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54
54화 시베리아(2)
“한국으로 돌아가라니.”
뜬금 없는 소리였다.
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피아의 입에서 대뜸 튀어나온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다 할 설명 없이 현우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 다시 입을 연 쪽은 현우였다.
“···야밤에 심심해서 저랑 농담 따먹기나 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굳이 여기까지 사람을 불러다 놓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이유가 뭡니까?”
대충 짐작이 가는 이유야 있다.
하지만 현우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사실, 꽤 진심이 담긴 질문이기도 했다. 정황상 이번 던전 공략 제의는 로마노프 가문이 파놓은 함정일 게 분명한데.
그걸 로마노프 가문의 일원.
그것도 본가의 피를 이은 소피아. 그녀가 직접 현우에게 함정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려 든다니. 그건 어떻게 생각해봐도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가능성은 둘 중에 하나.’
소피아 미하일로브나 로마노바.
그녀가 로마노프 가문을 내부에서 배신해야 할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이런 상황마저도 로마노프 가문이 치밀하게 미리 준비해놓은 함정이거나.
일단 후자라는 의심을 지우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지금 당장은 로마노프 가문이 저런 수를 취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일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전자라는 소린데.’
현우의 머릿속에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본래 미래대로라면 로마노프 가문은 카일리 가문과 함께 얼어붙은 요툰헤임 던전을 공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카일리 가문의 정예 공략팀은 전멸한다. 하지만 던전에 진입하고 돌아오지 못했던 것은 카일리 가문의 정예 공략팀뿐이 아니었다.
‘로마노프 가문의 공략팀 역시.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던전에서 귀환하지 못했다는 정보가 있었지.’
그냥 로마노프 가문의 변명으로 치부하고 무시했던 정보였는데.
소피아 덕분에 현우는 후순위로 밀어두었던 한 가지 가능성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보낸 공략팀 역시, 이번 사건의 희생양일 가능성 말이다.
“죄송하지만···.”
침묵을 고수하던 소피아의 입이 열렸다.
“이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가문 내부의 일이라서입니까?”
“예.”
고개를 끄덕이는 소피아.
가문 내부의 일이라면 외인에게 발설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모두 듣지 않아도 상관 없다.
적당히 상황을 유추할 만한 정보만 있어도.
현우가 가진 미래에 대한 기억과 연결시켜 그리 어렵지 않게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 테니까.
“이유도 모른 채 여기까지 와서 한국으로 돌아가란 겁니까. 외부에 알려진다면 천무그룹이 겁을 먹었다고 비웃음을 사겠군요.”
“제 말을 믿지 않으신다면. 주현우 님과 공략팀 분들에겐 최악의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최악의 일이 뭔지는 뻔했다.
로마노프 가문의 함정에 말려들어. 현우를 비롯한 공략팀 전원이 사망하는 경우를 말하는 거겠지.
‘이유가 뭔지 알아내야겠어.’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전생에서 놓쳤던 중요한 정보가 손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상황을 아주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을 거란 직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최악의 일이라면?”
“던전 공략에 실패하고 전원 사망하는 경우를 말씀드린 겁니다. 주현우 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대답은 아니었다.
“던전 공략을 포기할만한 구체적인 이유를 말씀해달란 겁니다.”
함정이란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고. 결국 현우가 듣고 싶은 답은 그녀가 이렇게 행동하는 근본적인 이유였으니까.
“애초에 저희 쪽에 제안을 넣은 것은 로마노프 가문이었을 텐데. 어째서 돌아가라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조용히 읊조리는 소피아.
그녀는 현우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믿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 전까지. 그녀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현우는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짜고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자세한 이유는 알려줄 수 없다. 솔직히 본인이 생각해도 상황이나 하는 말이나. 제 입장에선 신뢰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건···.”
소피아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녀 역시도 굉장히 억지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입에서 나온 말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우는 그녀를 조금만 더 압박해보기로 했다.
“툭 까놓고 말해서. 차라리 이 야밤에 기습이나 암살을 하러 왔다는 편이 더 말이 되는 것 같은데.”
“···그런 건 아닙니다.”
“뭐, 아니라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그, 그건···.”
소피아의 입에서 재차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너무나 이상한 상황이라는 것쯤은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신뢰도 없고 증거도 없는데. 제가 어떻게 소피아 님의 말씀을 믿겠습니까.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시죠.”
손을 휘휘 내저은 현우.
그러나 이야기를 정말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아직까진 추측에 불과하지만. 소피아에겐 천무그룹의 공략팀이 던전에 진입하는 것을 막아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일리 가문과 함께 공략에 나섰던.
전생의 소피아는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현우의 행보가. 로마노프 가문 내부에도 뭔가 나비효과를 일으켰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소피아 님의 태도를 봐서. 제가 이해할만한 사정을 이야기하시면 생각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충 압박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이제는 그녀의 입에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오도록 슬슬 구슬려볼 차례였다. 나름대로 채찍과 당근이라고 해야 할까.
“···절대로 거짓은 아닙니다.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소피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직 압박이 조금 부족한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오신 분이 하는 말이라. 아무래도 쉽게 믿을 수가 없군요. 명예를 건다고 해도 제가 소피아 님이랑 관계가 깊은 것도 아니고요. ”
현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솔직히 명예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고작 그런 말을 들었다고 여기서 돌아간다면. 천무그룹의 명예와 위신이 땅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소피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뭐를 알겠다는 건지. 현우가 의아함에 눈을 가늘게 뜨는 찰나였다. 그녀가 자신의 오른팔을 불쑥 현우를 향해 내밀었다.
공격은 아니었다.
“정말로 진심이 담긴 증명을 원하신다면. 여기서 주현우 님께 제 오른팔을 바치겠습니다. 이 정도면 제 진심이 충분히 전해지겠습니까?”
“아니···.”
남의 오른팔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줘도 필요 없는 물건이다. 팔을 물건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우가 거절 의사를 밝히려는 찰나···.
그녀는 현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팔목을 부여잡은 소피아. 쩌적─ 하는 투박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오른팔 위로 하얀 서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로마노프 가문 특유의 냉기가 섞인 마나.
그걸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현우의 입이 저도 모르게 반쯤 벌어졌다. 실력이 놀라워서는 아니었다.
소피아, 그녀가 지금 제 팔을 스스로 얼려 부수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친년인가?’
만약 이대로 몇 초만 더 지난다면 오른팔을 잃을 것이 분명한 상황. 현우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믿어주시겠습니까?”
믿고 나발이고.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
“만약 제가 안 믿겠다고 우기면. 그땐 정말로 자기 팔을 작살낼 생각 아닙니까. 그랬다간 서로 곤란해지기만 할 테니. 믿어 드릴 수 밖에요.”
로마노프 가문의 사람들은 대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냉정하고 이성적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째 이 소피아라는 여성은 로마노프 가문 사람답지 않게. 무대뽀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부 믿겠다는 건 아닙니다. 소피아 님에게 적의나 악의가 없다는 것만 믿겠단 이야깁니다.”
현우는 그녀의 팔을 잡은 채로.
서서히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온후한 열기가 손에서 팔로 전해졌다.
그녀의 팔을 뒤덮었던 서리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녹아 사라졌다. 창천신공의 응용을 통해 피부와 근육을 침범한 한기를 몰아낸 것이었다.
“···!”
그녀는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세히 따지고 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만일 물어봤다고 해도 얼버무렸겠지만 말이다.
물론, 호의로 행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여기서 로마노프 가문의 혈족이 상처를 입는다면. 조금만 생각해봐도 용의 선상에 오를 인원은 저와 저의 공략팀 아니겠습니까.”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다음부턴 생각하고 행동하시죠.”
툭, 내뱉고 현우는 방 한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의자에 털썩 앉은 현우는 까딱 소피아를 향해 고갯짓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아무래도 그녀의 입에서 원하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선. 조금 더 느긋하게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어 보였다.
***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죠.”
현우는 뒷목을 긁으며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제 경고를 무시하시겠단 말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바로 고개를 저었다.
결론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일단 현우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는 확실하게 있었다.
“이번에 로마노프 가문의 요청에 응한 것은 저도 이 던전을 공략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던전 자체가 함정이라도 말입니까?”
“예.”
이미 함정이라는 것은 알고 왔다.
그걸 밝히면 이야기가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현우는 아예 직설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아까처럼 탐색전을 하려고 들었다간.
이번엔 정말로 소피아의 왼팔이 떨어져 나가게 될지도 모를 테니까.
“그러니 그냥 자세하게 설명해주시죠. 로마노프 가문에서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겁니까.”
“이미 말씀드렸지만···.”
“어차피 소피아 님도 저희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적어도 제가 그 이유라도 알면, 원치 않는 결과를 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현우의 말에 소피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상당히 곤란한 표정이었다.
일단 현우와 공략팀이 엄한 일을 당하는 것은 원치 않으나. 무조건적인 아군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
소피아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무런 정보 없이 설득만 하려는 태도는 이제 포기하려는 모양이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로마노프 가문은 던전 내의 환경과 마족을 인위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저도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아마 그걸 이용한 함정을 준비해 두었을 겁니다.”
“···던전에 함정이라.”
놀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던전 내의 환경까진 모르겠지만···.’
마족을 인위적으로 다루는 방법은 몇 가지 알고 있다. 단순히 조련 관련 스킬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경우엔 블랙 가문이 관여하고 있는 게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로마노프의 공략팀 중.
블랙 가문 쪽과 관련이 있는 헌터가 있을 것이다. 녀석을 찾아낸다면 함정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얼어붙은 요툰헤임 던전에서 벌어진 사건만을 알고 있던 현우에겐. 상당히 유용하고 값어치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로마노프 가문이 굳이 이런 함정을 판 이유가 뭡니까. 그러니까 저를 은밀하게 슥삭─ 하고 싶었다면 방법이야 많을 텐데요.”
“현재 로마노프 가문 내에서 주현우 님을 주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건 비단 주현우 님 뿐만 아니라. 샤오 가문을 멸문시킨 천무그룹을 본격적으로 견제하는 움직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견제의 시작이 현우란 소리.
샤오 가문에서 한 번 시선을 끌었으니.
될성부른 싹부터 밟고 들어가겠다. 뭐, 그런 생각으로 준비한 계획이라고 보면 되겠지.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
“소피아 님께서는 왜 저한테 이런 정보를 넘겨주신 겁니까. 던전에서 천무그룹의 공략팀을 은밀히 살해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일 텐데요.”
“가문 내부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여기선 본가에는 크게 세 개의 파벌이 있다는 것까지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개의 파벌.
각 파벌이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결국, 가장 세력이 크고 가문을 이끌어가는 파벌은 인류를 배신하는 쪽이겠지.
“기왕 말씀해주신 김에 다 해주시지.”
“주현우 님께서 저를 믿지 않으셨던 것처럼. 저라고 해서 주현우 님을 인간적으로 완벽히 신뢰하는 것은 아닙니다.”
“뭐, 그런 거라면 알겠습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현우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녀의 말은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결국 소피아 역시, 현우가 던전에서 안 좋은 일을 당할 경우. 무언가 손해를 보는 파벌 쪽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은밀하게 밤에 찾아온 것을 보면.
로마노프 가문의 공략팀이 어느 쪽의 파벌로 치우쳐 있는 지도 명백했고 말이다.
“함정이라는 건 이해했습니다.”
“그럼···.”
“하지만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소피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현우에게 있어서는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로마노프의 계획이 고작 이런 거였다면.’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던전 내부의 환경은 가비야의 불꽃 깃털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고. 마족을 인위적으로 다루는 기술에 대한 대응법은 몇 가지 알고 있는 게 있었으니.
“···함정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으시겠단 말입니까?”
“물론, 그 함정에 걸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함정이 있는 걸 알았으니. 이젠 방법을 찾아서 돌파해야죠.”
방법은···.
이미 나와 있었다.
‘던전 공략은 당연히 성공할 거고.’
잘하면 여기서부터.
로마노프 가문 자체를 뒤집어버리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