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36
36화 배신자(2)
“샤오 가문의 가주 후계자라더니······.”
너무 검소한 거 아닌가.
현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금은보화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쓸만한 물건들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아쉽게도 녀석의 집무실엔 샤오 가문의 각종 비전 독을 저장한 항아리 말고는, 이렇다 할 만큼 특별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음?’
그때, 현우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보호 마법 각인이 삼중으로 새겨진 케이스.
보안이 아니라 보호 마법인 것을 보아. 내부에 있는 것이 부서지기 쉽거나 귀중한 물건인 게 분명했다.
“흠.”
현우는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뜻밖에 그 내부에 든 것은 보석도 아티팩트도 아니었다.
작은 시험관에 담긴 물약.
덕춘이가 건드리지 않은 것을 보면 독약은 아닌 게 분명한데. 이렇게 엄중하게 보관할 만한 물건인가.
“···이유가 있겠지.”
일단 챙겨두기로 했다.
녀석이 고이 모셔둔 물건이니. 혹시 나중의라도 유용하게 사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때마침.
꾸르릉─!
제약공장 일대가 흔들렸다.
현우는 그 막대한 힘의 발원지가 어디인지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이건 안 봐도 뻔했다. 주영미가 공장 내부로 진입한 것이리라.
“···살짝 늦으셨네.”
재미는 다 봤는데.
이런 것도 빚이 될 수 있을까. 잠깐 발칙한 생각을 떠올려봤지만. 너무 과한 요구를 밀어붙인다면 지금까지 공들인 탑이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른다.
“덕춘아 가자.”
“쉬익!”
마침 덕춘이도 독을 모두 섭취한 듯했고.
현우는 배가 볼록하게 불러온 덕춘이를 팔에 휘감고 샤오 준의 집무실을 나섰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바로 집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주영미를 비롯한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주현우···!”
주영미가 한달음에 뛰어왔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현우의 상태를 훑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걱정?’
주영미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자신이 왜 주현우를 걱정한단 말인가. 그녀는 짐짓 헛기침했다. 그래 현우의 안위에 대해서 걱정한 것이 아니다.
천무그룹 본가의 일원이 샤오 가문에게 당한다면 얼마나 낯부끄러운 일인가. 필시 그녀의 걱정은 그에 대한 것이었을 게 분명했다.
“흠흠······.”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조금은 합리화가 된 것 같았다.
이내 표정을 가다듬은 그녀가 현우의 어깨 위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상처는 없는 것 같구나.”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나서요.”
“샤오 준은 어떻게 되었니?”
“죽었죠.”
죽었다니.
주영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저런 말이 튀어나오니. 심지어 그녀마저도 ‘아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넘길 뻔하지 않았는가.
‘놈이 자결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죽었다기보단.
죽였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겠지.
걱정한 의미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영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의식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말씀드린 그대로죠. 샤오 준은 제가 죽였습니다. 굳이 생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거든요.”
샤오 준을 죽였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뻔한 사실이지만. 주영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대는 샤오 가문의 차기 가주 후보다.
‘믿기 어려운 일이야.’
그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 의문을 던졌을 때.
주영미는 아주 불가능하진 않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다른 여러 가문의 후계자들에 비해.
샤오 준은 나이가 찼음에도 상당히 약한 편이다. 녀석이 아직 가주 자리를 물려받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샤오 가문의 힘은 독이다.
일신의 무위보단 독과 계략. 그리고 제약이라는 사업 분야에 관한 기술로 동아시아 2위라는 자리를 꿰차고 있는 녀석들이다.
그러나 불가능하진 않아도.
쉽게 이해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증거는 찾은 거니?”
“네, 여기 있죠.”
주영미가 당연한 것을 물었다.
현우는 손에 든 서류를 팔랑거려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샤오 준의 집무실엔 녀석들이 생산하려던 영약. 섬신단의 배합서와 연구 자료들이 남아 있었다.
“네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었다니.”
믿기 어렵다는 목소리.
주영미가 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현우에게 서류를 받아 살펴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제약 분야에 조예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연구 자료는 문외한이 봐도 그 심각성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주영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큰일을 치를 뻔했구나.”
“녀석들이 치밀하게 준비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동안 천무그룹에서 아무런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것은 의외야. 우리 측 정보 요원들도 만만하지는 않았을 텐데.”
주영미의 의구심은 합당했다.
천무그룹의 정보 부대라면 한국의 국가정보원은 물론이고. 현재 동아시아에서 가장 촘촘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다는 중국의 국가안전부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런데 아무 낌새가 없었다는 것은······.
‘둘 중 하나.’
그만큼 샤오 가문이 치밀했거나.
아니면 내부에서 천무그룹의 눈을 가리고 있는 배신자가 도사리고 있었거나.
“천무그룹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겠구나. 오늘부터 어떤 녀석인지 제대로 찾아내야겠어.”
의심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전자 보다는 후자일 경우가 훨씬 신빙성이 있다. 천무그룹의 정보 체계는 샤오 가문이 이렇게 큰일을 벌였음에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지 않으니까.
“고모님이 직접 말입니까?”
“그래.”
주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천무그룹의 얼굴에 스스로 똥칠을 한 빌어먹을 배신자. 그놈의 멱을 직접 따지 않고선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잠깐.”
계속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윽고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 중의 한 장을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현우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작게 혀를 찼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주 큰 문제란다.”
주영미는 또 한 번 혀를 찼다.
그녀의 표정은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현우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한 번 보라는 듯이 현우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 적혀 있는 것을 잘 보렴.”
“으음···.”
주영미의 손가락을 따라.
현우는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영미, 그녀가 왜 그런 불쾌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미 일이 모두 벌어진 이후 알았던 전생과는 달리. 샤오 가문의 기밀문서를 확보한 보람이 있는 정보였다.
아니, 사실 ‘보람’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로 포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주영미가 찾아낸 것은 배신자의 정체에 대해 한발 다가가는 정보였으니까.
[청운문]샤오 준이 계획하던 섬심단 유통 과정.
그 리스트에 국내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한 길드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운문’이라는 길드는······.
“형석 오라버니가 창립 단계부터 지원했던 길드 중 하나지. 내가 알기로 그쪽 길드장과 꽤 인연이 있기도 했고.”
“···확실히.”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넘길만한 단서는 아니군요.”
“그렇겠지.”
주영미는 보기 드문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럴 거라곤 믿고 싶지 않지만.
아무래도 배신자의 정체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
“이사님!”
본가로 돌아온 일행을 맞이한 건.
뭔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태훈 실장이었다. 그는 주영미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네, 지금 막 도착했죠.”
주영미는 흘끗 김태훈 실장의 뒤편을 바라봤다.
상당히 큰일을 벌인 만큼.
주양태 회장이 나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아버지께선?”
“지금은 본가에 안 계십니다. 이사님께서 본가를 떠나신 직후. 회장님께서도 급하게 나가셨습니다.”
“급하게 나가셨다고요?”
“예.”
김태훈 실장은 끄덕 고개를 숙였다.
“유럽지부 쪽에 문제가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내로는 돌아오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유럽지부······.”
난처한 상황이다.
하루라도 빨리 그룹 내부의 배신자를 색출해야 할 텐데. 이 와중에 천무그룹의 머리인 주양태 회장이 자리를 비운다니.
‘타이밍이 안 좋아.’
주영미는 살짝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 외에도 신경 쓸 것이 있는 것 같았다.
“표정이 좋지 않네요. 방금 말한 아버지 일 말고도. 달리 내게 보고할 것이 남아 있는 모양이죠?”
“그게······.”
김태훈 실장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몇 시간 전에 주형석 이사님께서. 현우 도련님을 찾으셨습니다. 잠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제게 전언을 부탁하셨습니다.”
“형석 오라버니가?”
“예.”
김태훈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주형석의 이름이 바로 튀어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주영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설마··· 아니겠지.’
최악의 경우.
주형석이 샤오 가문과 관련이 되어 있다면. 이대로 현우를 그와 만나게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현우의 생각은 그녀와 달랐다.
“지금 바로 가면 되나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시원한 태도에 오히려 주영미가 당황했다.
“하지만 현우야······.”
“이미 알고 있어요. 어떤 의도로 만나자고 한지 모르는 이상. 가급적 피하는 편이 안전하겠죠.”
“알고 있으면서 가겠다는 거니?”
“네.”
저쪽에서 요청한 만남이다.
만약 주형석이 천무그룹 내부의 배신자가 맞다고 해도. 주양태 회장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당장 손을 쓸 수 있는 일은 한정된다.
‘직접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해야겠어.’
단서는 손에 들어왔다.
지금은 탐색전보다는 직접 부딪힘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을 것이다.
“설마 그럴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본가에 안 계신 만큼.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 할 수도 있단다.”
“그럴지도 모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부딪힐 생각은 없지만.
대놓고 물어보지 않는다고 해도.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면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현우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주형석은 아쉽게도 부재중이었다.
대신······.
“무슨 볼일이지?”
데뷔전에서 한 번 봤던 얼굴.
주형석의 막내아들 주영우가 고까운 얼굴로 현우를 맞이해주었다.
“아버지께선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
쯧, 하고 주영우는 혀를 찼다.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현우의 방문이 썩 마음에 들진 않는 모양이었다.
“아쉽겠지만 오늘은 돌아가는 편이 좋아. 다음부터는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찾아오는 것을 추천하고 싶군. 아버지께선 네 생각만큼 한가한 분이 아니시다.”
“그럼 뭐, 나는 한가해 보이냐?”
현우가 눈을 부라렸다.
“건방진 말투로군.”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다고 보는데.”
“사실을 그대로 나열했을 뿐이다. 그걸 시비로 생각했다면, 그건 네 성격이 모난 탓이겠지.”
“모난 성격 맛 좀 볼래?”
비죽 웃으며 다가오는 현우.
“음, 크흠···.”
주영우는 짐짓 헛기침을 했다.
살짝 쫄기는 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지. 여기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 말이 그렇다는 소리지. 아무리 우리가 같은 혈족이라도. 아버지는 네게 웃어른이시다. 대뜸 방문하지 말고 예의를 지켜 약속을 잡고 찾아오란 이야기였다.”
“나도 알아서 웃어른 대접은 잘하니까. 네가 걱정해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이 앞으로 어른에 대한 공경이. 배신자에 대한 공격으로 바뀌지 않길 바랄 뿐이다.
주형석이 정말 배신자로 드러날 경우.
당장 천무그룹에 있어선 손실이 아니라곤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현우는 짐짓 팔짱을 끼며 말했다.
“먼저 만나고 싶다고 한 건. 내가 아니라 작은아버지였다고. 김태훈 실장님 통해서 내게 전언을 남기셨던데.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지?”
“···아버지께서 너를?”
“그래.”
주영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잠시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그는 휘휘 고개를 저어버렸다. 요상한 행동이었지만, 현우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냐?”
“아니다.”
“있는 것 같은데.”
“···아니라면 아닌 거다.”
더 캐물어 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주영우가 흠칫 놀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버지!”
그의 외침에 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그곳에 주형석이 서 있었다.
천무그룹 본가의 혈족 중에서도. 가장 큰 덩치를 지녀 마치 곰 같은 인상을 주는 사내. 그가 성큼 걸어 현우의 앞까지 왔다.
“······주현우.”
눈이 마주쳤다.
마나를 운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그의 풍채와 분위기에선 주양태 회장의 것처럼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하, 녀석! 오랜만이구나!”
주형석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반가운 표정으로 현우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