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유예(3)
상상도 못한 결과.
현우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여유롭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만약 눈에 보이는 것이 환각이 아니라면. 주양태 회장의 가슴을 꿰뚫은 사슬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도 없는 심각한 치명상을 남겼을 테니까.
“조부님!”
“크, 음···!”
그러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주양태 회장은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지진 않았다.
그건 평소 그가 쌓아온 무위의 덕분도 있으나. 대개는 이미 반쯤 마나와 동화된 신체의 덕이 컸다.
‘상처가 아니다.’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슬은 현우를 그대로 통과했던 것처럼. 주양태 회장에게도 물리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반쯤 마나와 동화되어 가고 있는 그의 신체를 관통하여 영혼에 상흔을 남겼을 뿐. 그리고 오히려 그 쪽이, 지금의 주양태 회장에게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이런 개···.”
현우의 입에서 욕설이 마저 튀어나오기도 전에, 다니엘 블랙은 뻗어낸 사슬을 도로 회수했다.
주양태 회장이 쓰러진다.
사슬이 뚫고 지나간 자리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만약 다니엘 블랙, 그가 원했다면 그런 물리적인 손상을 남기는 것도 가능했겠으나.
그게 지금의 주양태 회장에게는 의미 있는 타격이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사슬에 물리력은 일절 싣지 않았다.
방심했던 것은 아니다.
이건, 한 번 겪어보지 않고서는 미처 대비할 수 없는 일격이었으니.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
본래 주양태 회장의 상태는···.
비유하자만 넘치기 직전의 컵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포화 상태에서 표면 장력으로 아슬아슬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그의 균형이 깨어지면 일어날 일은 뻔했다.
신체와 영혼의 붕괴.
“뭘, 그리 놀라는가.”
비웃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녀석은 담담하게 현우를 책망, 혹은 훈육하는 것과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건 단지 비틀림을 바로잡는 행위에 불과하다네. 주양태 회장이라는 자의 생존이 얼마나 큰 비틀림인 건지는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주양태 회장의 생존이라는 비틀림은, 현우가 만들어낸 가장 의미 있는 결과 중에 하나였으니까.
“어차피 주양태 회장은 오래 전에 이미 죽었어야 했을 이야. 그리고 저 비정상적인 신체 역시, 운명을 거스른 대가의 일부가 아니던가.”
운명을 거스른 대가.
그런 쪽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리고 녀석이 그리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을 바꾸어 먹을 리도 없다.
“이···.”
으득, 어금니를 악문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뻗고 싶을 정도로 가슴 속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현우는 단순하게 감정에 휘둘려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렇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오직 감정에 맡긴 행동은, 여기서 더 악수를 두는 꼴이 될 뿐이다.
“···개새끼가.”
“흐흐, 내가 말하지 않았나.”
촤르륵─
다니엘 블랙의 그림자에서 솟아오른 검은 사슬들이 그의 발을 받쳤다. 서서히 그의 신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도망가는 거냐···!”
“그럴 리가.”
감정적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현우는 당연히 지금 녀석의 행동이 도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냉정하게 보면, 굳이 따지고들 필요도 없이 유리한 쪽이 누구인지는 분명했으니까.
“지금 이게 내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이자. 자네를 회유하기 위해 남기는 기회일세. 부디 자네가 나의 배려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배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현우는 주먹을 쥐었다.
의념이 타오르며 신화의 불꽃을 형성했고. 순백의 불꽃은 곧바로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의 형상을 취하며 다니엘 블랙을 덮쳤다.
“무용(無用)하다네.”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의지에 따라 발밑의 사슬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그 속도는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놓칠 만큼 쾌속했다.
“의념을 직접 발화시킨 불꽃. 매우 놀라운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게 미치기엔 여전히 부족하군.”
사슬이 솟아올라 반구 형태를 취한다.
거대한 신화의 용이 반구에 충돌했고. 극렬한 열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사슬과 접촉하는 것만으로 의념이 분열되어 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여파는 건재했다.
주위에 도열해 있던 거인들 몇몇이 흩어진 의념의 불꽃과 잔열에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증발했다.
“내가 자네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데. 분수에 맞지도 않는 행동은 그쯤 해두게나.”
“까고 있네.”
현우는 바로 지면을 박찼다.
만일 녀석이 현우가 피워낸 의념의 불꽃을 전혀 위협으로 느끼지 않았다면. 저렇게 사슬을 움직여 막아내야 할 이유도 없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
닿으면 위협적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어떻게든 녀석에게 닿으면 된다.
빠르게 피워낸 의념의 불꽃이 현우의 손을 휘감으며 순백의 신화로 화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일격.
파천신화(破天神火).
무(武)에서 비롯된 권능을 넘어선 의념의 극의. 휘감긴 신화의 불꽃이 거친 의념의 폭발이 되어 다니엘 블랙을 공간 채로 삼키려 들었다.
마치 맹수의 입질과 같은 기세.
그러나 녀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양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검은 사슬 무리가 파도가 되어 사방을 덮쳐드는 폭발과 마주했다.
─꽈아앙!
맞닿음과 동시에 공간이 요동쳤다. 현우는 즉시 뒤로 도약했다. 신화의 불꽃이 허공에 나부꼈다.
“시도는 매우 좋았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기세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네.”
여전히 녀석에겐 닿지 않았다.
현우가 만들어낸 최선이자 최고의 일격은 그렇게 순식간에 가로막혀 무위로 돌아갔다.
다니엘 블랙.
그는 인간이 저 수준에 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설령, 외신의 안배가 더해졌다고 해도. 주현우가 꺾일 기회는 그 안배 이상으로 많았으니.
이미 한 차례.
그 길을 걸어본 다니엘 블랙으로서는, 사뭇 새삼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반드시 주현우란 변수를 손에 넣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자네와 더 어울려주고 싶긴 하지만. 그게 우리 둘에게 있어 특별히 이득이 될 것 같진 않군.”
그렇기에···.
아직은 부수고 싶지 않다.
‘이 앞으로 겪을 절망과 좌절, 그것이 주현우 자네가 나의 제안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 테니.’
이미 미끼는 던져두었다.
그리고 주현우는, 그 미끼를 물 수 밖에 없으리라.
“이쯤 하도록 하지.”
다니엘 블랙의 시선이 주위의 거인들을 훑었다. 이 녀석들은 외신의 권속이지만, 이용할 가치가 있다.
“이쯤 하기는 뭘···.”
“자네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 같은가.”
녀석의 눈이 번뜩였다.
동시에 그의 의념이 이 공간, 황야 전체를 뒤덮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 기묘한 감각에 현우가 발을 멈추고 경계하는 순간이었다.
“···!”
기이한 광경이었다.
거인들이 가득 도열해 있는 황야가. 그대로 쭉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공간이 현우를 밀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부터 1년의 유예를 주겠네.”
자비를 베풀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차츰 멀어지는 다니엘 블랙, 녀석은 얇은 웃음을 지으며 현우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내 편에 서지 않겠다면···.”
녀석의 신형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 작은 목소리만큼은 불쾌하게도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했다.
“나를 토벌해보도록 하게나.”
***
격리 차원의 바깥.
미처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녀석의 의지에 따라 현우는 공간 밖으로 쫓겨났다.
이윽고 굴절된 공간이 눈앞에서 증발하듯 사라진다. 그렇게 녀석에게 돌아가는 유일한 입구가 없어졌다.
“···젠장.”
강하게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이토록 무력감을 느껴본 적은, 회귀 전에 다니엘 블랙에게 무력하게 서울을 내준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무력감을 선사한 존재는 똑같이 다니엘 블랙, 그 녀석뿐이었다.
“현우야.”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
그곳엔 힘겹게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주양태 회장이 있었다. 아직은 어떻게든 의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의 신체는 이미 정상적인 상태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말씀하지 마시고 우선 가만히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비공정을 사용해 최대한 빨리 본가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 상태는 내가 잘 안다. 이미 되돌리기엔 늦었다. 그 빌어먹을 녀석의 일격이 나를 제대로 흔들어놨어.”
“하지만···.”
“현우야.”
다시 부르는 목소리.
현우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아직, 의식이 이렇게 남아 있는 동안. 네게 해주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예.”
“나는···.”
주양태 회장이 힘겨운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회귀자다.”
“···.”
갑작스러운 고백.
현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 주양태 회장이 한 발 앞서 말했다.
“그리고 녀석에게 들었다. 너 또한 나와 같은 회귀자라는 사실을.”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 비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회귀자다.
그런 소리를 내뱉어 본들, 대부분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볼 것이 뻔할 테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회귀자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야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주양태 회장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어 확실하게 손에 넣을 이득이 없었을 테니까.
“네가 본래 알고 있던 미래에선, 내가 이미 오래전 죽었던 모양이던데. 그 말이 과연 사실이더냐.”
“···예.”
“역시, 그런가.”
씁쓸한 표정.
주양태 회장은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곧, 다시 눈을 뜬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주양태 회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네게 부탁해도 되겠느냐.”
“예, 말씀하시죠.”
“할아비로써 해준 것도 없는 내가 이리 염치없이 부탁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지만. 일전, 유럽 지부에서 실종된 혈족들을 네가 찾아주었으면 한다.”
“···혈족들을 말입니까?”
“그래.”
그거야 이미 대답이 정해져 있었다.
현우는 주양태 회장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확실한 정보는 없다.
다니엘 블랙, 그러니까 스위스 베른에 격리 차원을 구축하고 그들의 실종에 직접 관여한 이쪽 세계의 그 녀석이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시체를 확보했다면···.’
천무그룹의 적마녀.
오수진의 마법을 통해서 어느 정도 녀석의 기억을 뽑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진 네크로맨서. 그녀를 찾아 부탁해 보는 방법도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이미 녀석의 시체가 남아 있을 격리 차원은 미래의 다니엘 블랙. 그 녀석의 통제 하에 완전히 봉쇄가 되어 버렸다.
녀석이 약속했던 유예가 지켜진다면.
그 차원은 분명 지금으로부터 약 일 년 후에나 다시 열리게 될 텐데.
그때 가서 다니엘 블랙의 시체가 남아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빌어먹을 녀석이 그러더군.”
주양태 회장이 조용히 읊조렸다.
“운이 좋다면, 내 혈족들은 네가 떠나온 지난 회차의 세계. 그곳에 갇혀서 표류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
지난 회차의 세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현우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이 다니엘 블랙에게 패배했던 그 세계일 테니까.
정보가 없는 것 보다야 낫지만.
현우는 그것이 좋은 소식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리 생각하는 까닭이야 매우 간단했다.
‘이미 그쪽 세계는 다니엘 블랙으로 인해 초토화가 되었다. 방치된 게이트만 해도 이루 세기 어려울 정도일 텐데.’
한 마디로 아포칼립스.
그곳에서 평범한 헌터가 살아남는 것은 어불성설. 만일 천무그룹의 혈족이라 해도, 생존 가능성을 쉽게 점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현우는 잠시 고민 끝에 말문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시죠.”
“그래, 너를 믿고 맡기마.”
그제야 표정을 푸는 주양태 회장.
그의 몸이 한차례 휘청거렸고. 현우는 재빨리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평소와 다르게 그에겐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이윽고 그의 손이 현우의 어깨에 올라왔다. 매우 거칠고 투박한 손길, 그러나 그건 현우에겐 그 어느 때보다 따듯하게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누구보다도 이 주양태를 가장 많이 닮은 녀석이로구나···.”
그 말을 끝으로.
주양태 회장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의식을 놓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