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8
18화 장인(1)
“······선물이라고?”
주영미는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멍하니 현우와 눈을 마주쳤다.
“고모님께 드리는 건 아니고. 지금 건우에게 필요한 물건인 것 같아서요. 청금단과 마찬가지로 황옥고는 돈을 주고 구하기도 어려운 물건이잖아요.”
“하지만 이건······.”
어찌 보면 청금단 보다 귀한 물건이다.
샤오 가문의 비전 영약이라 불리는 것 중. 청금단은 아주 비싼 가격이지만, 천무그룹 정도의 재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황옥고는 달랐다.
샤오 가문에서 외부인에게 유출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는 것은 물론. 아무리 많은 금액을 준다고 해도 판매하는 일이 없는 영약.
애초에 마나를 보강하는 효능을 가진 영약은, 그 가치부터가 다른 영약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다.
신체를 단련시키는 법은 많지만.
마나 만큼은 연공법 자체의 고하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름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현우 너, 이 황옥고가 얼마나 가치 있는 물건인지 몰라서 이러는 거니?”
“알죠.”
현우는 히죽 웃었다.
“잘 아니까. 선물하는 거고요.”
이미 무한한 마나를 가진 현우에겐.
황옥고가 주는 마나 보강의 효과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바닷물에 한 컵 물을 더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대신 저도 그냥 맨입으로 드리는 건 아닙니다. 지난번에 건우가 졌던 빚이랑 합쳐서. 고모님께 도움을 받고 싶은 게 몇 가지 있거든요.”
“······그래, 빚도 있었지.”
주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독이든 성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황옥고라는 선물을 마다할 수는 없다. 그녀에겐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아들인 주건우에겐 무엇보다 필요한 영약이었으니까.
“원하는 걸 말해보렴.”
“뭐, 별거는 아닙니다.”
당장 황옥고나 건우에게 달아 놓은 빚과 비교한다면. 지금부터 현우가 제시할 요구사항들은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일단은 ‘세이렌의 순수한 눈물’의 세공에 필요한 금액을 전액 지원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돈은 부수적인 거고.
사실은 이게 본론이다.
“샤오 가문이 국내에 진출하려고 손을 쓰는 중이라는 거. 이미 고모님께서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샤오 가문?”
물론 알고 있었다.
최근 주양태 회장이 유럽으로 나가 있었기에. 그동안 눈치만 보던 샤오 가문이 번갯불에 콩을 볶듯이 빠른 속도로 제약공장 설립 계약까지 마쳤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녀석들을 일소해버리려고 하는데. 준비하는 과정에 고모님의 도움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렴.”
주영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
바로 이튿날.
현우는 류한나와 함께 서울 용산을 찾았다.
주영미 쪽에 ‘세이렌의 순수한 눈물’의 세공에 들어가는 비용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으니. 이제 더는 미룰 이유가 없었다.
용산 헌터 물품 상가.
줄여서 ‘용산 상가’혹은 ‘용산 던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곳은,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각종 장인이 포진한 헌터들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게이트와 던전이 가문과 길드 등을 중심으로 일종의 사업으로 발전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다르게 흘러갔다.
국내외의 여러 길드에서 실력 있는 장인들을 하나 둘 포섭해간 결과. 지금은 거의 상권이 죽은 동네나 다름없게 변한 것이었다.
“이 허름한 곳에 유일급 아티팩트를 다룰 수 있는 명장이 남아 있다니.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류한나가 중얼거렸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죠.”
현우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이게 맹점이었다. 이런 편견 때문에 회귀 전의 천무그룹은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명장을 하나 놓친 셈이었다.
“대단한 실력을 감추고 있는 명장이. 이제 제대로 된 장인도 몇 안 남아 있는 용산 상가에 있을 거라고. 대체 누가 예상할 수 있겠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결국 모래 속에서 바늘 찾기다.
용산 상가에 남아 있는 장인들이 몇 없다고는 해도. 그들 모두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은 천무그룹에겐 쓸모없는 낭비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류한나가 간과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현우가 그 명장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일이 파악할 필요 없이 이미 알고 있다면.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을 필요도 없다.
‘이쯤일 텐데.’
현우의 눈이 바쁘게 주변을 훑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박태민 명장의 유일한 아들이자 제자가 이곳에 있는 게 확실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훈-타 프라자]구수한 작명솜씨가 더해진 간판.
그제야 현우의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이곳이 바로 지금까지 현우가 찾던 박태민 명장의 유일한 제자가 있는 곳이었다.
“계십니까?”
슬쩍 가게 안을 들여다본 후.
현우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광경이었지만. 그렇다고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뭐야.”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성. 마른오징어를 씹다 말고 현우를 발견한 그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 손님이신가?”
몸에서 후끈한 알콜 냄새는 물론이고. 조금 전까지도 연초를 태워댄 모양인지. 케케묵은 담배 냄새가 코끝에 진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걸음을 했는데. 이걸 아쉬워서 어쩌나. 오늘은 영업 안 하는데. 대신 여기 소주라도 한잔하고 가실래?”
“아뇨, 소주는 됐습니다.”
현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국내 최고 실력을 갖춘 장인.
그러나 지금은 알려지지도 않았고. 스스로 알려지기도 원하지 않는 반 폐인 같은 사내.
부스스한 머리칼을 매만지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고 나서야. 현우는 그가 알던 박광철이 확실하다고 확신했다.
‘회귀 전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했지.’
긴박한 시간과 물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 배신자 가문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박광철의 손에서는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명작이 탄생했다.
그의 손을 거친 여러 아티팩트가 없었다면. 천무그룹과 서울 방어선이 무너지는 속도는 훨씬 빨랐을 것이다.
“박광철 씨 맞죠?”
“나를 아쇼?”
박광철이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
“······그래서.”
박광철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내 이름을 알고 왔다는 건. 그냥 용산 상가를 둘러보던 평범한 손님은 아닌 모양이고. 뭔가 특별한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세공을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현우는 품에서 준비해온 물건을 꺼냈다.
“이겁니다.”
“이건······.”
박광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현우의 손에서 재빨리 ‘세이렌의 순수한 눈물’을 낚아채듯 가져왔다.
“유일급 아티팩트군.”
“C+급 던전의 최초 공략 보상이죠.”
“웬만한 헌터도 최초 공략 보상을 손에 넣기는 쉽지 않을 텐데. 젊은 손님께선 보기와는 다르게 든든한 뒷배라도 있나 봅니다?”
박광철은 흥미롭단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흥미는 현우가 아니라. 오로지 ‘세이렌의 순수한 눈물’을 향한 장인의 탐구심이었다.
“흐음······.”
한참을 요리조리 살펴봤지만. 이내 그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현우에게 ‘세이렌의 순수한 눈물’을 돌려주었다.
“어중이떠중이 실력으로는 세공하기 쉽지 않을 거요. 아무래도 여기 용산에서는 손댈 만한 사람이 없을 테고. 더 나은 장인을 찾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일반적으론 그렇겠죠.”
그러나 눈앞의 박광철이라면.
현재 천무그룹과 직계약이 된 어떤 장인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미래를 알고 있는 현우에겐 그가 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전 박광철 씨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 대한민국에서 이 아티팩트를 완벽하게 세공해줄 수 있는 장인은 당신뿐이거든요.”
“으하하! 이거 재밌는 손님이시네!”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박광철은 대소를 터트렸다. 그가 웃음을 터트리는 동안. 현우는 조용히 그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용산에서 가게를 몇 년을 했는데. 이렇게 사람 띄워 주는 손님은 처음 보네.”
박광철은 웃음을 멈추고.
테이블에 놓인 오징어 다리를 하나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내가 덕분에 기분도 좋아졌겠다. 공짜 조언 한 마디 해드리겠는데. 아무리 용산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너무 만만하게 보면 안 될 거요.”
손을 휘휘 내젓는 박광철.
“옛날 용산이라면 드물게 실력 있는 장인이라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용산에서 그런 식으로 나갔다간, 그냥 개호구로 보고 세공비나 낭낭하게 뜯길 테니까. 내가 정직한 사람이라 다행인 줄 아쇼!”
큭큭 작게 웃음을 흘리며.
그는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어으 좋다!”
크으, 하며 소매를 입가로 슥슥 닦은 박광철은 흘끗 현우를 곁눈질했다.
“아무튼, 나는 오늘 영업도 안 할 거고. 용산에 그 정도 아티팩트를 다룰 수 있는 장인도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는 편이 시간도 아끼고 돈도 아끼는 방법이야.”
“아까 이야기했던 거. 농담 아닙니다. 그도 그럴게 박광철 씨는······.”
미래를 알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분위기를 바꿀만한 한 마디는 알고 있었다.
“박태민 명장의 아드님이시잖아요?”
툭.
박광철이 질겅질겅 씹던 오징어 다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어느새 그의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그쪽이 그걸 어떻게······.”
“간단합니다.”
현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주머니 속에 송곳이 들어 있으면.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결국 뚫고 나오기 마련이죠.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박태민 명장.
벌써 10년도 전에 종적을 감추고 업계에서 사라진 전설적인 장인. 그가 남긴 유일한 후계자가 바로 박광철이었다.
“박광철 씨 딴에는 아주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천무그룹이 원한다면 적어도 국내에서 알아내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살짝 과장이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천무그룹에 주현우라는 존재를 더한다면. 아주 허황된 허세까지도 아니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현우가. 천무그룹을 주무를 수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은 아주 많아질 테니까.
“천무그룹······.”
박광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는 천무그룹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박태민 명장은 어느 길드나 가문에도 속하지 않기를 선택했고. 그 덕분에 여러 방면에서 천무그룹의 압박을 받는 일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거야 원. 조용히도 못 살겠군.”
킁, 하고 코를 삼킨 박광철.
그는 한숨을 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뭐, 계속 말해보쇼.”
“아주 좋은 거래를 하나 제안하고 싶습니다. 천무그룹의 일원이 아니라. 저 개인으로써 말이죠.”
“개인?”
박광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단한 천무그룹의 소속의 인재께서. 나 같은 삼류장인과 거래할 게 대체 뭔지 모르겠네. 솔직히 그렇게 끌리는 이야기도 아닐 것 같고.”
어깨를 으쓱하는 박광철.
“나는 이대로 사는 게 좋은 사람이요. 대단한 명예욕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어봐야 이렇게 홀몸이라 쓸 데도 없고 말이지.”
“돈이나 명예를 제안할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 지금 현우에겐 불가능하다.
천무그룹의 3세라는 타이틀만 있을 뿐. 아직은 개인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자금도. 움직일 수 있는 공략팀도 없는 상황이니까.
“대신.”
하지만 한 가지라면 가능하다.
박태민 명장은 잠적한 게 아니다.
10년 전, 샤오 가문에 의해 이용당하고 살해당했을 뿐. 그 사실을 아는 현우가 박광철에게 제안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간단했다.
“박태민 명장의 복수.”
“······!”
“그건 제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주영미가 소개해주는 장인이라도. ‘세이렌의 눈물’을 완벽에 가깝게 세공해줄 수야 있다.
현우가 박광철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샤오 가문과 악연이 있는 박광철은 온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장인.
그 박광철을 천무그룹이 아니라. 주현우 개인에게 소속된 사람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점만큼. 매력적인 조건은 없으니까.
“대체 손님의 목적이 뭐요?”
“샤오 가문.”
더 나아가서는 배신자 세 가문.
중국의 샤오 가문을 비롯. 러시아의 로마노프 가문과 유럽의 블랙 가문까지. 모조리 박살을 내버리는 게 현우의 목적이었다.
“······정말 약속할 수 있는 거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샤오 가문에 대한 복수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더라니.
꿀꺽, 박광철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만약 저와 함께하신다면. 이런 유일 등급 아티팩트는 질리도록 다룰 수 있을 거라고. 확실하게 약속하겠습니다.”
그건······.
장인의 혼을 자극하는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