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전쟁(4)
불꽃에서 번개로.
다시 번개에서 불꽃으로.
찰나의 순간.
현우의 심상 속에서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불꽃처럼 일었던 ‘깨달음’은 곧,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정리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우는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뜨거운 용암을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참기 어려운 열감이 그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신화.
그 불꽃이 인피니티 코어를 침식하고 있다. 이건, 폭주나 실수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우가 바라는 대로 의념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결과였다.
모든 건 찰나에 이루어졌다.
신화의 불꽃은 마치 마른 지푸라기 더미에 불씨를 던져 넣은 것처럼. 한 개의 작은 별로 승화된 인피니티 코어 자체를 분열시켜 무(無)로 되돌린다.
이전과 같은 환골탈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신화의 불꽃을 체득함으로서 현우의 신체가 보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함에 가까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심(心), 기(氣), 체(體) 중에서도 가장 손에 넣기 어려운. 매우 복잡하고 모호하면서도 극히 간단한 심득.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할 수 없던 것들을 해낼 수 있게 된다. 그게 정확히 무언지는, 이제부터 분명한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심장 부근을 감싸고 있던 인피니티 코어. 회귀 이후 상당히 익숙해져 있던 감각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사라진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소화’했다는 쪽이 더 알맞은 표현일까.
아자토스의 안배.
무한한 마나의 근원인 ‘심연’과의 연결 통로였던 인피니티 코어는, 이제 온전히 현우의 존재 자체에 녹아들었다.
코어라는 형태에 가지고 있던 마지막 집착을 버린 결과였다.
“자.”
현우는 다니엘 블랙을 바라봤다.
이 모든 과정을 녀석이 기다려준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야지.”
심상 내부의 변화를 관조하는 시간은 현실보다 훨씬 느릿하게 흘러간다. 그러니 지금 이 한 마디는 녀석의 입장에선 그저,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이것 참.”
씁쓸한 미소를 짓는 다니엘 블랙.
정신 나간 이의 헛소리라도 들은 것 같은 어이없는 저 눈빛으로 보아하니. 예상대로 녀석은 아직, 변화에 대해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의념의 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심상의 변화 또한, 눈이나 기감으로는 절대 쉽게 좇을 수 없는 것이니까.
“정말, 끈질기기 짝이 없는 놈이로군.”
다니엘 블랙은 혀를 찼다.
물론, 빨리 끝내야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주현우의 저 끈질긴 발악은 그를 질색하게 만들었다.
끈질긴 것은 기질 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의 명줄 역시도 좀처럼 끊기지 않는 질긴 고무줄 같았다.
죽여도 죽질 않는다.
치명상은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입혔다. 웬만한··· 아니, 인간의 범주에 있는 존재라면 벌써 수십에서 수 백 번은 죽어 쓰러졌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녀석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저 어쭙잖은 불꽃이 치명적인 상처를 재생시켰다. 솔직히 다른 모든 것보다 그게 다니엘 블랙의 예상을 벗어난 점이었다.
‘저 녀석, 정말로 인간이 맞긴 한 건가.’
트롤 이상의 재생력.
그래,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이쯤 되면 자연히 마음이 꺾여 포기할 법도 한데. 녀석은 도무지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가 지칠 지경이었다.
지친다고 해서 이 짓거리를 멈추는 일은 없겠지만. 죽지도 않는 상대가 계속해서 덤비는 경험은,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리 유쾌하진 않다.
그래도···.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이 싸움,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불리할 부분이라곤 전혀 없었다.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그의 승리가 결정되어 있던 싸움이 아니었던가.
“계속해서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겠다면, 나도 어찌할 방법이 없지. 지금부터 고통 없는 편안한 죽음은 바라지 말게나. 내가 자네에게 베풀 마지막 남은 자비마저 방금 전의 헛소리를 통해 스스로 날린 셈이니.”
결국, 죽이다 보면 죽일 수 있겠지.
상처의 재생 속도가 느려지지 않는 점은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녀석이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이상, 마나도 정신력도 유한하기 마련이다.
계속 이렇게 가다보면.
종국에는 둘 중에 하나가 먼저 밑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밑바닥은 반드시 주현우가 드러내게 될 것이다.
마지막 마무리는 그때에 지으면 그만이다.
인내심.
지금 억지로 이어지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다니엘 블랙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것밖엔 없다.
“이제 자네에게 남은 선택지라고는 포기, 혹은 좌절이 전부일 걸세. 그리고 물론, 이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 원망할 거라면 스스로를 원망하게나.”
이 자리에 마지막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처음부터 다니엘 블랙 그 하나 뿐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단, 완전히 뭉개져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지부터 실험해보도록 하지.”
까딱, 다니엘 블랙이 손가락을 당겼다.
무형의 힘이 움직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허공에 존재하는 것처럼. 아니면, 인간의 시야에는 비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거대한 존재가 직접 자신의 팔을 움직여 손바닥을 움켜쥐는 것처럼.
사방이 현우 하나를 짓눌러 터트리기 위해 옥죄어온다.
숨조차 쉬지 못할, 폐부에 남은 공기마저 모두 쥐어짜 내뱉게 하는 항거 불능한 압력 속에서. 놀랍게도 현우는 다니엘 블랙의 예상과 다르게 앞으로 전진했다.
“···!”
다니엘 블랙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현우가 그의 공격···. 그러니까 사방에서 옥죄는 무형의 손아귀에서 단번에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게 눈에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굳이 실험을 해볼 필요까지는 없을 거다. 어차피, 나도 슬슬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니까.”
“끝낸다니···.”
다니엘 블랙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엇을 말이지?”
“알면서 묻네.”
현우는 픽,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이 싸움을 말하는 거지. 여기서 더 이상 질질 끌고 싶지 않아졌거든. 너도 무료해진다고 했으니. 이제 그만 끝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포기하겠다는 소리를 길게도 하는군.”
“포기라니.”
그럴 리가 있나.
“그 반대야.”
사태 파악이 덜된 다니엘 블랙을 향해. 현우는 망설임 없이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거리가.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너무나도 쉽게 좁혀졌다.
‘저게 무슨···.’
다니엘 블랙은 한 걸음 물러났다.
이 공간에서 녀석은 그의 허락 없이는 다가올 수 없어야 한다. 탑은 물론이고 격리된 차원 전체가 다니엘 블랙, 그의 의념으로 빚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녀석은 본인의 의지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건 본디 있을 수 없는,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과연.”
현우가 말했다.
다니엘 블랙.
녀석은 확실히 특별하다. 그러나 결국 녀석 또한, 외신이라는 존재들이 마련한 장기판 속의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우는, 설령 녀석과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말이다. 계속 전진한 결과, 언젠가는 장기판의 끝에 이르러 그 밖으로 나가버릴 ‘변수’의 말.
“이런 거였나.”
현우는 웃었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서. 어째서 웃음이 나오는 걸까.
“별거 없었네.”
다니엘 블랙이 그를 보며 의아함을 느끼는 찰나. 현우가 불쑥, 손을 앞으로 뻗어 방금 그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을 당기는 시늉을 해보였다.
“···!”
흠칫, 놀라는 다니엘 블랙.
그는 곧바로 서 있던 자리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그건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한 직감적인 행동이었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장 뭔가 일어나진 않았다.
“무슨, 허세를···.”
고작 한다는 것이 블러핑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주현우에게 치명상을 입히려 손을 뻗어 의념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음?’
손끝이 떨려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건드린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 다니엘 블랙은 그 작은 위화감에 의념을 움직이는 것을 주저하고 말았다.
그게 옳은 선택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방금 느꼈던 감각의 정체는 곧바로 알게 되었다.
“말했잖아.”
오직, 그만이 구사하는 것이 가능할 의념에 무언가 다른 게 엮여오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 지금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별거 없었다고.”
“···.”
감도는 침묵.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다니엘 블랙은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저, 주현우에게서 느껴지던 존재감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건, 감각으로 느끼는 영역이 아니다.
실제로 주현우의 기운이나 신체는 처음과 비교에 하등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녀석은 한 단계, 진일보했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 까닭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명확했다.
“왜, 네가···.”
의념을 다룰 수 있는 거냐.
그런 질문을 꺼내려던 다니엘 블랙은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은 ‘어째서’나 ‘왜’라는 질문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쉬이 답을 내긴 어렵다.
그리고 다니엘 블랙이 그런 고민을 떠올린 시점에 이미, 현우는 한 발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침묵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질 뻔 한 그였으나. 미처 끝맺지 못한 질문의 대답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돌아왔다.
사방에 넘쳐흐르는 열기.
넘실거리는 불꽃은 더 이상 의념으로 마나를 움직여 빚어낸 결과가 아니다. 현우의 의념 그 자체가 불꽃이란 형상으로 나타났을 뿐.
의념.
그리고 신화.
찌릿, 하는 전율과 함께 현우의 의식이 확장되었다. 방금 전과는 보이는 것부터가 완전히 달라졌다.
‘녀석의 의념이 보인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다.
애초에 의념이라는 것은 무형의 힘. 지금 현우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의념 그 자체가 아니라 흐름이었다.
현우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짧은 기합과 함께 땅을 박찼다. 들어 올린 주먹에 타오르는 의념의 불꽃이 부드럽게 휘감긴다.
그건, 흡사 바람에 흩날리는 늦은 봄의 꽃잎 같은 형태의 불꽃이었다.
‘마음에 들어.’
천열화(天熱花).
지금 이 곳에서 느긋하게 이름이나 짓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대충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주먹을 뻗는다.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념이 그 과정에 간섭하여 비틀려 들었지만. 천열화가 품은 격이 다른 열기는 의념조차 왜곡하고 불태워 증발시킨다.
비상식적인 결과.
다니엘 블랙은 재빨리 손을 들어 현우의 주먹을 방어했다. 그래, 이번엔 왜곡하고 비틀어 닿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받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큭.”
분명히 닿았다.
단번에 주먹이 너덜거리게 되었지만 분명 타격의 감촉이 느껴졌다. 미세하게 일그러진 다니엘 블랙의 표정이 그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확신.
이제는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현우의 뇌리를 스쳤다. 직후, 현우의 선택은 매우 간단했다.
손을 가볍게 머리 위로 든다.
의념이 열기를 내뿜으며 확장한다.
“허···!”
쿠르르!
단 한 번의 방출로 공간이 진동한다. 하나, 그 진동은 시작에 불과하다. 현우가 가진 의념의 근본은 ‘불꽃’ 그 자체다.
“···백주(白晝).”
조용한 읊조림.
타오르는 의념이 탑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동시에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열기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다니엘 블랙.
녀석의 의념은···.
진짜라고 부르기엔 분명한 어폐가 있긴 하나. 그 근본이라 함은 비틀고 왜곡하고 굴절시키는 힘이다.
‘나는?’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창천신공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제는 주현우라는 존재 자체로서 완성된. 이 ‘신화’라는 무공을 넘어선 힘의 근본은 매우 단순했다.
태우고 증발시키고.
모든 것을 무위로 되돌리는 열기.
개벽(開闢).
태양처럼 떠오른 의념의 불꽃 덩어리가 일순, 불안정한 기세로 부풀어 오른다. 이건 아무리 다니엘 블랙이라고 해도 가벼이 받아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첫 번째 것과는 다르다.
저 구체, 작은 초신성을 이루고 있는 불꽃은 더 이상 권능의 영역에 얽메여 있는 힘이 아니다.
타오르는 의념.
저건, 태양과 같은 불꽃으로 현현한 의념 그 자체였다.
‘이런 미친···.’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올랐다.
다니엘 블랙의 표정이 싸악 굳어졌다.
이제 확실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걸로 그는 더 이상 주현우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지 못한다.
녀석은 그에게 억척같이 덤벼드는 매순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고. 그 결과 다니엘 블랙이 외신과의 계약이라는 편법으로 올라선 영역마저 따라잡고 만 것이었다.
말도 안 된다.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눈앞에 현실로 나타난 결과는 냉혹했다.
피부가 따갑다.
그건 곧, 의념을 통해 비틀고 왜곡하고 굴절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거라는 소리.
경악스러운 결과에 그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외신에게 직접 하사받은 이 힘이 고작, 인간에 불과한 주현우에게 파훼당한 것이다.
“하···.”
짧은 탄식.
그건 굴절시키거나 피하는 것은 불가하고, 직접 몸으로 부딪혀 막아내야 하리라는 것을 직감한 끝에 나온 반응이었다.
하지만, 막아낼 수 있을까.
다니엘 블랙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동요를 내비쳤고. 현우 역시, 어렵지 않게 그 눈빛을 읽어냈다.
“끝이다. 새끼야.”
말 그대로.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이 다니엘 블랙의 신형과 함께. 탑이라는 공간과 개념 전체를 굶주린 아귀처럼 단번에 집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