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38
38화 배신자(4)
“노력은 해보겠다···.”
천무그룹의 이사 주형석.
그는 집무실에서 홀로 코웃음을 쳤다.
오랜 만에 보는 거라 그런가. 어린 녀석이 꽤 건방져 졌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도 못 마주치던 녀석이······.
그러나 단순히 건방진 것만은 아니었다.
‘샤오 가문의 차남에 이어 장남까지.’
주현우의 손에 죽었다.
이제 샤오 가문과 불화는 피할 수 없다. 뭐, 그거야 그렇다 쳐도. 주현우가 그 두 녀석을 죽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분명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창천신공에 입문조차 하지 못했던 쓰레기 같은 녀석이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분명히 뭔가 있군.”
주형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창천신공은 부정의 여지 없이 강한 연공법이다. 그러나 그만큼 오랜 단련과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그런데 벌써 4성이라니.
이건 상식을 초월한 성장 속도였다.
“조카의 귀여운 일탈···.”
주형석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단순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 이미 주현우 덕분에 그의 계획은 많이 틀어졌다.
또한, 최근 그의 아버지.
주양태 회장이 현우에게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는 사실 역시. 주형석의 심기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젠 손을 쓸 수밖에 없겠군.’
주형석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
이튿날.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류한나가 전한 뜬금없는 소식.
현우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저한테요?”
“예.”
아직 자신을 찾아올 만한 손님은 없다.
샤오 가문과 여러 번 마찰을 빚었지만. 공식 석상에서 활동을 제대로 시작하진 않았으니까.
약간의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현우는 자신을 찾아왔다는 손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손님의 정체는 생각지도 않던 의외의 인물이었다.
“마야 카일리에요.”
불쑥 손을 내미는 여성.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지는 모르겠는데. 몇 개월 전, 크노스 경매에서 뵌 적이 있었죠. 천무그룹의 소협 주현우 님.”
그러고 보니 확실히 눈에 익은 외모다. 현우는 어렵지 않게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얼마 전 크노스 경매에서.
가주인 테오 카일리를 대신해. 주양태 회장과 현우를 안내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크노스 경매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현우는 마야 카일리의 손을 맞잡았다.
확실히 의외의 만남이었다.
“일단 않으시죠. 그리고 소협이란 별칭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라. 그냥 편하게 이름만으로 불러주시면 좋겠네요.”
“네, 주현우 님.”
류한나가 차를 내왔고.
몇 분 정도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찾아온 걸까. 대놓고 물어보려 현우의 입이 열리려던 찰나.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시죠.”
“샤오 가문의 차남과 장남. 두 사람을 모두 당신이 죽였다고 들었어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그 소문이 사실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어요.”
소문이 생각보다 빠르다.
아니, 카일리 가문이기 때문일까.
현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한국까지 직접 방문한 이유. 그리고 다짜고짜 자신의 앞에 나타나서. 샤오 가문과 자신에 대해 도는 소문을 확인하려고 한다는 것까지.
여러 정보들을 머릿속에 나열한 결과.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테오 카일리.’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지난번 크노스 경매에 방문했을 때. 그녀는 가주인 테오 카일리가 요양 중이라고 했다.
아무리 크노스 경매라는 상업적인 기반을 통해 가세를 키운 가문이 카일리라곤 하지만.
그 가주인 테오 카일리는 주양태 회장과 같이. 1차 대전이를 겪고 살아남았으며 카일리 가문을 세운 최강자 중에 한 명이다.
‘그런 테오 카일리가 요양을 한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이야기였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꽤나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몇 가지 퍼즐이 맞춰져 가는 느낌이었다.
“카일리님···.”
“마야라고 불러주세요.”
“네, 마야 님.”
현우는 짐짓 헛기침했다.
“정말 죄송한 이야기지만. 제가 소문의 진위를 마야 님께 확인해 드려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카일리 가문은 손님으로서 존중하지만. 천무그룹이 손님에게 제공하는 예의와 편의엔 본가의 인물을 추궁할 권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네요.”
마야 카일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현우를 바라봤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그녀의 눈빛엔 포기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실례했어요.”
“아닙니다.”
“하지만 맹세코 당신을 추궁할 생각은 없었어요. 이해해 달라는 건 아니지만. 제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니까요.”
“사정이라면···.”
현우의 물음에 마야 카일리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표정이 연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벌써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제 아버지이자. 카일리 가문의 가주이신 테오 카일리 님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에요.”
“자세히 말씀해보시죠.”
“아버지가 요양에 들어가신 이유. 그건 샤오 가문의 비전 독에 당하셨기 때문이에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야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빛에 시름이 한가득이었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묘령의 여인.
뭇 남자라면 설렐만한 상황이지만. 현우는 이 상황을 철저히 계산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주가 중독되었다.’
약간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회귀 전, 나름 강성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카일리 가문이 맥없이 당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비전 독의 해독제는 샤오 준이 보관하고 있었어요. 저희 가문이 최선을 다해 확보한 정보니. 틀렸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죠.”
그래서 이쪽을 찾아온 건가.
샤오 준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이렇게 빨리 손에 넣은 것은 놀랍지만 해독제라니. 녀석의 집무실에 그런 물건은······.
“아.”
짐작이 가는 물건은 하나 있었다.
샤오 준의 집무실에 고이 보관되어 있던 하나의 시약. 아마 그 정체가 해독제는 아니었을까.
“···뭔가 알고 있나요?”
먀아 카일리가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 일말의 희망이 감돌았다. 그러나 현우로서는 덜컥 추측을 확신처럼 이야기해버릴 수는 없었다.
‘만약 아니면 책임을 못 지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을 싹 씻고 넘어갈 생각은 없다. 이건 카일리 가문에게 뭔가를 뜯어낼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의심이 가는 물건을 입수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마야 님이 원하는 해독제인지 확실하진 않습니다.”
“아···!”
그러나 마야 카일리에겐.
현우의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 모양이었다.
“아직 희망은 있었던 거군요!”
“말씀드렸지만 마야 님이 원하시는 해독제라곤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물건이거나. 오히려 독약일 수도 있겠죠.”
“그건 저희 가문에서 판단할 수 있어요.”
마야 카일리는 완고했다.
“샤오 가문 만큼 독에 대한 조예가 뛰어나진 않아도. 물건을 감정하는 능력은 그 비열한 녀석들과 비교도 안 되니까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선 현우가 확보한 물건이 해독제라고 결론을 내린 듯했다.
‘괜한 희망만 심어주는 거 아냐?’
현우는 쩝 입맛을 다셨다.
“효과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어요.”
마야 카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저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하는 심정을 담은 눈빛. 저런 사람들은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면 불을 쫓는 나방처럼 달려든다.
서울 방어전이 시작된 이후.
수도 없이 마주쳐 보았던 눈빛이라. 누구보다 그 절실함을 잘 알고 있었다. 현우 또한 마지막에 가선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이미 중독 증세가 상당히 심각해진 상태라. 아마 해독제가 듣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주현우 님을 원망하진 않을 거에요.”
“그거야 당연한 거고···.”
오히려 해독제를 넘겨줬는데.
듣지 않는다고 이쪽을 원망한다면 매우 배은망덕한 사고방식 아닌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가만히 있진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무튼, 그래도 상관없다면. 저랑 거래하시죠.”
현우는 아공간 포켓에서 그 물건을 꺼냈다.
보호 마법 각인이 삼중으로 새겨진 붉은 케이스. 마야 카일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의 눈앞에서 현우는 천천히 케이스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작은 시험관에 담긴 물약.
마야 카일리는 잠시 뚫어져라 시약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확신이 굳어졌다.
이건···.
카일리 가문이 애타게 찾던 해독제가 분명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물론, 정확한 것은 크레타 섬으로 가져가 정밀 감정을 해봐야 확실해지겠지만 말이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카일리 가문의 손이 닿는 한이라면. 희귀한 아티팩트나 소재도 무엇이든 확보해 드릴 수도 있고요.”
“후자가 좋겠군요.”
돈 보다는 후자가 매력적이다.
천무그룹에서 입지를 늘려갈수록 돈은 어차피 의미가 없어진다. 크노스 경매에 출품되는 모든 것들은 돈만 있다면 살 수 있다.
그러나 카일리 가문의 영향력이라면.
크노스 경매에 출품되지 않거나. 천무그룹의 손이 닿지 않는 아티팩트나 소재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으리라.
“돈을 받고 팔진 않겠습니다. 다만 마야 님이 제시하신 조건에 딱 한 가지만 더 추가하고 싶군요.”
“네,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대단한 건 아니고. 마야 님께서 현재 카일리 가문의 가주 대리로서. 저와 한가지 약속을 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약속이요?”
가벼운 약속은 아니다.
이 건엔 카일리 가문의 가주. 테오 카일리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마야 카일리에겐 그만한 대가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조만간 가문 회의가 열릴 겁니다.”
마야 카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 회의가 개최될 거라는 것.
아직 공식적으로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지만. 최근 샤오 가문과 천무그룹의 분쟁은 공공연하진 않지만. 유력 가문들 사이에선 암암리에 알려진 정보였다.
“저와 약속을 한 가지 해주시겠다면. 이 해독제는 다른 조건이 지켜지기 전에 선불로 먼저 건네 드리죠.”
“선불···!”
“카일리 가문의 가주님께선 한시가 급한 상황이실 것 같은데. 나쁜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마야 카일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만약 그것이 독이 든 성배라고 해도 방법은 없다. 거절은 차선책이 있을 때나 가능한 선택이니까.
“어떤 조건이죠?”
“카일리 가문의 중립을 깨시죠.”
마야 카일리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세계 7대 가문 중.
모든 분쟁에서 완전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가문은 카일리 가문을 포함해 두 곳이다.
그 중립을 깨라는 이야기는···.
그동안 7대 가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균형을 깨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마야 카일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 가문 회의를 기점으로 7대 가문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갈라질 겁니다. 그 자리에서 천무그룹을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설마, 그 해독제를 빌미로. 우리 카일리 가문을 천무그룹의 아래로 복속시키겠다는 건가요?”
“아뇨.”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강제로 구축한 협력 관계는 금방 깨어지기 마련이다. 현우가 원하는 것은 그런 얄팍한 동맹이 아니었다.
“기회를 드리려는 겁니다.”
급변할 예정인 세계.
이전 회차와는 다르게. 카일리 가문이 몰살이 아닌 생존으로 향할 기회.
마야 카일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
이틀 후.
미리 약속했던 대로 권준성은 서민욱과 함께 현우가 확보한 샤오 가문의 자료를 세간에 발표했다.
‘섬신단’을 통한 한국 헌터 사회의 전복을 시도 계획이 까발려지자. 샤오 가문은 순식간에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헌터 사회의 핫토픽이 되었다.
그리고 상황은···.
현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회장님께서 유럽에서 돌아오시는 대로. 가문 회의가 소집될 겁니다. 어디서 개최될지는 아직 미정이지만. 아마 샤오 가문 측에서 주최하려 들 것 같습니다.”
“상황이 불리하니까요.”
본진에서 나올 생각은 없겠지.
샤오 가문의 세력은 분명 강성하다.
그러나 그들의 기반은 어디까지 제약 사업. 무투를 근본으로 세력을 불린 천무그룹 하나도 정면에선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문 회의는 전 세계에서 최고로 일컬어 지는 일곱 개의 가문이 모이는 만큼. 가능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겠지만······.
일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미 주양태 회장을 중독시킨 전례가 있는 만큼. 그 주체가 샤오 가문일 가능성 역시 굉장히 높을 테고 말이다.
“가문 회의에 참석할 인원은 세 명. 이 부분은 이미 회장님께 연락을 드린 시점에서 결정을 해두신 모양이더군요.”
“조부님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겠죠.”
“예.”
류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둘은?”
“도련님과 주형석 이사님 입니다.”
주형석이라···.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우가 아는 주형석이라면.
이번 가문 회의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현우를 손보려고 들 것이다.
‘이번에 끝을 보는 게 좋겠지.’
주형석도.
그리고 샤오 가문도.
가능하다면 둘 다.
이번 기회에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