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37
37화 배신자(3)
“그간 어찌 지냈는지 모르겠구나!”
껄껄 웃으며 현우를 놓아주는 주형석.
“그런대로 잘 지냈습니다.”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대로 부족함은 없이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군. 요즘 영미가 네게 신경을 많이 써준다고 들었는데. 그 덕분이냐?”
“공교롭게도 말이죠.”
“흐흐, 녀석 못 보던 사이에 농담이 많이 늘었구나. 어쨌든 가문 내에서 자신의 우군을 늘려가는 것은 아주 현명한 일이다. 영미를 어떻게 구워삶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주형석의 시선이 현우를 핥았다.
주양태 회장보단 못하겠지만. 그 역시도 천무그룹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을 가진 사람이다.
“성장은 많이 한 것 같은데.”
“알아봐 주시니 감사하네요.”
“창천신공의 성취는 어디쯤 왔지?”
“4성입니다.”
“오오! 굉장히 빠르군.”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 주형석.
‘곰의 탈을 쓴 여우 같군.’
현우가 주형석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인상은 딱 그 정도로 정리될 수 있었다.
겉보기엔 후덕하고 털털한 사내 같지만.
주양태 회장의 사후. 천무그룹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그는 본인의 여우 같은 수완을 제대로 드러내 보였다.
그 결과······.
차기 회장 자리에 오른 주진석과 함께. 천무그룹을 실질적으론 양분하다시피 하는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주형석은 결국 서울 방어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알리바이··· 라고 해야 할까.
그가 서울 방어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있었다. 바로 서울이 다니엘 블랙을 필두로 한 마족의 공세에 습격당하기 직전.
천무그룹 유럽 지부 역시.
원인 불명의 습격과 함께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또한 다니엘 블랙의 계략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가장 먼저 2대 회장 자리에 앉아 있던 주진석이 유럽 지부 지원을 위해 떠났고. 마찬가지로 연락이 끊겼다.’
그 후에 주형석 역시.
유럽 지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알아보겠다며 주영우와 주아라. 두 사람과 함께 유럽으로 향했다.
직후 서울 방어전이 시작됐으니.
그저 우연이라고 하기엔 의심스러운 정황이 없진 않았다.
“지난 3개월의 폐관 수련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아무튼, 진심으로 축하한다. 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거다.”
“네.”
시원하고 후덕한 아저씨 같은 느낌.
회귀 전의 현우 역시, 천무가에서 주형석 만큼은 꽤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했다. 적어도 서울 방어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맞다!”
주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현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고···.”
툭툭 어깨를 두드린 주형석.
그는 한발 앞서 자신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곤 들어오라는 듯이 현우를 향해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유럽에 다녀오며 차라는 것을 몇 개 가져와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들이 많아.”
“아버지, 저도···.”
“영우 네가 낄만한 대화는 아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부를 테니. 잠시 빠져 있도록 해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주영우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
“자, 한번 들어 봐라.”
김이 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내미는 주형석.
현우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찻잔을 받아 들었다.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지만 상관없다.
세이렌의 순수한 눈물이 제공하는 독에 대한 면역 효과는 이미 질리도록 경험해보았으니까.
“향이 좋네요.”
“차에 대한 조예가 없는 나도 마음에 든 향이다. 네게도 호평을 받았으니. 내 코가 이상한 건 아니겠구나.”
껄껄 웃음을 흘린 주형석.
그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마신 그가 시선을 다시 현우에게로 돌렸다.
“혹시 벌써 짐작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이리 현우 너를 급하게 찾은 이유는······.”
주형석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샤오 가문의 일 때문이다.”
본론부터 훅 들어간다고?
현우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올 뻔한 헛웃음을 삼키며. 조용히 주형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떤 일 때문입니까?”
“최근에 샤오 가문 차남과 시비가 붙었다고 들었다. 그 일 때문에 나와 아버지가 샤오 가문과 담판을 짓고 온 것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알고 있습니다.”
“책망하려는 건 아니다.”
주형석은 짐짓 헛기침했다.
“그러나 이 이상 마찰을 빚는 일은 없다면 좋겠구나. 샤오 가문과 협약을 했으니. 약속이 깨진다면 가문 간의 전쟁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
“아, 그거 말이죠···.”
미안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마침 오늘 녀석들의 제약공장을 박살 내고 왔거든요. 샤오 가문이랑 마찰을 안 빚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뭐라고···?”
주형석이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 호탕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그는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황망한 표정으로 현우와 마주 볼 뿐이었다.
“방금 말씀하셨던 샤오 가문의 차남. 샤오 윤 녀석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약공장에서 생산할 예정이었던 섬신단이란 영약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말입니다.”
“허······.”
주형석의 눈빛이 변했다.
현우는 짐짓 모르는 척.
그에게 섬신단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확보한 ‘청운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주형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현우 네 말이 사실이라면. 녀석들이 아무 도움도 없이 국내에서 그런 큰일을 꾸밀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겠죠.”
“협력자에 대한 정보는 없더냐.”
자연스러운 물음.
그러나 현우에겐 그게 입질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평소의 주형석 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제대로 드러나는 질문이었다.
‘주형석이 정말로 결백했다면. 협력자의 존재에 대해 물을 것이 아니라. 당장 증거를 가져오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쉽게도 특별히 연관된 협력자는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샤오 준이라는 녀석이 꽤나 꼼꼼한 성격인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거든요.”
“그런가.”
주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표정에 분명한 안도의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타깝군.”
“그러게요.”
“일단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현우 네 말만을 듣고 판단하긴 어려우니. 내가 따로 사태를 파악하도록 하지. 가급적 피를 보지 않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만···.”
“어렵겠죠.”
그 한 마디에 주형석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현우는 능청스럽게 못 본 척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이걸로 윤곽이 드러나는군.’
배신자는 주형석으로 좁혀지고 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가 왜 천무그룹을 배신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배신하고 있는지. 거기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차는 잘 마셨습니다.”
“···그래.”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주형석은 돌아서는 현우의 뒤통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가 집무실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을 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본가에 붙어 있도록 해라. 샤오 가문과 이야기가 제대로 정리되기 전까지. 네 신변에 위협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의미심장한 한 마디였다.
현우는 흘끔 뒤를 돌아보며 답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
확신이 생긴 이후.
현우는 지체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바로 주형석과 드잡이질을 하진 않았다.
‘이건 낚시와 똑같다. 챔질하는 건.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백 퍼센트 가졌을 때다.’
아직은 아니다.
이제 고작 주형석보다 한발을 앞서서 달리고 있을 뿐. 그를 제대로 끝내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적어도 주양태 회장이 다시 본가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의 목을 확실히 조일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예전만큼 막막하진 않아.’
가장 확실한 단서.
‘청운문’이라는 정보가 손에 들어왔으니. 거기서부터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가면 그만이다.
아무 정보도 없던 회귀 전과 비교하면.
적어도 지금은 훨씬 유리한 고지에 서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랜만입니다.”
한국 헌터 협회의 S급 헌터.
그리고 현우와는 ‘독룡의 둥지’라는 던전을 통해 인연을 맺은 권준성이었다.
현우의 인사에 그는 고개를 푸욱 숙여 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현우가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권준성 씨?”
“아, 죄송합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잠시 정신이 팔렸습니다.”
멋쩍게 웃는 권준성.
“어린 시절의 제 꿈이 천무그룹 소속의 헌터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방문해보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이해합니다.”
현우는 픽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공감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현우 역시 처음부터 천무그룹 본가의 일원으로 살아온 게 아니었으니까.
국가에서 운영하는 보육원.
그곳에서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자라며. 현우 역시도 최고의 헌터가 되겠다는 꿈을 꾸던 적이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꿈의 끝에는 천무그룹이라는 동아시아 최고의 혈맹 기업에 소속된 헌터가 되겠다. 그런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대단한 꿈도 아니었던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은 격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 권준성 씨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한 가지 협회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게 있어서입니다.”
“협회의 도움말입니까?”
권준성은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상대는 자타공인 동아시아 최강의 천무그룹이다.
아무리 그룹 내부에서 권력이 없다고 해도.
현우가 본가의 일원인 이상. 헌터 협회가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예.”
덤덤하게 대답한 현우.
권준성은 나름의 눈치가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천무그룹 내부 인력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헌터 협회 측에도 달가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위험한 일입니까?”
“세상에 안 위험한 일은 없죠. 제가 게이트에 뛰어들어 서민욱 씨와 권준성 씨를 비롯한 선발대원들의 목숨을 구했던 것처럼요.”
“제가 질문을 잘못 했군요.”
권준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주현우 도련님께서 이번 일을 진행하기 위해. 천무그룹이 아니라 저희 협회의 힘을 빌려야 하는 까닭이 뭔지. 다시 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그건······.”
까닭은 복잡하지 않았다.
“천무그룹 내에서 일을 진행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은 사람에게 소식이 들어가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천무그룹 내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헌터 협회의 힘을 빌리고 싶다는 말씀이군요.”
“네.”
어떤 일을 맡기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심상치는 않은 일이란 예감이 들었다.
“한국 헌터협회 측에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 될 겁니다. 권준성 씨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익’과 직결된 문제니까요.”
“···국익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샤오 가문과 전쟁을 시작할 겁니다.”
“예?”
권준성의 눈이 커졌다.
그는 설마 잘못 들은 건가 싶은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그러나 상대의 눈빛은 진지했다.
‘이건 진심이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권준성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하지만 그 전에···.”
현우가 뭔가를 내밀었다.
“이 자료들을 서민욱 씨를 통해. 헌터 협회 측에서 발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공론화가 될 수 있도록 말이죠.”
“이건···?”
“샤오 가문과 전쟁을 벌일 명분입니다. 혹시나 해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천무그룹에서 만들어낸 자료가 아니라. 녀석들에게 확보한 겁니다.”
샤오 준의 집무실에서 확보한 자료.
제약공장에서 생산할 예정이었던 섬신단의 레시피와 효능. 그리고 유통 계획이 정리된 서류의 사본이었다.
“맙소사.”
서류를 확인한 권준성은 탄식을 흘렸다.
샤오 가문이 설마 이런 끔찍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실제로 국내에 제약공장까지 세우며 실행 직전에 갔다는 것이 가장 끔찍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단순히 가문 간의 전쟁을 원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주현우 도련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그걸 먼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현우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문제의 싹을 잘라내는 거죠.”
내부와 외부.
두 면의 싹을 모두 잘라내지 않으면. 문제는 언젠가 재발하기 마련이다.
외부의 샤오 가문.
그리고 내부의 주형석.
‘최종적으론 다니엘 블랙까지.’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겠지.
의외의 손님이 찾아온 건.
샤오 가문과 주형석을 도마 위에 올리기 위한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틀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