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유예(2)
주양태 회장의 입이 굳게 닫혔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지면에 처박혀 잠시 의식을 잃은 현우에게 향했다.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네놈이···.”
그가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경직된 분위기가 지금 당장이라도 그가 출수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다른 것보다도 그게 궁금한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다니엘 블랙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건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입가를 매만졌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저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광룡, 주현우뿐만 아니라. 나 또한 이것이 첫 번째 세계가 아니라고 말일세.”
“내가 기대한 대답은 아니야.”
주양태 회장이 주먹을 쥐었다.
어느새 주위에는 축염강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고열의 불꽃 속에서 다니엘 블랙은 귀찮다는 투로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휘날리던 불꽃이 뒤로 물러난다.
주양태 회장이 직접 물린 것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살의를 담아 피워낸 축염강기가 아니었다곤 하나. 그로서는 바로 파악하기 어려운 무형의 힘이 마치 바람이 불꽃을 몰아내는 것처럼 축염강기를 너무나도 쉽게 밀어냈다.
“그 더러운 성격 하나는 손자와 아주 빼다 박았군.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이리 다짜고짜 겁박을 준다고 안 나올 정보가 나오겠나.”
“하···!”
주양태 회장은 코웃음 쳤다.
“내 손자 놈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는, 그럼 아주 좋은 대접이라도 해주기를 기대한 건가. 제대로 된 정신머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군.”
“으음, 미안하지만 나도 당신의 손자에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네. 이건 전적으로 광룡, 주현우가 나의 배려를 무시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일세.”
“궤변이 길다.”
“이것 참···.”
다니엘 블랙이 혀를 찼다.
그는 매우 답답한 표정을 지었으나.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변명과 설명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약간의 짜증이 서린 표정으로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1970년 12월 24일, 발생한 대전이 사건 당시. 첫 번째 회차의 주양태 회장, 당신은 서울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까지 지켜내지 못했어.”
“···.”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시는 천무그룹은커녕, 지금의 B급 수준의 헌터조차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수였고. 주양태 회장 또한,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한국 내에 발생한 수많은 게이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서울을 포함한 한국 대부분은 게이트 브레이크 현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두 번째라고 해서 상황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기적처럼 주어진 두 번째 기회에서도 주양태 회장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아내를 포기했고.
대전이 현상을 성공적으로 극복, 한국이 생존하는 결과와 천무그룹을 세우는 기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때 당시, 죽음을 앞두고 있던 당신은 ‘어떤’ 존재를 만났고. 그와의 계약을 통해 최초의 게이트가 발생한, 7개월 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그래, 분명히 그랬었지.”
한 걸음, 주양태 회장이 앞으로 걸었다.
다니엘 블랙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검은 사슬들이 떠올랐다. 모두, 그가 돌발적으로 출수를 할 경우를 대비한 안전 장치였다.
“하지만 어째서 네놈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지.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라 하기엔 부족한 것 같군.”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나.”
“아니,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녀석의 입에서 어떤 대답을 듣는다 해도.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은 없다. 그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맞추어 매사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물론, 주현우가 회귀자라는 사실은 충분히 놀랍기는 했으나.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결국, 네놈 또한 그 존재와 직접 마주했던 것이 아니더냐.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밖엔 없겠지.”
“그래, 빤한 이야기지.”
녀석 또한···.
회귀자가 맞다면, 이야기는 구태여 들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주양태 회장은 잠시,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회귀자라.’
다니엘 블랙과 주양태 회장.
그리고 주현우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군.’
물론, 이제 와서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샤오 가문의 암살 시도, 그리고 천무그룹 내부의 배신자인 주형석까지.
만약 주현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이무기.’
덕춘이라고 했던가.
주양태 회장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가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이무기의 알 따위를 크노스 경매에서 낙찰 받고 싶어 했던 것도 다름 아닌 주현우였다.
외에도 데뷔전 당시부터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다시 생각해볼 지점들은 많았다.
‘과연···.’
지금까지 의아했던 주현우의 선택.
그리고 그간의 행보까지도 전부, 다니엘 블랙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해가 되는 일이라 볼 수 있었다.
“그랬던 건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사실.
그러나 주양태 회장은 아무런 동요가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동요하지 않는군.”
그는 실제로도 동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동요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내 손자가 회귀자라는 것.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바뀔 것은 전혀 없으니.”
“음, 확실히 그건 그렇지.”
“그러니 상관없다.”
회귀자로서.
주현우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행동은, 결국 천무그룹과 이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그를 책망할 만한 이유는 전혀 없었다.
“되려···.”
주양태 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해야 할까. 회귀라는 좋은 기회를 얻었음에도 현우 녀석은, 결국 그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칭찬을 해주고 싶군.”
그건···.
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들이 절대 아니었다. 주양태 회장을 비롯하여, 천무그룹의 아무도 대비하지 못했던 미래를 홀로 대비하고 있었을 뿐.
“칭찬이라?”
“그래, 미래를 알고 있는 시점에서 현우 저 녀석은 얼마든지 비겁해질 수 있었겠지. 하나 그런 선택보다는 이 주양태처럼 자신이 올바르다 생각하는 길을 걸었다.”
그러니.
기쁘고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깟 몇 마디 진실로 이 주양태를 흔들어 놓으려 했다면, 아쉽지만 실패하고 말았군.”
“그럴 생각은 없었다만···.”
오히려 이건 배려였다.
지금부터 다니엘 블랙, 그의 입에서 나올 정보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배려.
“당신을 동요시키기 위한 이야기는 이걸로 충분하다네.”
그리고 그 배려는, 결코 주양태 회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주양태 회장, 당신의 혈족들 말이야. 지금 어디로 사라진 건지. 이쪽의 내가 끝까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을 것 같은데.”
“···.”
그제야.
주양태 회장의 뺨이 움찔 떨렸다.
“그들은···.”
다니엘 블랙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역시 예상한 반응이 나와 주니. 그로서도 적지 않은 밑밥을 깔아둔 보람이 느껴지는 법이었다.
“운이 좋다면 아직 나와 광룡, 주현우가 떠나온 지난 회차의 세계. 그곳에 갇혀 표류하고 있을 거라네.”
안 그래도 복잡했던 사건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는 것이 제대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
의식에 번개가 내리친다.
온통 검은 화면에 갑자기 불이 들어오는 것처럼. 현우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에서 급부상했다.
“이런 씹···.”
의식을 되찾음과 동시에 현우는 욕설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주위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탑의 바깥으로 나온 건가.’
특별한 상처는 없었다.
놀랍게도 다니엘 블랙은, 현우를 어렵지 않게 제압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었던 것이다.
“타이밍이 좋군.”
다니엘 블랙.
언제 봐도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 안색이 어두워진 조부, 주양태 회장도 있었다.
‘분위기가···.’
묘한 것이 느껴졌다.
의식을 잃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동안 두 사람이 혈투를 벌일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현우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잠시 입을 다문 주양태 회장.
그의 시선은 현우가 아닌 다니엘 블랙을 향해 있었다. 거기서 현우는 묘한 분위기의 원인이 둘 사이에 오고간 ‘무언가’ 때문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조부님···.”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냉랭한 한 마디.
주양태 회장은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만일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 자리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입을 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보다는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저 녀석,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방금 폭발로 해치운 것이 아니더냐.”
“그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악연을 지금 당장 설명하기에는 매우 복잡했다. 그리고 말을 한다고 해도 믿어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곳에서 전부 이야기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 녀석이 적이라는 겁니다.”
“그런가.”
주양태 회장은 더는 묻지 않았다.
‘적’이라는 말 하나로 이 대치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으니.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주위에 퍼트린 축염강기의 영역을 넓혔다.
“적이라.”
위협적으로 흩날리는 불꽃 너머.
다니엘 블랙은 열기를 의식조차 하지 않는 낯빛으로 고개를 꺾었다.
“내가 굳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자네와 적이 되지 않기 위함인데. 그렇게 생각한다니 참으로 유감이군.”
차르륵─
검은 사슬들이 마치 파도처럼 그의 발아래 그림자에서 솟아올랐다. 그건 흡사, 하나의 군체가 된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
그 가운데···.
현우 역시, 자신의 의념을 불태워 신화를 피워내며 입을 열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냐.”
포섭을 하겠다느니.
적이 되고 싶지 않다느니.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여전히 이해가 어려웠다. 물론, 이해를 한다고 해서 적이 아니게 되진 않겠지만.
“간단하네.”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다니엘 블랙.
“이 세계의 합일(合一).”
명확한 표현은 아니었으나.
그 ‘합일’이라는 것의 대상이 무엇인지. 그것만큼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번’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
그건 오직, 현우와 다니엘 블랙 두 사람만 알고 있는 세계였으니.
기저에 깔린 본심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현우를 포섭하려는 녀석의 태도에 일말의 근거 정도는 되었다.
“합일이라면 설마, 두 세계를 합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바로 그걸세.”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뭐, 이걸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라고 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악한 계획을 가진 악당은 아니야.”
“그럼?”
“나 또한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하나의 변수일 뿐이지. 외신이라는 존재들의 말도 안 되는 유희에서 이 세계를 독립시키는 것이 나의 궁극적인 바람일세.”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현우는 대답 대신, 바닥에 침을 탁 하고 뱉어주었다.
“그리고.”
다니엘 블랙이 손을 들어올렸다.
아직 사슬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검지가 불쑥 치켜 올려졌다.
“그걸 위해서는 우선, 변수로 인한 이쪽 세계의 비틀림을 해소해야 하지. 만일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정보의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테니.”
“···비틀림?”
“그래, 비틀림 말일세.”
고개를 끄덕이는 다니엘 블랙.
녀석이 이야기한 비틀림이라는 것에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사실, 대단한 추론을 통해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주현우.
바로 그 자신이 만들어낸 커다란 변화들이 이번 세계의 ‘비틀림’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미래는 바뀌었다.’
대체 그 비틀림을 어떻게 해소하겠다는 건지. 녀석의 계획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는 순간.
“일단은 하나.”
녀석이 손을 뻗었다.
사슬이 의념의 뜻에 따라 치솟았고. 이쪽을 향해 불쑥, 마치 투창과 같은 기세로 빠르게 쏘아졌다.
촤르륵─!
반응을 하지 못할 속도는 아니었다. 현우는 바로 사슬을 쳐내기 위해 움직였고. 주양태 회장 역시, 아예 피하지 않고 붙잡아 당기려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상식’의 선에서 이루어진 대처는 녀석에게 통하지 않았다. 사슬은 그대로 현우의 몸을 지나쳤다.
‘뭐야 이거?’
관통과는 다르다.
절대 잡히거나 닿지 않는 환영처럼. 녀석의 사슬은 현우의 신체를 그대로 통과하여 지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
다니엘 블랙의 검은 사슬.
현우를 가볍게 통과한 사슬이. 분명히 주양태 회장의 가슴 한 가운데를 꿰뚫어 파고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