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75
275화 판데모니움(1)
“새끼. 어차피 협조할 거면서 뻗대고 그래? 시간만 아깝게스리.”
대인은 손을 탈탈 털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30대 후반 가량으로 보이는 사내가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끄르륵···.”
필립.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힌 사내의 이름이었다.
그는 판데모니움 조직의 중간 관리직이자, 인신매매와 상품 관리가 주요 업무였다.
업무 때문에 그는 조직 외부와 내부를 자주 오가는 편이었다.
길 안내자가 필요한 대인에게는 딱 필요한 상대이기도 했다.
“야. 언제까지 자빠져 있을 거야? 좀 더 만져줄까?”
대인은 쓰러진 필립을 발로 툭툭 찼다. 발끝으로 혈도 몇 곳을 누르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필립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일어났다.
“꺼허어억!”
정신을 차린 필립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대인에게 빌었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필립은 나름대로 조직의 본거지까지 드나드는 정예 조직원이었다. 처음에는 제법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대인도 회유, 협박, 고문에 이골이 난 인간이었다. 간부도 아닌 중간 관리직 정도는 적당히 어루만져주면 금방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얼마나 기술이 뛰어난지, 겉으로 보기엔 필립의 몸에 고문의 흔적 따위는 없었다.
“길 안내만 제대로 해. 그럼 적당한 때에 풀어줄 테니까.”
“저, 정말 살려주신다는, 보장이···.”
“너한테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냐?”
필립은 대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눈앞에서 흔들리는 주먹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 아닙니다.”
잠시 후, 대인은 필립을 앞세우고 개미굴처럼 복잡한 동굴의 깊숙한 안쪽으로 향했다.
스르륵···.
대인은 으로 모습을 감춘 후 필립에게 전음을 보냈다.
[평소처럼 행동해. 허튼수작 부리면 바로 모가지 날아갈 줄 알아.]대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유령처럼 사라지자, 필립이 느끼는 공포는 배가되었다.
“네, 넷!”
[가면서 들어. 네가 해야 할 일을 대충 알려줄 테니까.]두 사람의 불안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
판데모니움의 본거지.
예전 본거지가 대인이 보낸 폭탄에 절반이 날아간 이후로, 그들은 본거지를 옮기고 더 철저하게 지하로 숨어들었다.
옮긴 본거지가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복잡하게 설계돼 있는지는 판데모니움의 간부들조차도 완전히 다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건 대인이 포획한 간부들에게 직접 확인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미래의 꼬맹이도 길이 너무 복잡해서 정확한 위치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지.’
미래에서 온 릴리가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훗날 두 사람은 결국 이곳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워낙 길이 복잡한 탓에 소울이터가 대비할 시간을 주었고, 그 탓에 판데모니움을 완전히 소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곳에서···. 아저씨는 나 때문에 위험해졌었어.
-그러니까 이번에 갈 땐 날 데려가지 마.
미래의 릴리가 남긴 편지에 적혀 있던 내용들.
그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대인은 이곳에 혼자 잠입하기로 결정했다.
“저, 잠시 후면 첫 번째 관문이 나오는데···.”
필립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놈의 수작이 뻔히 보여서, 대인은 스산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한 번만 더 나한테 말 거는 척하면서 주위에 뭔가 신호를 보내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꺾어버린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고개를 위아래 혹은 좌우로만 살짝 움직여 대답해. 알았어?]꿀꺽.
필립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대인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긴장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두 사람은 미궁 같은 길을 계속 걸었다.
잠시 후, 개미굴 안쪽으로 향하는 첫 번째 관문에 도착했다.
“정지.”
단단하게 닫혀 있는 강철 문 안쪽에서 작은 덧문이 반쯤 열리고, 경계심 어린 눈이 나타났다.
“무슨 볼일이지?”
판데모니움은 본거지를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주요 길목마다 관문을 세워 놓았다. 유사시에 관문을 봉쇄해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안쪽으로 향할수록 문은 단단해지고, 검문은 철저해진다.
‘여길 꼬맹이랑 둘이 힘으로 돌파하다가 개고생을 했다고 했지.’
그럼 이번엔 내부자를 이용해서 최대한 조용히 잠입한다.
‘조용히 갈 수 있는 곳까지는.’
그것이 대인이 짠 계획이었다.
대인은 필립에게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다.
[위에 보고할 내용이 있어서 왔다고, 아주 급한 일이라고 해.]“위에 보고할 내용이 있어서 왔다. 굉장히 급한 일이야!”
필립은 대인이 생각한 것보다 더 연기를 잘했다.
게다가 그의 창백한 얼굴과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은, 다른 조직원들에게 ‘정말 심상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급한 일? 뭔데 그래?”
[여기서는 말 못 한다고 해. 간부를 직접 만나서 전해야 한다고.]“제임스. 너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간부님들을 만나 봬야 된다고!”
강철 문 너머의 조직원과 필립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묵직한 소리를 내며 첫 번째 문이 열렸다.
쿠구구궁···.
“필립. 이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이야?”
거구의 사내가 조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봤다. 그의 뒤로 체격 좋은 조직원이 몇 명 더 서 있었다.
문은 열렸지만, 쉽게 통과시켜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게···.”
필립은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침입자의 협박 때문에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왼쪽 주머니에 있는 물건. 그걸 꺼내서 저 친구한테 보여줘.]‘왼쪽 주머니라고?’
필립이 무심결에 주머니에 손을 넣자, 놀랍게도 그 안에 정말 뭔가가 들어 있었다.
필립은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제임스에게 보여줬다.
“이건···. 오거 킹 님의 가면이잖아!”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뜬 제임스가 가면을 바라봤다.
조각난 가면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분명 오거 킹의 가면이었다.
오거 킹(ogre king)
판데모니움의 주인이 아끼는 대사제들 중 한 명으로, 막중한 임무를 맡고 지구에 파견된 존재.
“그분은 지구에서 실종되셨을 텐데? 이게 왜 너한테 있어?”
[오거 킹이 보낸 전령이 메시지를 전했다고 해. 전령은 메시지를 전달하자마자 죽어버렸고, 네가 그걸 대신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그분께서 보낸 전령이 날 찾아왔어! 근데 워낙 중상이어서···. 메시지를 전하자마자 손쓸 새도 없이 죽어버렸다고. 젠장! 그래서 내가 대신 온 거야!”
“뭐? 무슨 메시지길래···.”
[기밀이라 최소한 간부급을 만나서 직접 말해야 한다고 해.]“젠장! 이걸 보고도 못 믿겠어? 엄청난 기밀이라고! 너한테 말해서 동네방네 다 소문이라도 내라는 거야?”
“그래도 절차라는 게···. 나도 위에 보고를 해야 하고···.”
[이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지?]목에 서늘한 감촉을 느낀 순간, 필립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야 이 개자식아! 여기서 너랑 노닥거리다가 일 터지면 우리 둘 다 모가지야!”
필립은 정말 절박한 모습으로 외쳤고, 그 모습에 겁먹은 제임스는 기가 질린 표정으로 그를 통과시켰다.
“아, 알았으니까 가 봐.”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필립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대인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 생각보다 연기 잘하네?]“그, 그게···.”
[내가 대답할 땐 어떻게 하라고 했지? 말로 하라고 했나?]흠칫한 필립은 고개만 살짝 좌우로 저었다.
‘지가 먼저 질문해놓고! 악마 같은 새끼!’
[빨리 끝내고 싶으면 빨리 움직이라고.]필립은 달리기 시작했다. 기억력이 좋은 그는 미궁 같은 길을 거의 헤매지 않고 금방 두 번째 관문에 도착했다.
쾅쾅쾅쾅!
“급한 일이야! 빨리 문 열어!”
“오거 킹께서 메시지를 보냈다고!”
“봐! 이 가면이 증거야! 빨리 간부님을 만나지 않으면···.”
필립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가 4번째 관문까지 거의 프리패스로 통과했을 땐, 대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 감사합···.”
[입.]필립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동시에 그의 걸음이 멈췄다.
[왜 안 가?]“······.”
필립은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말을 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의미였다. 대인은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
[뭔데. 말해봐.]휴우-.
하고 한숨을 내쉰 필립이 소심하게 말했다.
“제가 아는 길은 여기가 끝입니다. 이 안으로는 더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그 순간, 대인이 허공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륵···.
흠칫 놀란 필립이 뒤로 물러났다. 대인은 웃고 있었다.
“좋아. 그럼 가봐.”
“그, 그럼 전 이만!”
돌아서 뛰어가려는 필립의 귀에, 대인의 혼잣말이-그러나 너무나 또렷하게-들렸다.
“어차피 얼마 못 가서 죽겠지만.”
“무, 무슨 말입니까. 아까는 살려주겠다고···!”
“누가 내가 죽인대?”
공포에 질린 필립에게, 대인은 설명을 추가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거짓말한 게 들통 날 텐데. 조직에서 너 같은 배신자를 용서하겠어?”
“그, 그건···.”
필립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장 이 악마 같은 인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깊은 생각까지는 못해본 것이다.
“지금쯤이면 네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눈치챈 놈들도 있을 거야. 벌써 널 뒤쫓고 있을지도 모르지.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
실험용 쥐가 된다.
아니, 쥐보다도 못한 신세가 된다.
판데모니움은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온갖 실험을 한다.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실험 대상이지만, 어른의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
그래서 판데모니움를 배신자를 처형하지 않는다.
알뜰히 재활용하는 쪽을 택한다.
‘그럼 나도···.’
직접 인신매매와 상품 관리를 해봤기에, 필립은 실험용 인간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잘 알았다.
대부분은 실험 도중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인간성을 말살당한 괴물이 된다.
그것이 자신의 미래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필립은 멍한 눈으로 대인을 올려봤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예상 못 한 쪽이 멍청한 거 아냐?”
대인은 차가운 눈으로 필립을 바라봤다. 그 순간, 필립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대인에게 덤벼들었다.
“죽어!!”
만약에라도 여기서 대인을 제압할 수 있다면, 배신자라는 멍에를 벗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우드득!
단숨에 필립을 제압한 대인은 그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젠장! 이거 놔! 죽여버리···!”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는데.”
“······.”
버둥거리던 필립이 움직임을 멈췄다.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걸 알지만, 그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너 인신매매랑 상품 관리가 전문이라며. 그럼 ‘상품’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대인이 필립을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구에서 포획한 판데모니움 간부들을 통해 본거지에 있는 인물들에 대해 조사했고,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자를 찾았다.
맡은 일은 잘하지만 충성심은 별로 깊지 않고, 기억력이 좋아서 미궁 같은 길을 잘 외우고,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은 인물.
“대, 대충은···.”
100% 확신에 찬 대답은 아니었지만, 점점 살아나는 눈빛을 보니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그럼 사람 하나만 찾아라.”
“누구를···?”
필립이 의아한 표정으로 대인을 바라보는 순간, 대인은 릴리가 남긴 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저씨는 나 때문에 위험해졌었어.
대인이 위험해진 이유.
-죽은 줄 알았던 웬디가 그곳에 있었거든.
웬디.
릴리와 함께 판데모니움에 잡혀 온 소녀.
둘은 유일한 친구였고, 릴리는 웬디의 희생 덕분에 지구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웬디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적으로 릴리 앞에 나타났다.
충격을 받은 릴리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 굳어버렸고, 그 탓에 대인까지 위험에 처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갈 땐 날 데려가지 마.
대인은 그 말에는 동의했다.
-만약 이번에도 웬디를 만나면···. 죽여줘. 그 애는 이미···.
하지만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소중한 전력이 될 녀석을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그때는 미래의 릴리가 전해 준 정보가 없었던 미래다.
대인에 의해서 바뀐 미래는, 릴리로 인해 또 한 번 바뀌었다.
그리고 계속 바뀔 것이다.
“웬디라고 알지?”
“얼음 마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 위치도 아는 것 같고.”
“하지만 여기랑 방향이 다른데···.”
“그걸 아니까 너한테 시키는 거지.”
대인은 씩 웃었다. 그리고 필립에게 마법 스크롤과 특별 제작한 목걸이를 주었다.
“그 애를 찾아서 이 목걸이를 채워. 그리고 이 스크롤을 사용해. 너희의 모습을 숨겨줄 거다.”
건네준 스크롤에는 대인의 능력이 저장돼 있었다.
“최소한 두 시간 동안은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거다. 그 후에 내가 너희를 찾아서 데리고 밖에 나갈 거야.”
대인의 첫 번째 목표는 ‘아르만의 보석’을 회수하는 것.
‘꼬맹이 친구까지 찾으러 다니기엔 시간이 부족해. 계속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러니 웬디를 구출하는 일은 현지 전문가에게 외주를 맡긴다.
“이게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대인의 말에, 필립은 조금 반항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이 스크롤을 사용해서 혼자 도망치면 어쩌려고···.”
“당연히 위치추적 마법도 걸려 있지. 못 믿겠으면 한번 해보든가.”
대인은 씩 웃자, 필립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결국 처음부터 거미줄에 걸려든 셈이다.
“할 수 있겠어?”
“···젠장.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필립은 울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