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9
19화 장인(2)
‘아버지의 복수······.’
박광철은 꿀꺽 침을 삼켰다.
동아시아에서 천무그룹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가문이 바로 샤오가다.
아버지가 녀석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복수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천무가의 젊은 청년이 대뜸 복수를 해주겠다니.
솔직히 믿기 어려웠지만.
믿고 싶은 제안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
박광철의 시선이 현우의 손으로 향했다.
영롱한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세이렌의 순수한 눈물’을 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슬쩍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역시, 세공해보고 싶다.’
유일 등급의 아티팩트.
실력에 자신은 있지만. 용산 쪽에 오랜 시간 있다 보면, 저런 귀중한 물건을 만질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아니, 좀처럼이라기보단 전혀 오지 않는다고 해야 맞겠지. 현재의 용산에 유일 등급 아티팩트를 세공하러 오는 미친놈은 이제는 없을 테니까.
“알겠수다.”
결국 박광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손님이 원하는 거래 조건. 그게 뭔지 자세히 들어나 봅시다. 단순히 그 유일등급 아티팩트를 세공해달라는 부탁은 아닐 것 같고. 뭔가 다른 요구가 있는 모양인데.”
“어려운 건 아닙니다.”
이제 거의 넘어왔다.
현우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제 전속 장인이 되어주시죠.”
“전속 장인?”
“저, 주현우 개인에게 고용되는 전속 장인 말입니다. 앞으로 제가 공략팀을 이끌게 되면 그쪽 소속이 되어 일을 해주시면 됩니다.”
“나를 스카우트 하겠단 소리구만.”
“예, 당장은 어렵겠지만. 여건이 되는 대로 업계 최고의 설비와 대우도 약속드리겠습니다.”
업계 최고의 설비와 대우.
그렇다면 적어도 일을 하는 데에 불편함을 만들진 않겠단 이야기였다.
당장은 어렵다는 이야기가 살짝 걸리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것보다도 샤오 가문 쪽이었으니.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쓰읍.”
박광철은 짐짓 숨을 삼켰다.
이대로 오케이를 해도 상관없지만. 왠지 모르게 너무 쉽게 가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훤히 내비쳐 보이고 있는 기분.
“일단은 다 좋수다. 근데 적어도 전속 계약을 맺으려면. 아티팩트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데······.”
현우는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가 양손을 앞으로 뻗자. 작은 비늘들이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묵빛의 권갑이 양팔을 뒤덮었다.
“이게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흑린갑······!”
박광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몰라볼 리가 없다. 현우의 팔을 뒤덮은 묵빛 비늘의 정체. 흑린갑은 그의 아버지 박태민 명장이 제작한 아티팩트 중에 하나였으니까.
“설마 천무그룹의 손에 들어갔을 줄이야.”
“들어왔다곤 해도. 대단한 아티팩트 취급은 못 받았죠. 천무그룹 비고에서도 가장 희귀도가 낮은 물건들과 같은 구역에 보관되어 있더군요.”
“흑린갑을 그렇게 취급했단 말이요?”
박광철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흑린갑은 그의 아버지 박태민 명장이 남긴 일생의 역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용자와 함께 성장하는 아티팩트는 전 세계에서도 몇 개 되지 않는다. 흑린갑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을 텐데.’
가치를 못 알아보는 까막눈들에겐 그저 간편한 권갑 정도로 보이겠지만. 아티팩트가 지닌 잠재력을 고려해본다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신화 등급의 아티팩트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게 오히려 저에겐 행운이었습니다. 결국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의 손에 들어온 셈이니까요.”
빙긋 웃는 현우.
박광철은 할 말을 잊고 입맛을 다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봅시다.”
“예, 그러시죠.”
“아무리 그쪽이 천무가의······.”
뭐지?
아직 현우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 듣지 못했다. 그가 천무그룹 측의 사람이란 것만 짐작했을 뿐.
“통성명이 아직이었군요. 주현우라고 합니다. 천무그룹의 주양태 회장님이 바로 제 조부 되시는 분이죠.”
“아, 그랬군.”
천무그룹 일가의 한 사람이었을 줄이야.
젊은 나이로 봐서는 그저 재능으로 밀고 올라온 팀장급 헌터 정도로 생각했는데. 박광철의 예상보다 훨씬 거물이었다.
“음, 아무리 주양태 회장의 손자라고 해도. 천무그룹 전체를 의지대로 움직이긴 어려울 텐데. 손님께선 대체 어떻게 샤오 가문을 무너뜨리겠다는 거요?”
박광철의 분석은 정확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상대가 현우라는 점이었다.
“한나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현우는 생뚱맞게.
지금껏 두 사람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저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류한나에게 질문을 돌렸다.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내가 천무그룹 전체를 움직일만한 힘이 없다는 거. 한나 씨도 그렇게 생각하나 문득 궁금해져서 말이에요.”
그 질문에 한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쉽지 않은 질문이군요.”
그녀는 곤히 생각에 빠진 듯 눈을 내리감았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곧 천천히 눈을 뜬 그녀의 입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차후 도련님의 활약에 따라.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현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차피 박광철의 질문에 정답은 없다. 만약 정답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결과로만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박광철은 잠시 말없이 현우를 응시했다.
“······좋수다!”
대뜸 손을 내미는 박광철.
이제야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현우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세이렌의 순수한 눈물을 넘겼다.
“세공에 들어가는 소재는 전부 최고급으로 사용할 거니까. 세공 끝나고 얼마가 청구되든. 그건 불만 없기로 약속하는 걸로 합시다.”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이번 세공 의뢰에 들어가는 모든 금액은 현우가 아니라 주영미의 주머니에서 나가게 될 테니까.
“세공은 이틀 정도 걸릴 거요.”
“전속 장인 제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속 장인으로 일하려면 이쪽 점포도 정리를 해야 할 텐데. 그게 이틀 만에 뚝딱 가능한 일은 아닌지라. 조금만 더 시간을 준다면 좋겠는데.”
우선은 점포를 내놔야 하고.
내부에 있는 설비나 집기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는 현우.
아니, 현우가 소속된 천무그룹이다. 그런 잡다한 일쯤이야 어렵지 않게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건 저희가 전부 처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천무그룹에서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 박광철 씨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천무가로 몸만 오시면 됩니다.”
“으음······.”
용산에서 오래 점포를 운영하긴 했지만. 박광철은 스스로를 장사꾼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천성이 장인 외의 일엔 소질이 없었으니까.
아마 직접 점포를 정리하게 되면. 손해 보는 것들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 천무그룹이 책임지고 해결해준다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뭐, 알겠수다. 오전이면 세공은 끝날 테니. 먼저 아티팩트를 전해주고. 대충 챙길 것만 챙겨서 가면 되겠지.”
“그럼 저희 측에서 박광철 씨를 모실 인원을 보내겠드리겠습니다. 저녁쯤에 인원을 보내드릴 테니. 그때까지 여유롭게 준비하시지요.”
류한나의 말에 박광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앞으로 이틀 동안. 현우가 맡긴 아티팩트의 세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럼 이틀 후에 뵙죠.”
***
“도련님 오셨습니까!”
인천국제공항.
금색 용이 수놓인 무복을 입은 청년, 샤오 윤이 입국 게이트를 통과함과 동시에. 스무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검은 무복의 사내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시끄러워.”
샤오 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단지 약간의 불쾌함을 드러냈을 뿐인데. 검은 무복의 사내들은 얼굴색이 사색으로 변해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샤오 가문의 차남인 내가. 이런 변방 소국까지 직접 오게 된 것만 해도 짜증이 치솟는데. 이젠 너희까지 내 심기를 건드릴 생각이냐?”
“아, 아닙니다.”
“그럼 닥치고 안내나 해.”
샤오 윤은 살기를 내뿜었다.
아무리 그가 크노스 경매 이후로 가주의 눈 밖에 난 아들이라곤 해도. 샤오 가문의 혈족을 통틀어 서열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인 것은 변함없다.
샤오 가문의 중심은 직계 혈족.
현재 가주 샤오 리는 무려 열 명이나 되는 첩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중에서 본처의 자식인 장남 샤오 준과 샤오 윤. 두 사람의 위세를 감히 넘볼 자식들은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샤오 가문의 모든 스킬은 독과 관련이 있고. 직계 혈족에 가까울수록. 가문이 다루는 모든 독에 대한 내성을 짙게 타고나기 때문이었다.
“안 움직이냐?”
“······알겠습니다.”
숨통을 조일 듯이 쏟아지는 살기.
검은 무복 중에서도 가장 고수인 한 명이 황급히 움직이고서야. 샤오 윤은 살기를 거두고 그를 따라나섰다.
‘빌어먹을.’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작 잠깐 아랫것들에게 패악질을 부린 것 따위로. 샤오 윤의 기분이 완전히 나아질 리가 없었다.
이게 빌어먹을 크노스 경매 때문이다.
이무기의 알만 계획대로 손에 넣었다면. 지금쯤 본가에서 융숭한 연회를 벌이고 있었을 무렵일 텐데.
“어이.”
“예, 도련님.”
“내가 알기로 이번 임무. 단순한 장인 포섭이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쓸데없이 인력이 많이 동원됐지?”
이번 임무는 간단했다.
한국 쪽에 설립할 제약회사의 관리를 위해. 현재 샤오 가문 측에선 한국 지부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
그 한국 지부에 소속될 실력 있는 현지 장인을 포섭하는 것이. 바로 샤오 윤에게 떨어진 임무였다.
“한국은 천무그룹의 본진이기도 하고. 가주님께서 특별히 도련님의 안전을 생각해 S급 이상의 헌터를 서른 명 배치하셨습니다.”
“안전은 무슨.”
샤오 윤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그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고작 장인 하나 포섭하는 데. S급 이상 헌터를 서른 명이나 움직일 이유가 없다. 아버님께선 나를 불신하고 계신 거야.’
가주 샤오 리가 그의 안전을 걱정하진 않을 터. 분명 저번 크노스 경매의 실패 때문에 일부러 인력을 증원한 것이리라.
“그런데 도련님······.”
불쾌한 기색을 느꼈던 걸까.
헌터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박광철 장인에게 접근할 기회는 오늘이 지나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샤오 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은 천무그룹 쪽에서 먼저 박광철 장인과 접촉한 모양입니다. 이틀 전에 전쯤 아티팩트 세공도 의뢰했던 것 같습니다.”
“아티팩트?”
“예, 오늘 오전에 의뢰한 물건을 찾아가는걸. 저희 쪽 요원이 포착했습니다. 박광철 장인도 용산 쪽의 점포를 정리하고 천무그룹으로 넘어가려는 모양이더군요.”
그는 곧 태블릿을 꺼내 몇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전 조사까지 철저하게 마친 모양이었다.
“여기 저희가 확보한 사진입니다.”
“잠깐만······.”
눈에 익은 얼굴.
순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던 샤오 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면 속의 얼굴은 주현우였다.
“······이 새끼.”
설마 이렇게 빨리 재회할 줄이야.
샤오 윤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잘 알고 있어. 며칠 전 크노스 경매장에 있던 놈이다. 주양태 회장, 그 늙은 용을 등에 업어서 그런지. 기세가 아주 등등하던데.”
“주양태 회장이라면, 설마 이 녀석이 천무가의 혈족 중에 하나란 말입니까?”
“그래.”
샤오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노스 경매 이후로 대강 조사해봤는데. 벌써 20년도 전에 죽은 주양태 회장의 서자. 주일석의 사생아라더군. 애미도 애비도 없는 고아 녀석인 셈이지.”
“주일석······!”
그 이름에 헌터가 깜짝 놀랐다.
“천무그룹의 소룡이라 불렸던 녀석 아닙니까. 일전 샤오 준 님께서도 녀석과의 비무에서 한 번 패배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형님이 방심하셨을 뿐이다.”
샤오 윤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내의 말대로 샤오 가문의 장남. 샤오 준은 오래전 주일석과의 비무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그건 샤오 가문 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비무였다.
“애초에 샤오 가문의 절기인 극독 대부분을 사용할 수 없는 비무였는데. 형님께서 녀석을 너무 봐주셨지.”
극독을 사용할 수 없다면.
샤오 가문에겐 손발을 다 묶고 싸우는 꼴이나 다름없다. 만약 단순한 비무가 아니라 목숨을 건 대결이었다면. 결과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또 이렇게 우리 가문의 앞길을 막아서려 드는군. 천무그룹의 빌어먹을 고아 자식이 말이야.”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씨익, 그의 입꼬리가 호를 그렸다.
“당장 저 장인을 데려와.”
지금까지 짜증 일색이었던 목소리에 차츰 서늘한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독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녀석을 미끼로 저 천무그룹의 고아 녀석을 유인할 거니까. 볼일이 끝나고도 이용할 수 있게 목숨만 붙여놔.”
“그 말씀은······.”
“천무그룹에겐 크노스 경매에서 진 빚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갚아줘야지.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게 말이야.”
샤오 윤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