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78
78화 가문연합(1)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도시 외곽의 거대한 자작나무 숲에 세워진 로마노프의 본가 저택.
“역시, 배신자 알렉세이는···.”
소피아 미하일로브나 로마노바.
그녀는 약간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베헤모스로 발생될 뻔한 대재앙은 다행히 막아냈지만. 처음 목표였던 배신자 알렉세이는 놓치고 말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소피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만약 철저한 대비를 했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자마자 도망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용의주도하게 도주를 계획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주현우님의 선구안 덕분에 베헤모스를 토벌할 수 있었습니다. 백 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거래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입니다.”
전부 신물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을 뿐.
진심으로 로마노프 가문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있어서 뛰어든 일은 아니었다.
결과야 이렇게 되었지만.
여기서 알렉세이를 추적하고 끝장내기 위해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녀석은 로마노프 가문의 문제다.
‘물론, 놈을 확실히 끝내는 편이 나한테도 좋겠지만.’
우선순위가 높진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천무그룹 본가로 돌아가. 이번에 손에 넣은 신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다.
“주현우님.”
“예.”
“한 가지 제안···.”
소피아는 말끝을 흐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뭡니까?”
“지금 로마노프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소피아는 진지한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무게가 무거워지려는 모양이었다. 현우는 쓰읍 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주현우님 덕분에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었지만. 알렉세이는 한 번의 실패로 포기할 남자가 아닙니다.”
아마 그렇겠지.
그 자리에서 도망친 것을 보면. 아마 머지않아서 다시 로마노프를 집어삼킬 준비를 해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더라도 계획에 훼방을 놓은 현우에게. 먼저 손을 쓰려고 시도할 가능성도 아예 없다곤 하기 어렵겠지.
그게 가능할 지는 둘째 치더라도.
아무튼 알렉세이라는 화근을 제대로 처리해서 나쁠 것은 없으리라.
“당분간 천무그룹의 산하로 들어가는 조건이라도 좋습니다. 배신자 알렉세이를 처단할 때까지만 저희에게 힘을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소피아의 제안은 꽤 괜찮았다.
로마노프를 산하로 넣을 기회.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쁘지 않을 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분명 남은 여섯 대형 가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힘의 균형은 완벽하게 무너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교황청 측에서 움직이겠지.
이건 아직 현우 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로마노프를 산하로 덜컥 받아들이기도 애매했다.
지금의 로마노프는···.
솔직히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대가 없는 도움은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소피아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이번 베헤모스 공략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이미 나름대로 계산을 끝냈다.
‘이후 가문 간의 경쟁구도는 천무그룹과 록펠러, 그리고 블랙 가문의 삼파전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
적어도 동아시아의 흐름은 천무그룹을 중심으로 흘러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선두엔 주현우가 서 있을 것이다.
록펠러는 멀고 블랙은 적이다.
그녀가 손을 뻗을 수 있는 상대는 아쉽지만 주현우와 천무그룹 뿐이었다. 설령 그 동아줄이 목을 죄게 되더라도. 당장 흔들리는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주현우님이 원하신다면. 천무그룹의 러시아 진출도 어렵지 않을 겁니다. 로마노프가 그 교두보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입니다만···.”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고. 천무그룹을 중심으로 각종 세력을 결집시킬 보다 확실하고 깔끔한 방법.
“제게 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
이틀 후.
“우리 비행기는?”
노보시비르스크 공항.
텅 빈 활주로를 두리번거리며. 주건우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 올 때는 타고 왔던 천무그룹의 전용기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돌아갈 때는 이걸 이용할 거야.”
워프 게이트도 비행기도 아닌.
이번에 손에 넣은 비공정 페일 라이더.
“그건··· 열쇠 아냐?”
“지금은 그냥 열쇠지.”
현우는 주건우의 물음에 픽 웃으며 몽환의 열쇠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미세한 입자가 되어 흩어진 열쇠.
미약한 바람과 함께. 허공으로 떠오른 황금빛 모래알이 번쩍이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일그러진 공간 너머에서 창백한 푸른 몸채를 가진. 고래와 흡사한 형태의 비공정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페일 라이더.
전장 70m에 달하는 거대한 비공정.
구세계의 함선이나 잠수함 등에 비하면 비교적 작은 크기지만. 그 위력과 가치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전생에 봤던 것과는 좀 다르군.’
블랙 가문이 운용하던 페일 라이더.
고래 형태 자체는 비슷했지만.
기억 속의 페일 라이더는 외관부터 기괴하게 뒤틀려. 흡사 날아다니는 살덩이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페일 라이더는 기억속의 모습과 다르게. 끔찍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은은하고 창백한 외관 덕분인지.
오히려 묘하게 차분하고 성스러운 느낌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오오···!”
박광철이 눈을 빛냈다.
눈앞의 페일 라이더는 전 세계에서도 몇 개 존재하지 않는 비공정 형태의 아티팩트. 그걸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록펠러 가문의 탕그리스니르(Tanngrisnir)와 탕그뇨스트(Tanngnjótr)라는 이름을 가진 쌍둥이 공중전함. 그리고 교황청에서 운용하는 메르카바(Merkabah)를 포함.
존재가 확실하게 확인된 비공정 형태의 아티팩트는 세계에 여섯 대 정도뿐이다.
마도공학의 기술로 만들어낸 복제품도 몇 기정도 있지만. 게이트나 던전의 최초 공략 보상으로 드롭된 진품에 비하면 한 없이 초라한 물건들이었다.
“진짜 비공정이라니···.”
박광철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장인의 탐구심과 호기심이 가슴 속에서 마구마구 샘솟는 것만 같았다.
“으흐흐!”
그는 곧 히죽 웃으며 현우를 봤다.
“용산에서 우리 도련님을 만난 것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던 것 같수다. 아주 뽀뽀라도 한 방 진하게 해주고 싶구만!”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현우는 질색하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만약 미인이었다면 굳이 거절하진 않았겠지만. 저렇게 수염이 듬성한 아저씨에게 뽀뽀를 받는 일은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럼 타죠.”
─쉬이익
페일 라이더의 탑승구가 열렸다.
현우가 앞장서서 선내로 들어갔고.
이어 박광철과 주건우. 그리고 류한나 순으로 탑승을 마쳤다. 그 뒤 자동으로 문이 닫혔고···.
[전원 탑승을 환영합니다.]선채 내부에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헉!”
주건우가 지레 숨을 삼켰다.
무슨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녀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바, 방금 들었어?”
“아마 비공정의 인공지능일 거요. 예전에 아버지께도 록펠러 가문에서 운용하는 쌍둥이 전함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구만.”
박광철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인공지능이라.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전생에서 현우는 페일 라이더에 탑승해본 적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페일 라이더는 그저 서울 상공을 봉쇄하고 있던 적의 요새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몽환의 열쇠 사용자의 마나 확인. 주현우님을 본 기체 ‘페일 라이더’의 최초 소유자로 등록하겠습니다.]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광철은 작게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 주변을 살폈다.
“자동으로 소유자를 등록하는 건가? 이런 인공지능이 탑재된 아티팩트는 난생 처음이군. 돌아가서 자세하게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오류. 정정.]박광철의 말을 뚝 끊어내며.
목소리가 선내에 울려 퍼졌다.
그때 눈앞에 무언가 나타났다.
검은 구체의 형태를 띈 존재. 현우는 그게 바로 지금까지 선내에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임을 단번에 확신할 수 있었다.
“와악!”
주건우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마족을 몇 번이나 상대해본 녀석이 고작 이런 일에 겁을 먹다니. 현우는 주건우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기존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인사법 발견. 즉시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겠습니다.]“이, 인사가 아니라 놀란 거야!”
[인사법이 아니라면 정정하겠습니다. 제 존재로 인해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의도치 않은 사건이었습니다.]언뜻 보았을 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실체가 없는 반투명한 홀로그램 같은 존재였다.
[저는 타나토스.]빙글.
검은 홀로그램이 허공에서 한 바퀴 공중재비를 돌았다.
[본 기체 페일 라이더의 운용 전반을 담당하고 있는 인공의식입니다.]“인공의식?”
“뭘 할 수 있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페일 라이더의 운용 전반을 담당해드릴 겁니다. 기본적인 항행은 물론이고. 전투나 탐색에도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탐색이라.
게이트나 던전 내부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확실히 유용한 기능일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페일 라이더처럼 거대한 비공정을 게이트나 던전 내부에서 소환할 수 있다고 해도. 크기 때문에 운용에 상당한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일까.
[만일 페일 라이더에 탑승 중이 아니실 때에도. 주인님의 주변 환경 분석과 데이터 취합. 혹은 전투의 보조 등의 직무는 충분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괜한 걱정이었다.
역시 신물이란 이름에 걸맞게. 상황과 조건을 가리지 않고. 쓸만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쓸만하겠네.”
[칭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타나토스 혹은 타냐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효율적이고 정감이 붙은 후자를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기계가 정감도 따져?”
주건우가 중얼거렸다.
검은 구체 형상 위로 노란 빛이 번쩍이더니. 한 쌍의 눈이 되어 주건우를 빤히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는 기계가 아닌 인공의식입니다.]“잡담은 거기까지 하고.”
현우는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소피아가 뜻밖의 제안을 던진 덕분에 본가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늘어났으니. 빨리 돌아가 처리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슬슬 돌아가자.”
[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천무그룹 본가.”
[마스터의 의사에 따라 최적 경로를 설정합니다. 최단 경로 설정 완료. 도착까지 예상 소요 시간은 30분. 탑승자 전원 편안한 비행되시길 바랍니다.]구우우웅!
페일 라이더가 공중으로 떠올라.
빠른 속도로 운항을 시작했다.
***
천무그룹 본가 앞.
고즈넉한 한국식 저택엔 어울리지 않는, 창백한 고래 형태의 비공정이 서서히 지면을 향해 착륙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리고 곧 비행기나 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지면에 안착한 페일 라이더.
‘또 엄청난 것을 들고 왔어.’
천무그룹의 이사 주영미.
그녀는 천무그룹 본가 저택 앞에 착륙한 비공정. 페일 라이더에서 내리는 현우와 자신의 아들 주건우를 보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하! 비공정이라니!”
주양태 회장.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현우를 맞이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요즘 들어 웃음이 참 많아진 것 같았다.
“이게 아르카임의 공략 보상이더냐?”
“정확히는 베헤모스라는 마족을 토벌하고 손에 넣은 물건입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어떤 마족보다 거대한 녀석이었죠.”
“거대한 마족이라···!”
주양태 회장이 유쾌하게 웃었다.
“신기전 같은 구식 마도공학 화포를 대체 어디에 사용하려나 했더니. 거대한 마족을 상대하기 위함이었을 줄이야. 그 광경을 내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게 아쉽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금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네 성격에 비공정만 가져온 건 아니겠지. 이 할애비가 놀랄 만한 이야기가 아직 남았을 것 같은데.”
아주 예리했다.
현우는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준비해둔 이야기를 꺼냈다.
“로마노프에서 재밌는 제안을 하더군요.”
소피아와 나누었던 대화.
그걸 빠짐없이 전해들은 주양태 회장은 그리 흥미가 없다는 듯.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흠, 아쉬운 소리를 할 때가 된 모양이군. 이제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을 우리 천무그룹의 발밑에 고스란히 바친다 해도. 그리 매력적인 제안은 아닐 게다.”
“그래서 다른 제안을 던지고 왔습니다.”
“다른 제안이라?”
이건 아무리 주양태 회장이라 해도.
솔깃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젠 기존의 가문 회의가 아니라. 천무그룹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가문 연합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가문 연합.”
주양태 회장의 눈빛에 흥미로운 기색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