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rk Magician Transmigrates After 66666 Years RAW novel - Chapter 507
15장 : 집 (2)
마당으로 가자 시어스가 여유롭게 차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를 만날 때처럼 옷매무새를 정리한 제이미는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잔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시어스가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
시어스는 다가오는 제이미를 발견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곤 찻잔을 거의 던지듯이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서 단숨에 제이미에게로 달려갔다.
“제이미!”
“우왓! 다, 다녀왔어요.”
인사하기도 전에 끌어안긴 제이미는 엄마의 등을 감싸며 다녀왔다고 인사했다.
시어스는 더 강하게 아들을 끌어안았다.
이제는 절대 어디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내 아들…… 내 아들이 돌아왔구나……!”
흐느끼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제이미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충 이런 반응을 예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더 격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게 엄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제이미는 시어스가 바라는 대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흐른 다음에야 조금 진정했는지 시어스가 우는 얼굴로 아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피부가 거칠어졌구나. 살이 좀 붙은 것도 같고.”
“건강하게 지냈어요.”
“응. 저번보다 남자다워졌어. 우리 아들, 아주 멋있어졌어.”
시어스는 그러곤 다시 제이미를 껴안았다.
약간 숨 막혔지만, 제이미는 작게 웃을 뿐이었다.
“엄마는 우리 아들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저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엄마는 매일 우리 제이미가 보고 싶어서 밤을 눈물로 지샜다고.”
“저도요.”
“거짓말쟁이. 신나게 돌아다녔을 거 다 알아!”
“들켰네요. 하하하하!”
삐진 시어스의 말투에 제이미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명랑한 아들의 모습에, 시어스는 어쩔 수 없다며 피식 웃었다.
둘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시녀가 제이미가 마실 차를 앞에 놔주었다.
“여행은 재밌었니?”
“네. 너무 즐거웠어요. 많은 걸 봤고, 또 많은 걸 배웠어요.”
제이미는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시어스에게 말해 주었다.
원래는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말할 생각이었는데, 시어스가 눈을 반짝이고 있어서 차마 다음으로 미룰 수가 없었다.
“려에도 갔다고? 엄마도 한 번도 못 가 봤는데. 이야기로만 듣던 곳을 우리 아들은 실제로 직접 가 봤구나!”
“정말 멋진 곳이었어요. 의복도, 건물 양식도 로엔 대륙의 어떤 종류와 달랐고, 음식도 겹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엄마도 어릴 적에 려에서 온 손님이 음식을 만들어 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
“안 그래도 조리법을 좀 받아 왔어요. 묵었던 곳의 숙수…… 그니까 셰프님이 이쪽에서 요리 공부를 한 적이 있대요. 그래서 방식으로 재해석한 려의 요리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 조리법이에요.”
“셰프가 좋아하겠는걸?”
“재료도 전부 이쪽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라 낯설지 않은 맛을 낼 수 있을 거예요.”
“응응. 오늘은 즐겁게 식사하겠네. 우리 제이미도 돌아왔으니.”
“헤헤.”
시어스의 칭찬에 제이미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다 뒤늦게 뭔가 허전한 느낌을 받아 주변을 살폈다.
“근데 누나는요? 엄마랑 차를 마시고 있다고 들었는데.”
“후후. 어쩐 일로 누나를 신경 써?”
“시, 신경 쓰다뇨. 그냥 안 보여서 그렇죠.”
“부끄러워하기는.”
제이미가 급하게 말을 더듬으며 변명하자, 시어스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제1수련장에 가 봐. 지금쯤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을 테니까.”
“아직 밥 먹기도 전인데.”
“아들이 떠나고부터 부쩍 더 열심히 하더라. 엄마가 심심할 지경이야.”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제이미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시어스가 물었다.
“누나한테 가게?”
“……왔다고 말은 해야죠.”
“착하네. 그래, 남매는 그래야지. 누나랑 같이 식당으로 오렴. 바로 저녁 먹게. 조리법은 엄마가 셰프한테 갖다 줄게.”
“그럼 부탁드려요.”
제이미는 고개를 숙인 후 누나가 있을 수련장으로 향했다.
* * *
“하압!!”
퍽! 퍽퍽! 퍽!!
빠각!
쾅!!
수련장 안에서 커다란 기합과 함께 연달아 타격음이 울려 퍼지더니, 최후엔 나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미는 그 소리를 들으며 표정을 찌푸렸다.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수련장 안쪽에서 상당한 기파가 바깥쪽까지 퍼져 나왔다.
안쪽을 힐끔 돌아보니 정중앙에 박혀 있던 커다란 통나무가 거칠게 박살 난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앞에는 붕대를 감은 주먹을 내지른 채 가만히 서 있는 사라가 있었다.
“들어와.”
그녀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제이미는 약간 움찔했지만, 놀라지 않은 척 안으로 들어갔다.
“왜 여기서 통나무를 부수고 있는 거야?”
“언제 온 거야?”
사라는 주먹을 거두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팔로 닦아 냈다.
1년 만에 보는 누나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가 반 뼘은 더 커진 상태였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더니, 14살이 되니 160cm를 훌쩍 넘은 듯했다.
“온 지 얼마 안 됐어. 그보다 검은 어디 가고 맨손으로 주먹질이야?”
“수련의 일환.”
너덜너덜하게 해진 붕대에는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사라는 주먹에서 굳은 피를 대충 털어 냈다.
“검을 다루기 위해선 육체부터 단단해져야 해. 오러를 쓰지 않아도 강해져야 하는 거야.”
그 말을 하는 사라의 눈은 상당히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확실히 1년 전과는 달랐다.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였다.
“이거 받아.”
사라가 목검 한 자루를 제이미에게 던졌다.
“검, 다시 잡았지?”
“그걸 어떻게.”
“보면 알아. 오랜만에 대련 한판 해야지? 누나가 오러는 안 써 줄게.”
“얼씨구.”
제이미는 약간 자존심 상한 얼굴로 겉옷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자신만만하네?”
“후후. 얼마나 컸는지 한번 봐줄게, 이 누나가.”
성격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제이미는 목검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R에게 배웠던 것들, 아발론에서 배웠던 것들, 려에서 배웠던 것들.
이 세상을 떠돌며 배웠던 것들이 여전히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열 합을 양보할게.”
“사양하지 않지!”
제이미가 먼저 땅을 박찼다.
처음엔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사라는 어렵지 않게 막았고, 제이미는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위에서 다시 내려쳤다.
딱!!
“이 합.”
사라가 숫자를 세우자 제이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품으로 파고들었다.
목검에서 뇌기가 튀어올랐다.
“마법을 쓰지 말라는 조항은 없었잖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
사라의 눈앞에 안개가 퍼졌다.
순간 시야가 가려졌고, 뇌기 때문에 검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사라는 오감에 기대야 하는 경지가 아니었다.
안개 속에서 번개를 튀며 날아오는 검을 막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아홉 번의 공격과 방어가 이어졌다.
사라가 허락한 방어는 이제 한 번 남았다.
제이미의 눈에서 빛이 튀었다.
“나는.”
한기가 휘몰아쳤다.
사라는 발이 얼어붙은 걸 깨달았다.
‘발목이 잡혔어.’
발이 얼어붙어도 금방 떼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은 충분히 치명적이었다.
제이미가 노린 것은 그것이었다.
“마검사야!”
수많은 속성의 마나가 목검을 휘감았다.
그대로, 어깨를 내려칠 작정으로 일직선으로 내리긋는다.
사라의 입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목검에서 빛이 터져 나왔고, 주변을 감싼 안개와 뇌기, 발을 묶은 얼음이 모조리 흩어졌다.
제이미는 어마어마한 압력을 느꼈고, 빛에 휘감긴 사라의 목검을 발견했다.
두 자루의 목검이 충돌했다.
“크윽……!”
목검이 박살 난다.
제이미와 사라가 서로 스쳐 지나며 등을 맞대고 섰다.
사라가 목검의 빛을 회수하면서 말했다.
“오러를 써 버렸네. 내가 졌어.”
처음으로 사라가 패배 선언을 했다.
하지만, 제이미는 순수하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방금 보았던 그것.
여행을 하면서 실제로 본 적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잖아.”
오러의 극에 달했을 때 발현되는 강력한 빛.
소드 마스터의 상징.
제이미가 못 믿겠다는 눈으로 사라를 쳐다봤다.
“진짜로?”
“아직은 반쪽짜리야.”
사라는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목검을 내려다봤다.
목검으로는 오러 블레이드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완벽한 깨달음의 단계에는 오르지 못했어. 그래도 이건 쓸 수 있더라.”
“미친…….”
할 말이 안 나왔다.
어이없을 정도의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열등감을 느껴서 검을 내려놨었다.
한데 상상한 것보다 더한 재능이었다니.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가족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재능이었다는 말이다.
사라가 충격에 빠진 제이미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검을 내려놓고 싶니?”
다시금 사라가 넘을 수 없는 벽이란 걸 확인했다.
분명, 이 재능은 마음을 꺾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흥. 어떻게 다시 잡은 검인데 이렇게 쉽게 내려놔?”
“호오?”
“흥. 예전의 내가 아니야. 그리고.”
제이미의 몸에서 거센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검을 파고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고, 이제는 뭘 해야 할지 여행하면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물론, 살아가면서 그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지금만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나만의 길을 갈 거야. 내 방식으로 뛰어넘어 주지.”
“후후.”
사라가 흡족하게 웃더니 제이미에게 말했다.
“뭔가 닮았어.”
“……내가 누굴 닮아?”
“지난 1년 동안 꿈을 꿨거든. 그 꿈에서는 네가 내 오빠였어.”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데없이 꿈 얘기라니.
너무 뜬금없어서 제이미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사라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꿈에서 나는 검도 익히지 않았고, 부모님과 오빠인 네게 응석만 부리는 응석꾸러기였지.”
“응석꾸러기인 누나라…… 상상이 안 가네.”
“나도 상상이 안 가. 그런데 되게 자연스러웠어. 오빠였던 너는 우는 나를 늘 달래 줬고, 항상 놀아 주고, 책을 읽어 줬지. 무엇보다.”
그녀는 꿈을 되새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하려는 걸 절대 꺾지 않았어. 무엇을 하든 꼭 이루겠다는 목표로 움직였지. 응.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얘기를 듣고 있으니 사라가 말하는 꿈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전생의 내 얘기야.’
꿈이란 건 선명하지 않을뿐더러 선명한 꿈도 보통 단발성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사라는 이 꿈을 한두 번 꾼 것 같지 않았다.
바로 자신처럼 말이다.
“꿈속에선 참 다양한 일들을 겪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가문은 와해됐고, 오빠인 너는 타락했어. 나는 엄마를 위해 뒤늦게 검을 잡았지. 그리고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됐을 때……”
사라의 눈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나는 잠에서 깼어.”
“……”
“그것뿐이야. 왠지 네가 돌아오면 이 꿈 이야기를 해 주고 싶더라.”
그러곤 자리를 떠났다.
다소 맥락이 없는 말을 순식간에 내뱉은 것이었지만, 제이미는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느껴지는 무언가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누군가 미소 짓고 있었다.
“잠깐.”
제이미가 손을 뻗었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는 듯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손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우리 가족, 잘 지낼게요. 꼭.”
-고맙다.
그런 목소리가 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에필로그 : 가족사진
어제저녁.
웰턴 가문을 책임지는 총괄 셰프는 려에서 건너온 조리법을 받곤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하겠다며 상다리가 휠 정도로 많은 요리를 만들었다.
덕분에 제이미는 가족들과 함께 배가 터지도록 맛있는 식사를 했고, 가문의 식솔들도 제이미 복귀 기념으로 푸짐한 파티를 즐겼다.
가족들과 오랜만에 밤늦게까지 놀았다.
제이미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아직도 소화가 안 된 것 같네.”
자기 전까지 그렇게 먹었으니, 얹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제이미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편안한 잠자리였다.
여행하는 동안 좋은 숙소에서 묵은 적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훨씬 많았다.
또 좋은 숙소라곤 해도 집이 아닌 터라 영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1년 넘게 여행하니까 그런 것에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집이 최고네.’
오히려 방 침대가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 자체가 무색했다.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난 제이미는 시종을 불러서 가볍게 세안부터 했다.
그다음 옷차림을 말끔하게 하고 거울 앞에 섰다.
간편한 옷만 입다가 귀족답게 차려입으니 살짝 불편했다.
그래도 빠르게 익숙해지긴 할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니까 뭐 바뀐 게 없는지, 저택을 한 바퀴 둘러볼 생각이었다.
‘크게 변한 건 없겠지만.’
“혼자 돌아다닐 테니까 따라오지 마.”
제이미는 따라오려는 시종을 보내고 혼자 저택을 돌아다녔다.
마당 청소와 식사 준비를 위해, 하인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과거엔 늘 보던 광경이었지만 1년 만에 보니까 신기한 기분이었다.
여행할 때는 저런 일을 모두 혼자 처리했으니까.
새삼 저들의 존재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다들 고생이 많아요. 고마워요.”
지나가던 제이미가 하인들한테 그리 말하자, 갑작스러운 치하에 하인들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감사합니다!”
“웰턴 백작님 덕분에 저희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웰턴 가문에서 일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들은 오히려 제이미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기에 제이미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인사받자고 말한 건 아니에요.”
이러다간 주변에 있던 모든 식솔이 몰려올 것 같아서 후다닥 자리를 떴다.
지친 건 아니었지만, 제이미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다행히 도망쳐 온 곳 주변엔 다른 사람이 없는 듯했다.
가볍게 한숨을 쉰 제이미는 다시 산책하듯 주변을 걸어 다녔다.
웰턴 저택의 부지는 상당히 넓은 편이라 다 돌아보기 위해선 1시간 정도는 잡아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흠. 여긴 조금 바뀌었네. 꽃을 바꿨구나.”
“오. 건물을 새로 지었잖아?”
“가문 병사들을 늘리셨다더니 막사도 설치됐고.”
“1년 사이에 이것저것 많이 바뀌었네.”
원래도 이런저런 공사가 많이 진행되는 편이었지만, 여행을 가기 전까지는 당연하기만 했기에 바뀐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제이미가 한창 바뀐 것들을 구경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저 멀리서 하녀 하나가 굉장히 불안정한 걸음으로 짐을 들고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눈까지 가릴 정도로 높은 상자 더미였는데,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게 보였다.
‘분홍색?’
하인 중에 분홍색 머리를 한 사람이 있었나?
기억력이 무척 뛰어난 제이미는 모든 시종들의 얼굴을 기억했다.
하지만 개중엔 분홍색처럼 특이한 머리를 한 사람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새로 들어온 하녀라는 건데…….
‘왜 이렇게 익숙한 것 같지?’
이런 느낌을 여행하면서 여러 번 느꼈고,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알게 됐다.
제이미는 성큼성큼 하녀에게 다가갔다.
“끄응…….”
하녀가 힘에 부치는지 앓는 소리를 냈다.
제이미는 고개만 슬쩍 내밀어 하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에에엣!”
갑작스러운 제이미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하녀 베나가 모든 상자를 놓치고 말았다.
“안 돼!”
안에는 중요한 물건이 들었는지 베나가 상자들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그대로 상자들이 바닥에 떨어진다.
베나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귀를 막았다.
“…….”
하지만,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베나가 슬쩍 눈을 떴다.
“어……?”
상자들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옆을 돌아보자 제이미가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손가락만 들어 마법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가 말했다.
“왜 여기에 있냐니까?”
* * *
“그래서. 이곳에 취직하게 됐다고?”
“……네.”
베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곤 손을 모은 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러고 있어요?”
“마, 말 편하게 하세요, 제이미 도련님.”
“음…….”
이 사람에게 도련님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베나가 웰턴 가문의 하녀가 된 이유는 전적으로 제이미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소개장을 써 준 건 제이미였고, 베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하이스로 건너왔다.
처음엔 하이스에서 일자리를 구할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가문의 안주인 시어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어스는 베나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가문의 하인으로 들였고, 동생들은 현재 웰턴 가문에서 후원하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
원래는 베나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줄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아카데미는 왜 안 다니고?”
“동생들까지 다 챙겨 주시는데 받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는 학업이 뭔지도 잘 모르고,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돈 벌어서 동생들이랑 먹고 싶은 거 먹고, 따뜻하게 잘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요.”
“그래도 무척 좋은 기회였을 텐데.”
“후회하지 않아요. 동생들이 저 대신 배우는 거잖아요.”
그리 말하는 베나는 정말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제이미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전생과 깊게 관련된 인연이 자신의 집안에서 일하게 됐다.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제이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얘기했다.
“당신은 오늘부터 제 전속 시종으로 활동하게 될 거예요.”
“……네?”
“내가 데려온 거나 다름없으니 그게 맞아. 아무튼,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하던 거 하고. 말은…… 편하게 할게.”
제이미는 그리 말하곤 쿨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베나의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고맙습니다!”
긴 머리카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게, 90도로 허리를 숙였음이 안 봐도 뻔했다.
* * *
돌아온 지 한 달 정도가 흘렀다.
이제 집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평소처럼 아침 운동하고, 가족들과 식사하고, 점심 대충 때웠다.
낮에는 베나의 공부를 가르쳤다.
마법엔 재능이 아예 없어서 마법은 가르치지 못했고, 기본적인 상식을 비롯한 귀족에 관한 예법 등을 교육했다.
앞으로 제이미를 보필해야 할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뭐, 교육은 대체로 내가 하진 않겠지만.’
이미 교육자를 따로 붙여서 1:1 과외를 시작했다.
살면서 공부란 걸 해 본 적이 없기에 힘들겠지만, 나름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힘들게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지금 같은 생활은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할 것이다.
“도련님. 백작님이 부르십니다.”
제이미가 혼자 독서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집사 하나가 찾아와 백작의 부름을 알렸다.
무슨 일이지 싶어 한달음에 달려가니, 백작이 조금 안 좋은 표정으로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었다.
비단결처럼 긴 금발이 인상적인 미남자였는데, 상상 이상으로 잘생겨서 꽤 거부감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가 반가운 얼굴로 제이미를 알아봤다.
“오, 이분이 공자님이시군요.”
“이분은 누구세요?”
제이미가 백작에게 묻자 백작이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직접 소개하시죠.”
“이거야 원. 얼굴이 뚫릴 것 같습니다.”
백작의 날카로운 시선에 남자가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머쓱해했다.
남자가 제이미에게 자신을 직접 소개했다.
“저는 마법계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 지크프리트라고 합니다.”
“공간의 지크프리트?!”
들어본 이름이라 제이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노예에서 마법계의 장로까지.
로엔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인생 역전을 성공시킨 희대의 천재 마법사.
공간의 지크프리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외형에 관한 얘기까진 들어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나 잘생긴 사람이었을 줄은 몰랐다.
“마법계의 장로가 왜……?”
제이미가 의문 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널 영입하고 싶다는구나.”
“마법계는 이미 공자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있었고, 셀담 왕국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되어 이렇게 직접 영입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지크프리트의 부가 설명에 제이미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무리 애늙은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마법계라니.
그곳은 셀담 왕국 마법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마법 도시였다.
그곳에 가면 재능 없는 마법사라도 마법적 경지가 최소 한 단계는 오른다는 얘기마저 있었다.
하물며 제이미 같은 천재 마법사라면.
지크프리트가 다시 말했다.
“저희는 공자에게 최고로 대우할 것은 보장할 것이며,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연구실과 지원비를 아끼지 않을 겁니다. 또한 모든 편의를 봐줄 것을 약속하고, 어떤 논문이든 최우선 순위로 검토할 것이며, 마법계가 납득 가능한 연구 결과를 3번 이상 낸다면 장로직으로도 추대할 생각입니다.”
“…….”
“이는 마법계 역사상 전무할 정도의 최고의 대우입니다.”
“제 어떤 걸 보고 그런 제안을 하는 겁니까?”
“압도적인 재능.”
고작 1년 사이에 5클래스라는 전무후무한 경지에 오른 악마적 재능.
“수락하지 않더라도 마법계는 공자를 지원할 겁니다만, 마법계에서 직접 지원받는 것과는 불편함이 제법 있을 겁니다.”
지크프리트의 단호함에 제이미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백작은 여전히 심기 불편한 얼굴을 했지만, 제안이 제안인지라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일단 생각을 정리한 제이미가 지크프리트에게 말했다.
“아버지랑 얘기 좀 할게요.”
“부디 좋은 선택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지크프리트가 백작의 집무실을 나갔고, 제이미와 백작 둘만 남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무슨 얘기를 꺼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너무 엄청난 제안이라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할 시간도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백작이었다.
“마법계는 정치적 분쟁이 꽤 심한 곳이다. 왕정파, 귀족파, 평민파. 이 세 구도로 나뉘어 꽤 살벌하게 정쟁(政爭)이 벌어진다고 하더구나.”
웰턴 백작은 아들이 그런 곳에 가서 정쟁에 휘말리길 바라지 않았다.
좋든 싫든 제이미의 재능은 확실했고, 마법계 장로들은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절하기엔 마법계에서 네게 너무 굉장한 것들을 제안하는구나.”
어느 부모라도 자식에게 이런 제안이 오면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니 선택을 온전히 자식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제이미가 좋다고 하면 보내고, 싫다고 하면 안 보낼 생각이었다.
“전.”
제이미는 고민이 깊었다.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제안은 달콤했지만, 백작의 모습을 보니 부정적인 감정도 생겼기 때문이다.
“조금 생각해 볼게요. 당장 결정하기가 어려워요.”
“그러거라.”
백작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다시 불렀고, 제이미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이틀만 더 기다리겠습니다. 저도 바쁜 몸인지라.”
마법계의 장로에게 이틀이란 시간은 아주 귀중했다.
물론, 지크프리트는 조금 논외의 마법사였지만, 마법계의 장로가 너무 굽히고 가는 것도 이상했다.
답변 기간이 유예되자 제이미는 곧장 저택을 벗어나 패트리로 향했다.
R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고 싶었다.
R이라면 평소처럼 훌륭한 조언을 해 주리라.
“도련님이 어쩐 일로?”
“아저씨는?”
제이미는 아자드를 발견하자마자 R의 위치를 물었다.
아자드가 고개를 저었다.
“돌아오시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언제 오셨습니까?”
“좀 됐어. 아저씨 안 계셔?”
“네. 오셨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분명 같이 하이스로 돌아왔는데 R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제이미는 의아함을 느끼며 아자드에게 허락을 구했다.
사실 허락이랄 것도 아니었다.
“올라가 봐도 되지?”
웰턴의 소공자는 말보다 몸을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아자드는 벌써 저만큼 올라간 제이미를 보며 중얼거렸다.
“멋대로 갈 거면서 왜 물어본 거야?”
그리 말하곤 신경 껐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 *
“아저씨!”
맨 위층으로 올라온 제이미는 늘 R이 있던 방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아자드의 말처럼 안은 텅 빈 채였다.
늘 청소는 하는지 깔끔했는데, 최근에 사람이 돌아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설마 날 놔두고 혼자 여행 간 건 아니겠지?”
제이미가 구시렁거리며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침대 옆 작은 원탁에 접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최근에 접힌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집어 들고 조심히 펼쳐 보았다.
[네가 이끌리는 삶을 살아라. 더는 조언해 줄 수 없지만, 너는 정답을 알고 있을 거다. 어디서든 널 보고 있으마.]“아저씨!”
제이미는 편지를 내려놓고 창문으로 달려갔다.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창문이 조금 헐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저씨…….”
그는 떠났다.
어디로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더는 볼 수 없다는 얘기였다.
하이스에 막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R이 보여 주었던 태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곳에서 완전히 헤어질 작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약간의 허망함이 몰려왔다.
뒷걸음질 쳐 침대에 걸터앉은 다음 다시 쪽지를 보았다.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제이미는 울지 않았다.
쪽지를 고이 접고 주머니에 넣었다.
“지켜보세요. 당신의 제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선택을 끝마친 제이미가 저택으로 복귀했다.
마법계행이 결정되었다.
* * *
“이렇게 하루아침에 결정하는 게 어딨니!”
시어스는 이른 아침부터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불어 있었다.
제이미는 그런 엄마를 열심히 달래 주는 중이었다.
“죄송해요. 그래도 좋은 제안이잖아요.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그치만 고작 한 달 만에…… 흐이잉.”
“죄송해요. 편지도 자주 하고, 또 자주 놀러 올게요. 마법계는 워프 기능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예요.”
“진정해요, 당신. 아들을 위해서잖소.”
“당신은 몰라요!”
“음…….”
빼액 소리치는 시어스의 모습에 백작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미가 뒤에서 작게 한숨 쉬고 있자, 사라가 옆으로 다가왔다.
“아주 집 떠나는 게 버릇이 됐네.”
“다음에 돌아올 땐 긴장하는 게 좋을걸?”
“그거 참 무섭네요~”
사라가 놀리듯이 혀를 빼꼼 내밀었다.
언젠가 저 혓바닥을 손으로 꽉 붙잡고 잡아당겨 주리라.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때, 사진사가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제이미와 가족들을 불렀다.
사진기.
마법 공학의 산물로 공간 자체를 이미지로 찍어 내는, 최근에 발명된 아티팩트였다.
예전에는 그림으로만 남겨야 했는데 사진기 덕분에 초상화가 조금 무색해졌다.
“이제 사진 찍어야 하는데 눈이 부으면 안 되죠. 제가 떠나기 전에 찍는 가족사진이잖아요.”
제이미가 마법을 쓰자 퉁퉁 부었던 시어스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어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리 오렴.”
아들을 꼭 끌어안는 엄마.
제이미는 그 품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조심히 다녀와야 해.”
“당연하죠.”
“어서 찍으러 가자고, 다들.”
백작이 가족들을 이끌고 자리를 잡았다.
사라는 장식용 검을 고쳐 매곤 왼편에 섰고, 시어스가 중앙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오른편엔 제이미가, 뒤쪽엔 웰턴 백작이 섰다.
사진사가 사진기 위로 손가락으로 올리며 말했다.
“찍습니다! 활짝 웃어 주세요!”
손가락이 카운트다운 되듯이 하나씩 떨어졌고, 남은 하나가 마저 떨어졌을 때.
“치즈~”
모두가 활짝 웃었다.
그야말로 화목한 한 가정의 가족사진이 찍혔다.
(삽화)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