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87
87화 세 마리 토끼(3)
“페, 페이스 체인저가···.”
일격에 당했다.
아니, 저걸 당했다는 단어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알렉세이 로마노프는 경악에 찬 눈으로 그의 시신을 바라봤다.
“···하나는 끝났고.”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알렉세이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화룡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페이스 체인저를 고작 일격에 숯덩이로 만들었다니.’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천무그룹의 잠룡이라더니.
이건 아무리 봐도 별호가 과소평가 된 것이 분명했다. 이건 잠룡이 아니라 괴물 주양태 회장을 잇는 새로운 괴물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으리라.
‘심지어 그만한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지친 기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나의 흐름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알렉세이는 지금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주현우는 상식의 틀에서 판단해선 안 되는 존재였다.
희망이 없다.
“으으···.”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알렉세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가 부득부득 갈렸지만, 다시 덤벼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페이스 체인저와 같은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빌어먹을!’
여기서 간신히 도망친다고 해도.
더 이상 그를 따르는 추종자도 없으니.
가주 복권 또한 앞으로는 꿈도 꿀 수 없으리라. 그가 꿈꾸던 목표는 한 순간에 모두 무너졌다.
주현우.
불과 얼마 전까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녀석의 등장으로 인해. 몇 십 년에 걸쳐 쌓은 그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대체···!”
그는 으득, 이를 갈았다.
분노를 넘어 억울할 지경이었다.
아니, 솔직히 억울했다.
그는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주현우를 노린 적은 없었다. 단지 몇 번 그의 계획에 주현우가 일방적으로 스치듯 나타났을 뿐.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건가!”
급작스레 울분을 토하는 알렉세이.
현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애초에 현우에게 먼저 얽혀온 것은 다름 아닌 녀석이었다.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나는 억울하다···!”
그는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내가 지금껏 일궈온 모든 것이. 주현우 네놈 하나 때문에 무너졌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나를 이렇게 못살게 괴롭히는 거냔 말이다!”
“허, 어이가 없군.”
현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정말 간단했다.
“그냥 네가···.”
알렉세이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없다.
다만 녀석은 안타깝게도 현우의 적인 블랙 가문과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있었을 뿐이지.”
그저 걸림돌.
아니, 그 마저도 아닌 돌부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네 하소연을 들어줄 만큼. 나는 한가하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잠깐!”
알렉세이가 고함을 쳤다.
설마 숨겨둔 비장의 수라도 있는 건가.
현우는 만일의 경우를 경계하며.
녀석을 향해 치켜들었던 주먹을 잠시 내려놓았다.
“하, 한 명!”
알렉세이가 검지를 치켜들었다.
녀석이 숨겨두었던 비장의 수는···.
아무래도 목숨 구걸인 모양이었다.
“한 명은 살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확실히 그런 말을 하긴 했지.”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말을 철저히 지킬 필요는 없다.
만약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알렉세이 로마노프의 목숨을 거두어도. 현우에겐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다행히 알렉세이는 이용가치가 있다.
그리고 녀석의 입에서 유용한 정보가 나오도록 만드는 것은, 현우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전에···.”
화근을 남겨둘 생각은 없다.
현우는 성큼 걸어 알렉세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녀석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무, 뭘 하는 거냐!”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주겠는데. 너는 포로가 아니라 전리품이다. 그러니 ‘죽진 않을 거’라는 이야기지.”
죽이지만 않겠다.
물건처럼 취급해주겠단 소리였다.
어차피 여기서 알렉세이를 생포해봐야. 블랙 가문과 인질 협상을 벌일 것도 아니다. 현우와 천무그룹에게 있어, 녀석의 이용 가치는 입만 멀쩡하면 그대로다.
그건 다시 말해···.
입을 제외하면 다른 어느 부위도 멀쩡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더구나 본가로 압송하는 동안.
녀석이 얌전히 끌려갈 거란 보장도 없기에. 이곳에서 위험 요소는 완벽하게 제거한 후에 생포하는 편이 안전하겠지.
‘방법은 간단하다.’
병신으로 만든다.
현우는 재빨리 놈의 마혈(麻穴)을 짚어 움직임을 마비시킨 후.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관절을 모두 부러뜨렸다.
“끄으으읍!”
고통에 찬 비명.
그러나 이건 사전 작업이었을 뿐.
현우는 녀석의 심장부근에 손을 올렸다.
놈이 그 손길을 뿌리치려 그나마 움직이는 목을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고작 그것만으론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으, 으으··· 끄아악!”
전신의 기혈이 불타는 고통.
그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현우가 발한 우레불꽃으로 인해. 그의 기혈이 불타는 감각이 맞았다.
순식간에 팔다리는 물론이고.
평생에 걸쳐 수련한 코어까지 박살난 알렉세이 로마노프. 그는 이내 눈을 까뒤집고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천무그룹 본가에서 천천히 나눠보자고.”
녀석의 입에선 들을 이야기가 많았다.
***
“이쪽은 전부 정리됐어요.”
이와카미 미코.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알렉세이가 거느리고 있던 추종자 중. 페일 라이더의 포격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제압되어 바닥과 입맞춤을 하는 중이었다.
“전부 죽이지 않은 겁니까?”
“살려두어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이 녀석들이 일본에 밀입국한 루트. 그리고 이곳에서 무엇을 꾸미고 있었는지. 낱낱이 밝혀낼 생각이에요.”
서늘한 눈빛으로 추종자들을 노려보는 이와카미 미코.
그녀의 눈빛을 보아하니.
나머지 추종자들도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페이스 체인저도 살려서 붙잡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건 괘념치 않으셔도 돼요. 이 상황에 저희가 주현우님께 그것까지 바랐다면, 너무 염치없는 부탁이었겠죠.”
이와카미 미코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가문의 배신자를 처리해준 것도 감지덕지일 텐데. 거기에 생포까지 부탁한다면 너무 과한 요구긴 했다.
‘물론, 세계수의 묘목을 손에 넣기 위해선. 그 정도의 고생이라도 무릅써볼만 하겠지만···.’
저쪽이 괜찮다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아무튼··· 역시 주현우님은 대단한 사람이네요. 제가 사람을 보는 눈 하나는 정확했던 것 같군요.”
신뢰가 담긴 눈빛.
나중을 생각한다면 신뢰는 중요한 가치다.
다니엘 블랙의 계획을 저지하고. 녀석을 세계의 공적으로 돌리기 위해선. 세상이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은 증거와 아군이 필요할 테니까.
블랙 가문의 목표.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까지.
‘사실을 말해도 믿기 어렵겠지.’
보통은 헛소리라 치부할 거다.
결국 세상은 이해관계를 통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현우는 신뢰를 기반으로 그 이해관계들을 가능한 촘촘하고 넓게 구축해 놓을 생각이었다.
‘가문 연합이 바로 그 결과다.’
지금까진 일곱 가문으로 대표되던, 헌터 사회에 부상할 새로운 축이자. 전생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블랙 가문에 대항하기 위한 추가적인 전력.
“이걸로 이쪽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네, 세계수의 묘목 말씀이죠.”
“···그리고 거기에 더해. 한 가지 추가로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카미 가문.
그들을 가문 연합에 끼워 넣는다면.
동아시아 전역에 넓게 퍼져 있는 수많은 군소 길드와 가문. 그들을 천무그룹의 이름 아래 하나로 묶는 작업이 훨씬 수월해진다.
“추가 제안이라면···?”
이와카미 미코가 되물었다.
현우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천무그룹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
일본 전역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와카미 가문의 계승제를 앞두고.
교토 근교의 유령마을 오하라가 통째로 증발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마저. 이번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주목은···.
당연하게도 주현우라는 인물에게 쏠렸다.
타국의 위험을 도외시 하지 않고 달려와준 천무그룹의 3세. 그리고 이와카미 가문과 협력하여 오하라의 미등록 헌터를 일소한 주인공.
후쿠오카 구원자.
시민들은 주현우를 그리 부르기 시작했다.
“방위성 소속의 헌터들도 해결하기 어려운 마족 웨이브를 단신으로 정리했다니···.”
“거기에 이와카미 가문까지 주현우의 도움을 받았다던데. 이번 계승제에서 차기 무녀의 호위까지 담당한다더라.”
“한국에도 진정한 의리를 아는 사무라이가 있었군. 솔직히 지금까진 천무그룹을 별로 좋게 보진 않았는데. 이제부턴 생각을 조금 바꿔야겠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페이스 체인저의 신원은 미상으로 남았고. 블랙 가문을 확실하게 이번 사건에 엮지 못했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녀석의 생포에 성공했어도. 금제 때문에 블랙 가문에 대해선 듣지 못했을 거다.’
후환을 남기지 않았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봐야겠지.
그리고 며칠이 지나.
이와카미 가문 내에서 타카유키···.
그러니까 페이스 체인저의 협력자들을 모두 축출한 후.
예정보다 조금 빠르게.
이와카미 가문의 계승제가 시작되었다.
교토 전체는 축제 분위기였으나.
이와카미 가문 내부는 최근 연이은 사건들 때문인지. 꽤나 엄숙한 분위기에서 계승제를 진행했다.
다행히 특별한 일은 없이.
이와카미 하나코가 가문의 새로운 7대 무녀로서 어머니 이와카미 미코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었고.
현우가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다.
“제안에 대해선 조금 생각해보셨습니까.”
“네.”
이와카미 미코.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대략적인 의논은 끝냈어요. 우리 이와카미 가문이 입은 은혜도 있고. 가문 연합에 대해선 긍정적인 대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다행이군요.”
이로서 첫 번째 목표는 달성.
가문 연합에 이와카미를 끌어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난 셈이었다.
“그런데···.”
이와카미 미코.
그녀는 돌연 눈빛을 바꿨다.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연합에도 여러 가지 형식이 있겠지만. 두 가문이 혼례를 통해 맺어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이런 방법은 어떤가요?”
“···혼례 말입니까?”
“마침 이번에 7대 무녀 자리를 계승한 하나코. 그 아이가 주현우님과 비슷한 나이가 아닌가요. 두 사람이라면 부부가 선남선녀로 아주 잘 어울릴 거예요.”
이런 건 생각지 못했는데.
상당히 당혹스러운 제안에 현우는 잠시 머릿속에서 말을 골랐다. 그러나 대답은 결국 정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정말 아쉬운 대답이네요.”
푸욱, 한숨을 쉬는 미코.
“우리 하나코는 주현우님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데···.”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현우는 빙긋 웃어넘겼다.
만약 미코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아직은 그런 쪽에 신경을 쏟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럴 여유 자체가 없기도 했다.
앞으로 최대 10년.
블랙 가문과 악연을 제대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미코가 두 뼘 크기의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한 눈에 보아도 상당히 귀중한 물건.
그 작은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현우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세계수의 묘목.’
현우의 눈이 빛났다.
목함을 받아들고 슬쩍 열어봤다. 역시,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짐작한대로 세계수의 묘목이 확실했다.
다만···.
“반드시 약속한 기한까지는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한이야 조금 넘기셔도 상관없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현우님이니까요.”
양도는 아니고 대여.
이와카미 가문에게 있어 중요한 물건인 만큼.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었지만. 현우로선 아쉬울 것은 없었다.
어차피 던전만 공략하면 그만이니까.
“다만 소중하게만 다뤄주세요. 만약 세계수의 묘목에 문제가 생기면, 그땐 정말 우리 하나코와 혼례를 올리셔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입을 가리고 호호 웃는 미코.
현우는 그녀에게 멋쩍은 미소로 응수했다.
‘이걸로 준비는 완벽하다.’
미공략 던전 ‘세계수의 미궁’.
노르웨이 제2의 도시에 해당하는 베르겐 근처에 위치한 울리케산. 그곳에 위치한 세계수의 미궁은 상당히 독특한 던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70년, 전 세계를 휩쓴 재앙.
‘대전이’의 발생 당일에 아무 예고도 없이 하늘 높이 솟아난 이래. 현존하는 던전 중에선 가장 오랜 기간 존재해왔으나.
아직까지 아무도 공략에 성공하지 못한.
남아 있는 미공략 던전 중에서도 가장 큰 상징성을 지닌 곳이. 바로 이 세계수의 미궁 던전이었다.
‘지금은 토르의 형제단이라는 노르웨이 1위의 대형 길드가. 한창 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을 시기지.’
하지만···.
현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토르의 형제단’ 길드는 실패한다.
2년에 걸친 공략에도 불구.
토르의 형제단은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계속되는 인력의 소모와 자금 문제에 부딪혀 길드 해체 위기를 맞이한다.
결국 토르의 형제단은···.
공들여 확보했던 공략권을 ‘블러드 레이븐즈’ 길드에 넘겼고. 세계수의 미궁은 이들에 의해 최초로 공략된다.
‘나는 토르의 형제단이 왜 거듭해서 공략에 실패하는 건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또한 세계수의 묘목이 있으니.
그들과 같은 실패를 반복할 일도 없다.
이미 다올로스의 피리까지 세 개의 신물이 손 안에 들어왔고. 이제 현우는 명백히 다니엘 블랙보다 앞섰다.
그러나 고작 몇 발자국.
살짝 앞선 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부터는···.
녀석들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초격차를 만들어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