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rk Magician Transmigrates After 66666 Years RAW novel - Chapter 506
14장 : 여행의 끝 (2)
그날 저녁.
제이미는 식사를 마치고 밤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낮에 R이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주도하라고?”
애어른이긴 하지만 실제론 어린애일 뿐인 제이미는 그 말이 뭘 뜻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때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지만, R은 평소처럼 웃어넘길 뿐이었다.
R이 영문 모를 말을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이미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그나저나 밤인데도 되게 밝네.”
숲 전체에 퍼져 있는 빛의 구체들이 어둠을 밝혀 주었는데, 대낮처럼 밝은 건 아니어도 은은한 느낌을 주어 마음이 편해졌다.
제이미는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세계수는 존재만으로 활력을 더해 주어서 그런지, 슬슬 잘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정신이 말똥했다.
“밤이 길구나.”
“잠이 안 오나 보구나?”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자, 여와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제이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너는 예의가 바르구나?”
너는 예의가 바르다?
말 속에 약간의 가시가 느껴져서 고개를 갸웃하자 여와가 피식 웃었다.
“전생의 너는 제법 싸가지가 없었거든.”
“아…… 네에.”
사실 지금도 싸가지 있는 편이 아니에요.
어른한테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 없어서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여와는 미소를 지으며 옆쪽 바위에 앉았다.
제이미도 그녀를 따라 다시 앉았다.
“여행은 재밌니?”
“네, 즐거워요. 불편한 것도 많지만, 늘 새로운 걸 접하는 게 재밌어요.”
“내 동생이 힘들게 하는 건 없고?”
“저 때문에 아저씨가 고생하셨죠.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제이미는 따로 여와를 부를 만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았다.
“호칭이 뭐가 중요하겠니?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
“네, 아주머니. 아저씨랑은 친남매신 거죠?”
“그렇단다. 나와 황이, 신농, 복희. 이렇게 넷이 같은 핏줄이지. 장남은 복희고, 나와 신농, 황이. 이렇게 순서란다.”
“황이?”
“라의 본명이다. 이름도 제대로 몰랐구나?”
“애초에 라라는 이름도 팔괘궁에서 처음 알았어요.”
팔괘궁에서 전생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라에 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딱히 캐묻지도 않았고, 본인도 별로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여와가 옛날 생각나는지 여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게 제이미의 전생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태허궁에 들렀다면 너의 전생을 어느 정도 다 알았겠지?”
“네. 디아블로 볼피르란 남자였다는 것과 그가 현 인류의 초석을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지. 녀석은 자기에 대한 욕심 같은 건 없었어. 오직 인류만을 생각했지. 그때 인류는 이제 막 원시를 벗어난 참이었는데 말이야.”
신들이 보기에도 제대로 된 문명이 없던 인간들.
인간만이 아니다.
그 시절에 블레스에 살던 모든 생명체는 원시를 살아가고 있었다.
디아블로는 그들 전부를 인류로 묶어서 이끌어가는 리더였다.
야만을 버리게 하고, 기초적인 문명의 기틀을 잡아 주었다.
기술을 전수하고, 체계를 잡았다.
법의 중요성과 도덕성을 강조했으며, 각 종족의 리더를 선출했다.
신들에게 도움을 요구했고, 마지못해 그를 도와 블레스의 모든 종족이 기틀을 잡는 데 일조하게 됐다.
“나도 반강제로 그를 도왔지. 내가 한 일은 번식과 번영을 확장하는 것이었단다.”
지금은 잊혔지만, 한때 그녀는 인류를 직접 빚어 만든 창조신으로 모셔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번식과 번영을 도맡았기 때문에 생긴 위명이었다.
“신농은 인류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지. 복희는 최초로 팔괘를 긋고, 인류에게 목축을 가르쳤다. 오시리스는 천공의 진리에 뜻을 품어 영혼의 순환을 담당했고, 오딘은 투쟁을 알려 주었다. 제우스는 통치를. 그 밖에도 수많은 신이 디아블로의 뜻에 따라 가장 잘하는 것을 도맡아 인류의 번성을 도왔지.”
들어 본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이름도 잔뜩 나왔다.
그녀의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제이미가 확실하게 이해한 것도 있었다.
이 세상은 수많은 도움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
그 모든 시작점에는 디아블로 볼피르라는 사내가 존재했다.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그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제법 재밌었어. 수많은 세대를 거쳐 갈수록 우리가 잡아 준 틀을 자신들의 힘으로 완성하더구나. 최초의 시절, 나는 그들에게 어떤 기대도 없었지만, 점점 바뀌는 그들의 모습이 내 생각을 완전히 부정하더군.”
여와는 완전히 과거에 잠긴 듯 그 시절을 음미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은 길어 봐야 50년. 지금이야 더 오래 산다지만, 그때는 50년을 살면 오래 살았단다. 우리의 관점에서 50년은 찰나. 생명은 순간이며, 허망한 것에 불과했었지. 하지만, 고작해야 그 짧은 순간을 모조리 불태우더구나. 나는 충격이었다. 안위를 챙기는 것도 모자랄 그 시간을 오직 자신들의 번성과 번영을 위해 불사를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즐거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몇 년이 흐르고 돌아봤을 때 진화한 자신들의 모습에 감복했을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그런 건 아니었지. 갈등을 유발하거나, 모든 것에 불복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 또한 인류가 성장하는 발판이었고, 원동력이었다.”
버릴 것이 없었다.
갈등은 성숙하게 만들고, 부정은 새로운 긍정을 낳았다.
“너의 말처럼 디아블로와 우리는 인류의 초석만 다졌다. 그래. 겨우 초석만 다졌을 뿐이야.”
“초석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문명을 세우기까지 얼마나 걸렸을지 몰라요.”
“그렇겠지. 하지만, 불가능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구나.”
블레스의 모든 종족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열정은 불붙는 시기가 언제가 되냐의 차이일 뿐이다.
여와가 제이미를 쳐다봤다.
“그게 네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이지.”
“……저는 디아블로가 아니에요.”
“그래. 너와 디아블로는 달라. 하지만 같은 영혼을 공유하고 있으니, 또한 디아블로이기도 해.”
“복잡하네요.”
“하여튼. 네가 전생을 몰랐다면 얘기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너는 산증인과도 같단다.”
“산증인이요?”
“세상을 누리렴. 디아블로가 만들어 낸 이 따뜻한 세상에서 그가 바랐던 것처럼, 네가 바라는 모든 걸 즐기거라.”
제이미는 나무 사이로 빼곡히 박힌 별하늘을 보았다.
생각이 많아진다.
여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끔 내가 잘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면, 어쩌면 그게 옳게 살아가는 걸지도 모르는 거다. 지금처럼 말이지.”
그러곤 자리를 떠났다.
“젠장. 왜 갑자기 어려운 말을 잔뜩 하고 가시는 거야?”
덕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디아블로가 바랐던 삶.
팔괘궁에서 마주한 디아블로 볼피르.
그에게 자신의 삶이 부족하더라도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와의 말을 들으니, 어쩌면 그가 바랐던 삶과 지금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디아블로 볼피르다.
그리고 자신은, 막무가내처럼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망나니였다.
늘 스스로를 억제하고 인류의 발전과 번영만을 위해 달려온 그라면, 이런 삶을 갈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졸려.”
많은 얘기를 들었더니 급격히 피곤해졌다.
제이미는 밤하늘을 구경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 * *
“진짜 풀밖에 없는 건 너무 힘든데요?”
제이미는 아침으로 나온 엘프식 샐러드를 깨작이며 R에게 말했다.
“말했잖나. 먹는 게 제법 고될 거라고.”
“어제도 풀, 오늘도 풀.”
“내일도 풀이겠지.”
“사람은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채워야 해요. 탄단지 알죠?”
“아쉽게도 엘프의 세포 구성은 인간과 달라서 탄단지를 다 채울 필요는 없다.”
“신기하네. 채소만 먹으면 영양소가 부족할 텐데.”
“불평 그만하고 먹어라. 아니면 따로 사냥해서 먹든지.”
“아저씨는 조오~켔네요. 이렇게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제이미는 투덜거리며 억지로 풀을 입에 집어넣었다.
어제도 풀만 먹어서 그냥 굶기엔 너무 허기지기 때문이었다.
“채소만 먹기 힘들죠?”
그때, 히얀이 뭔가를 챙겨서 다가왔다.
그것은 잘 말려진 육포였다.
설마 육포를 보게 될 줄 몰랐기에, 제이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예전에 말려 두었던 육포예요. 만든 건 꽤 오래됐지만, 마법으로 잘 보관해서 신선도는 문제없을 테니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제이미는 육포를 받으며 R의 눈치를 살폈다.
R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엘프는 죽은 짐승의 사체는 굳이 버리지 않는다고 했었지? 그 육포도 그런 거다. 먹어도 괜찮아.”
허락이 떨어지자 제이미가 육포를 물어뜯었다.
제대로 간도 안 되어 있고, 맛있지도 않은 육포였지만, 풀만 먹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히얀이 잘 먹는 제이미를 보며 웃었다.
“인간 아이는 잘 먹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특히 고기를 많이 먹어야 잘 큰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제이미는 육포를 우물우물 씹으며 들뜬 목소리로 인사했다.
“좋네요. 그나저나, 언제쯤 떠나실 예정이세요?”
히얀이 고개를 끄덕이곤 R에게 물었다.
R은 남은 샐러드를 마저 먹어치우곤 대답했다.
“아마 오늘 중으로.”
“빠르게 떠나시네요.”
“이 녀석이 힘들어하거든.”
“제, 제가 뭘요?”
R이 이르듯이 제이미를 가리키며 말하자, 제이미가 발작하며 변명했다.
“아, 아니에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이렇게 맛있는 육포도 있는걸요?”
그 모습에 히얀이 작게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R이 계속 말을 이었다.
“슬슬 돌아가야지. 사람들을 따로 부르진 마라. 조용히 떠날 생각이니까.”
“그대로시네요.”
“이만큼 살아왔는데 성격이 변하면 그것대로 이상한 일 아니겠나? 아무튼, 식사를 마치는 대로 떠나마.”
“여와 님은 안 뵙고 가시려고요?”
“어제 할 얘기는 다 마쳤어. 별로 서운해하지 않으실 거야.”
히얀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시겠다는 걸 막을 수는 없으니. 알겠어요.”
“늘 배려해 줘서 고맙다.”
“……앞으로는.”
그녀가 R에게 뭔가를 말하려다가 옆에 있던 제이미를 보곤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R은 히얀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예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힘들겠지. 네겐 신세를 꽤 졌다. 고생이 많았어.”
“고생은요. 덕분에 저희 하이 엘프가 여기까지 온 거죠. 감사합니다.”
“음. 할 일이 많잖나. 그만 볼일을 보러 가거라.”
히얀이 R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곤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제이미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를 느끼곤 입을 다물고 있다가, 히얀이 떠나자마자 R에게 물었다.
“방금 뭐예요? 히얀 님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던데. 뭐,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요?”
“어린놈이 못 하는 말이 없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다. 그보다, 다 먹었으면 짐을 싸라. 이제 돌아갈 시간이니까.”
“으음.”
여행의 끝이 다가온다.
더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슬슬 하이스로 돌아가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여행은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으니까요. 짐 챙겨서 나올게요.”
“그래.”
숙소로 들어가는 제이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R은 턱을 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