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AW novel - Chapter (1693)
회귀자 사용설명서 1693화
중원무림빙의(98)
“모… 모련아!”
“…….”
“모련아!! 모련아?”
“…….”
“모련아?!”
“…….”
“일어나야지. 모, 모련아!”
모닝콜에 살짝 눈이 떠진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방 안이 눈에 비쳐왔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중, 시비1의 목소리에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좀 늦게 일어났나 보네… 근데 쟤는 왜 안 들어오고 밖에서 저러고 있어? 여기 지 방인데….’
“으응. 나 일어났어. 들어와도 돼. 밖에서 뭐 해?”
“어?! 들어가도 돼?”
“응.”
드르륵. 소리가 들려온 직후에 시비1의 얼굴이 눈에 비쳐왔다.
시비1의 눈빛은 모련이 아니라 꼬마 신랑에게 고정되어 있는 중.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가 진 군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직도 쿨쿨 잠을 자기에 여념이 없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쪽의 목에 양팔을 감고 있었는데, 얼마나 꽉 감고 있는지 녀석의 몸이 딸려 들어올 정도. 나도 오랜만에 정말로 푹 자기는 했지만, 얘는 거의 기절하듯 잠에 빠진 것이다.
시비1이 보기에도 그 모양새가 좀 어처구니없었는지, 크게 한숨을 쉰 이후에는 곧바로 말을 이어왔다.
“왜,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 미안해. 어제 잠을 좀 설쳐서….”
“잠을 설쳐?”
“으응… 얘 때문에… 아무튼 간에 지금 바로 준비할게.”
“아, 아니, 사실 오늘 오전에는 별로 바쁜 일이 없어서… 딱히 그럴 필요는 없지만… 아니, 이럴 게 아니지! 이거 말해주려고 온 거였는데 내 정신 좀 봐!”
“응?”
“큰일났어. 모련아! 큰일났나고!”
“그러니까. 뭐가?”
“교주님께서 지금 궁기장원을 방문하셨대.”
“아… 그… 풀피리 때문에 그러는 거구나? 근데 그게 왜?”
“그게 왜?! 어제 네가 풀피리를 불었다고 했었잖아! 지금 궁기장원이 어떤 줄 알아? 완전히 축제 분위기라고!”
“…….”
“…….”
‘아니, 어제는 숨겨야 된다면서….’
이제야 어젯밤의 그 소동이 풀피리를 분 사람을 벌하기 위해서라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은 모양이다.
정확히 궁기장원이 어떤 상황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올장원에까지 소문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교주가 꽤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이 눈앞의 시비1은 로또 1등 번호가 적혀 있는 용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표정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음모야. 말도 안 되는 사기공작이라고… 진실을 밝혀야 하는 거잖아. 이대로… 이대로 궁기장원에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어.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도올신녀님께 말씀드리러 가자. 모련아. 풀피리를 부른 게 너라는 걸 알려야지.”
‘욕심 한번… 그득그득하자너.’
물론 나 역시 꼬물이의 관심을 궁기신녀가 아니라 내게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바였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며 천천히 움직여야겠다는 기존의 계획이… 희라 누나의 등장으로 인해 어그러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결정하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꼬물이와 접촉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떻게 보면 시비1이 정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도올신녀한테 말하면 뭐 어쩔 거냐고… 교주 얼굴만 봐도 벌벌 떠는 게 이 도올장원인데….’
바람을 후 하고 불면 곧바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장원. 동네 양아치들에게도 공략당할 것 같은 장원이다.
장담하건대 파락호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도올장원은 한 줌의 먼지로 화할 것이 분명했다.
도올신녀 역시 자신의 장원이 커지는 것을 원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괜한 권력구도의 한가운데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냥 딱 이 상태로, 남들의 눈이 닿지 않는 변방에서 자신만의 소중한 왕국을 지키는 면서 안빈낙도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도올신녀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는 이전의 도올제를 망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두 번 다시 교주가 도올제를 찾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니… 뭐 베니고어는 안 그런 척하면서 권력 같은 거에 환장하니까. 얘도 비슷할 가능성은 있지만….’
겁 없는 베니고어 와는 다르게 도올신녀는 겁이 너무나 많은 것이 문제,
어떻게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도올장원과 함께 일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멍청한 짓거리였다.
“아니야. 지금은 굳이… 뭣보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건 신녀님이 원하지 않으실 것 같기도 하고….”
“아… 아니, 그건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하지만… 모련아.”
‘그래, 도올신녀한테는 미안하지만, 아예 다른 쪽으로 붙어야 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패를 생각하면 어디로 붙어야 하는지는 뻔했다.
“…….”
“…….”
심양진가.
뭐 이제는 더 이상 심양진가가 아니었지만, 현 상황에서 모련을 지지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고 하면 진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딱히 신녀전쟁 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현재의 진가가 낙동강 오리 알 신세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들과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겹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선다.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지금 당장 내가 풀피리를 분 사람이라고 해도 믿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만약 믿어준다고 해도 괜히 궁기장원 쪽에서도 밉보일 테니 말이야. 혹시 아니. 어쩌면 나를 죽이려 들 수도 있잖아. 괜히 도올장원까지 위험해지는 셈이라고….”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일단… 정, 정말로 미안한데… 혹시 오늘도 외출 좀 하면 안 될까? 뭐 밖에 나갈 일 있어?”
“뭐어?!”
“자꾸 이상한 부탁해서 미안해. 그, 그런데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모련이 너 좀… 요즘 이상해진 것 같아… 후우….”
“이 은혜는 나중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갚을게. 그러니까 부탁해.”
‘오네가이!’
어울리지 않게 부탁과 사죄의 합장까지 장착한 것은 당연지사. 왜인지 모르게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자세, 지구에서도 항상 이 자세에 무너졌다는 것을 과거의 이기영은 기억하고 있다.
솔직히 조금은 반신반의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몰아쉬는 시비1의 얼굴을 본 이후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되자너. 대단하자너 사죄의 합장.’
“뭐… 너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근데, 혹시 어디로 가려고?”
“진가.”
“뭐… 뭐… 뭐?”
“그러니까. 괜찮으면 적당한 이유를 붙여줘. 신녀님이 진가 쪽에 선물을 보낸다고 하는 핑계 같은 거면 더 좋고.”
“어? 어….”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꼬마 진 군사를 한쪽에 내려놓은 이후에, 대충 밖에 나갈 준비를 시작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괜찮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갖 신경과 이목이 궁기장원에 몰려 있을 테니 말이다.
시비 하나가 꼬맹이 하나와 함께 진가로 향하는 걸 신경 쓰는 놈들이 있을 리가 없겠지.
‘그 와중에… 이 새끼는 도대체 언제까지 자려고 그러는 거야? 진짜 지금까지 한숨도 잔 적 없어?’
한숨을 쉬는 사이에 후다닥 밖에 나간 시비1은 고급스러운 천에 쌓여진 작은 목함을 건넨다. “무슨 일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하고 와야 돼!”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진 군사를 등에 업고 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언뜻 보면 모든 일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한 가지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이 존재했다.
‘아니… 시바….’
생각보다 진가가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천마신교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도시였던 지라 더욱더 그랬다.
말이나 마차를 지원받을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모련의 신분으로 그게 가능할 리 만무, 등에 업혀 있는 녀석을 깨워 경공으로 날아갈까 하는 생각도 무위로 돌아간다. 꼬마 진 군사에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몇 킬로를 걸은 거지?’
심지어 걸어도 걸어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중,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따라오는 이가 없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모든 이목이 궁기신녀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현시점에서는 암살자도, 추적자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게 아직도 진 군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고난의 행군이 계속된 지 두 시간째,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진가를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꽤나 으리으리한 장원이 눈에 보였지만….
‘전부 허상이지. 저런 건.’
그래. 전부 허상이었다.
장원의 크기가 세를 알려주는 가장 큰 지표이기도 했지만, 12차원의 부동산 시장에서도 결코 입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물어져 가는 도올 장원에서 걸어서 두 시간 거리에 자리했다는 것만으로도 진가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다.
보는 눈이 있으니 큰 장원을 선물로 지어줬지만, 변방에서 쭈그려 앉아 있으라는 의미.
‘나 같으면 시바 반란을 일으켜도 세 번은 일으켰겠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교주 직위에 오르게 한 충성스러운 가문을 이렇게 홀대한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기사람을 무조건 챙겨야 되는 거예요. 얘네들이 지금은 복수에 눈 돌아가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나중 되거나 수틀리면 가만히 있겠냐고요. 아이고… 꼬물아… 좀 정치를 대국적으로 해야지….’
독이 바짝 오른 것이 문지기에게서도 느껴진다. 매일매일 웃고 있는 모습을 선보이고 있는 도올장원 문지기들과는 다르게 얘네는 시바 대놓고 기세를 흩뿌리고 있었다. 말을 걸기가 다 겁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무슨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덩치 큰 문지기마저도 자안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 직계와는 다르게 무척 흐릿한 자안이라 자세히 보아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자안은 자안이었다.
“도올신녀님께서 진가주님께 긴히 보내주실 것이 있다고 하여 찾아왔어요. 꼭 직접 전해 드리라 한 물건인지라… 괜찮으시다면….”
“진가는 현재 손님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돌아가 주십시오.”
“저, 선, 선물이라도… 전해드리고….”
“가지고 돌아가 주십시오.”
“이야기만이라도….”
“가지고. 돌아가. 주십시오.”
‘와… 너희 확실하구나?’
도올장원을 무시하기 때문에 모련이를 이리 홀대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궁기신녀쪽의 시비가 방문했어도 같은 스탠스로 그들을 대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쪽이든 간에 교내의 정치와 엮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단호히 하고 있는 것이다.
‘세력을 키울 생각이 없나 본데? 그냥 진짜 복수만 하면 되는 거야?’
당연히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 장원을 넘을 수 없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던 시점.
‘그래. 시간 끌어서 뭐 하겠어.’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었지만….
크게 숨을 내쉰 이후, 비장한 표정으로 꼬마 신랑의 앞머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들여보내 주세요.”
“더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러나 주십시오.”
“제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뵙기 위해서 왔으니….”
“…….”
“…….”
“…….”
이제 막 잠에서 깬 꼬마 신랑의 자안을 바라보고 있는 문지기들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