궤적을 틀기라도 한 것처럼 녀석의 뺨을 스쳤다.
의념이 만들어낸 현실의 뒤틀림.
다니엘 블랙은 스친 주먹을 흘끗 보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현우의 팔뚝을 틀어쥐었다.
움직이지 않는다.
붙잡는 힘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데. 전신의 신경이 끊어졌던 방금 전과 비슷하게. 팔이 붙잡힌 순간 힘이 쭈욱 빠져나가며 움직임이 그대로 봉쇄되었다.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이죽이는 목소리.
그러나 현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작 팔 하나가 붙잡혔을 뿐이다. 아직 그에게는 붙잡히지 않은 팔 하나와 두 다리가 남아 있었다.
우득─!
연골과 뼈가 동시에 박살나는 소리.
현우의 몸이 홱, 하고 돌아갔다. 이미 단단히 붙잡힌 팔을 움직이는 대신, 관절과 뼈마디를 억지로 비틀어 부수어 공격을 위한 자세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허···!”
짧은 순간.
다니엘 블랙은 무의식에 가까운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억지와 집념.
그 두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일격. 그건,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에서 필살의 위력을 담아 내지른 극한의 일권이었다.
“뒈져.”
귓전에 들려오는 상스러운 욕설에, 다니엘 블랙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여전히 쥐고 있던 현우의 팔뚝을 가볍게 비틀었다.
주먹은 닿지 못했고.
현우의 몸은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무의미해.”
모든 게 찰나의 순간 일어났다.
마치 물속에서 바라보는 빛이 굴절되는 것처럼. 현우의 주먹은 다니엘 블랙이라는 목표에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
오감과 기감.
육감을 전부 동원한 것도 모자라 본능의 영역에 도달한 예측까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니엘 블랙의 의념 앞에서 의미 없는 잔재주에 불과할 뿐이었다.
‘알고는 있어.’
이걸로 안 된다는 것쯤은.
그러나 심연에서 아자토스에게 경험한 수많은 죽음의 기억은, 현우에게 고작 이 정도로 꺾이지 않는 억척스러운 끈기를 심어주었다.
내가 먼저 꺾이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녀석을 꺾을 가능성이 커진다. 아니, 커지지 않더라도 남아 있는 가능성을 적어도 0퍼센트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다.
그게
“꽤 놀라운 힘이지만.”
꽈아앙─!
순백의 불꽃이 다니엘 블랙을 덮쳤다. 이는 ‘개념’ 그 자체를 태워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권능이지만. 녀석은 그 앞에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손을 뻗었다.
완만한 원을 그리는 손.
느슨하고 천천히 이루어진 움직임 직후. 주위의 모든 흐름과 공간이 뒤틀렸다.
번쩍, 신화가 폭발하며 섬광을 터트렸고. 그 여파로 인해 탑의 벽면이 잡아 뜯은 것처럼 거칠게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 궤적 속에는 다니엘 블랙이 없었다. 분명히 녀석에게 닿았어야했을 일격이다. 그러나 신화의 불꽃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뒤틀려 빗껴나간 것이었다.
‘···가능성.’
현우의 눈이 일순 빛났다.
녀석의 의념이 어떻게 동작하는 건지. 아주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현우에게 있어선 꽤나 유용한 정보였다.
“네가 나눈 계약.”
현우는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일합으로 뭔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번 세계의 유희를 예정된 것보다 빠르게 끝내는 걸로. 다음 세계로의 이동을 보장받는다고 했었나.”
“이제 와서 흥미를 느낀 건가?”
다니엘 블랙은 코웃음 쳤다.
“혹시라도 내게 투항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미 늦었네. 자네가 그걸 원했다면, 이 탑에 들어온 순간부터 무릎을 꿇고 내게 복종했어야지.”
“무슨 개소리를.”
착각도 유분수다.
현우는 가볍게 어깨를 돌려 몸을 풀며. 녀석에게 비릿한 조소를 던졌다. 투항이니 복종이니 현우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그게 네 목적은 아니었을 것 같아서 말이지. 네가 직접 이야기했잖아. 내 덕분에 본래의 계획이 많이 틀어졌다고 말이야.”
“···흐.”
해쭉, 녀석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지금 나를 도발하려 드는 건가.”
“뭐, 단순한 궁금증일 뿐이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걸지도 모르고. 그거야 듣는 사람 마음이겠지.”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그 발상부터가 틀렸다네. 이곳에서 시간을 끌어서 불리해지는 쪽은 자네야.”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건 알고 있어. 다만, 네가 급한 마음에 계약을 나눈 외신이 누군지 조금 궁금해진 것뿐이다.”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녀석이 그냥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 현우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자토스.”
“···뭐?”
다니엘 블랙의 눈썹이 떨렸다.
현우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아마 녀석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 힘, 순수한 의념은 아니겠지.”
생각과 의지.
처음엔 그 두 가지 만으로 현실을 비트는 힘이라 짐작했지만. 직접 상대해본 이후, 더 복잡한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의념의 힘 또한···.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그 근원을 추측해내는 데엔 성공했다. 지금껏 녀석에게 부딪혔던 모든 과정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가능성을 다루는 권능.
‘결국, 다니엘 블랙은 내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 혹은, 나를 위한 또 하나의 안배였던 건가.’
이상하긴 했다.
만일, 다니엘 블랙이 아자토스의 뜻과 대척점에 있는 거라면. 녀석에게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녀석과 대립한다는 다른 외신의 뜻을 따르고 있는 거라면 더더욱 말이다.
“···변하는 건 없다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힘의 정체를 완벽히 파악한들, 지금 당장 그걸 넘어설 방법이 없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계약 이행은 물론이고 내 모든 계획의 부정적인 변수인 자네는, 이곳에서 그만 퇴장해 주어야겠어.”
“정곡을 찔렸나 보군.”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졌을 뿐이네.”
녀석이 펼친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이윽고 꽈악 쥐어지는 손바닥, 사방에서 무형의 의념이 현우를 눌러 터트리기 위해 닥쳐왔다.
거기서 현우는 뒤가 아닌 앞으로, 녀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저 피하기만 해서는 의미 없는 시간만 소모할 뿐이다.
“짐승과 다를 바 없군.”
주먹을 내뻗는 순간.
모든 타격의 가능성이 무위로 돌아간다. 공간과 현실이 비틀리며, 녀석의 손끝이 현우의 어깨를 밀었다.
다시 벽면에 처박혔으나.
이번엔 그 순간 신화를 일으켜 충돌부가 박살나는 결과는 피할 수 있었다.
“세상에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지만, 그것도 나무 나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고. 녀석의 빈정거림에 일일이 답하는 것 자체가 놀아나는 것일 테니까.
다만···.
녀석의 말대로 같은 방법을 사용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신화의 파괴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백주도 통하지 않는다.
그 이상의 무언가.
아니, 녀석을 완전히 능가할 만한 새로운 혁신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상황이 급박하니 기연이라도 바라게 되는 걸까. 그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운 일이었다.
언제나 막연한 기연을 바라기 보다는, 알고 있는 미래를 대비하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쟁취해 오지 않았던가.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과거로 되돌아온 회귀는 충분히 소설과 같은 경험이었지만. 그건 기연이라기 보단, 아자토스에 의한 필연적인 계획의 일부였다.
결론은 하나.
스스로 찾아낼 수밖에 없다.
‘기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나와 주면 좋겠지만. 지금 당장 요행을 바랄 수는 없겠지.’
투덜거릴 여유는 없다.
결국, 틈이 보이지 않는다면. 계속 방법과 방식을 바꾸어가며 찾아내는 것이 정답이다. 현우가 보기에 아직, 녀석 또한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틈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 이렇게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아아아!”
억척스러운 기합을 뱉는다.
그것만으로 바뀌는 것은 없지만.
단순히 기합만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한다.
내뻗은 오른손이 아공간 포켓에서 세계급 유물 궁그닐을 뽑는다. 바로 젖힌 상체를 앞으로 접으며 필중의 법칙이 담긴 창을 녀석을 향해 던졌다.
우뚝─
허공에서 창이 멈춰 선다. 시간을 멈추고 창의 운동 에너지를 삭제한 것처럼. 그대로 궁그닐이 지면을 향해 떨어진다.
“안 된다니까.”
다니엘 블랙이 이죽거렸다.
하지만 현우는 개의치 않았다. 이게 통하지 않는다면 다음으로 넘어갈 뿐이다. 실패는 결국, 녀석을 탐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프레이야의 룬 망토.’
신화 등급의 아티팩트.
전신에 두른 은신의 장막은, 이미 녀석의 눈에 정확하게 포착되고 있었다. 다시금 현우의 손이 아공간 포켓으로 향했다.
다올로스의 피리.
모든 생물을 잠시 활동불능 상태로 만드는 권능이 담긴 세계급 유물 중에 하나. 마나를 불어넣자 귓전을 울리는 소름끼치는 음색이 퍼져나간다.
“소음이군.”
그러나 그것 또한 녀석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고작 파편에 불과한 것들일세. 그들이 유희에 여흥을 더하기 위해. 그리고 명확한 종점을 만들어 내기 위해. 게임판 안에 던져 넣은 기물이란 말이지.”
소용없다.
확실히 그 말 대로였다.
“자네가 아무리 권능을 완성했다고 해도. 내게는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않아. 더 노력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네. 이제 그만 순응하고 포기하는 것이 어떻겠나.”
“좆까.”
“쯧···.”
혀를 차며 튕기는 손가락.
일점에 집중된 의념이 탄환처럼 쾌속으로 쏘아졌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소리조차 없는 일격. 현우는 오직 감에 의지해 몸을 비틀었다.
퍼억!
간신히 머리는 피했지만.
전부 회피하지는 못했다. 좌반신이 거대한 맹수가 뜯어먹은 것처럼 사라졌다. 격통을 느끼기도 전에 깜빡, 시야가 점멸했다.
‘아.’
의식이···.
날아갔다가, 돌아왔다.
그 사이 재생은 이미 끝났다.
현우는 두 주먹에 힘을 주며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다. 그는 재빠르게 다니엘 블랙의 다음 수를 파악하려 들었다.
사실 이미 알고는 있다.
굳이 파악할 것 까지도 없었다.
아는 것과 대처하는 것.
그게 같은 선상에 둘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이제 슬슬 무료해지는군.”
녀석이 발한 의념이 현우의 왼쪽 어깨를 붙들었다. 꽈드득! 거대한 손이 잡아당긴 것처럼. 현우의 왼팔이 뜯겨나갔다.
불로 지지는 듯 한 격통.
그러나 더 이상 고통은 현우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이제는 거의 본능만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권능을 구사했다.
“허.”
그 악귀와도 같은 모습에, 다니엘 블랙은 결국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일견, 소름까지 돋아날 정도의 집착과 끈기였다.
무아지경 속에서.
현우는 다니엘 블랙과의 거리가 아닌, 그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움직였다.
‘한 걸음만 더.’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회귀 이후, 그리고 회귀라는 기회를 얻기 전에도. 늘 그가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던 것은 정진이었다.
정진의 목표는···.
결국,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힘. 한계를 뛰어넘고 현실을 비틀어 바꾸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아.’
흐릿하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제야 여전히 신화의 촉매로서 타오르고 있는 인피니티 코어의 존재감이 확연히 느껴졌다.
이 또한 아자토스의 안배.
결국, 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언젠가는 벗어던져야만 했을 굴레였다.
사고의 전환.
현우가 무한하다 생각했던 마나의 원천은, 그 자체로 진보의 한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파팍!
현우의 심상 속에서, 작은 불꽃의 폭발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