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370
370화 (외전) 거기서 딱 기다려
“드디어 만났군.”
선지자는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소신한을 향해 걸어왔다.
꿀꺽.
소신한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시선을 견뎠다.
‘사장님하고 똑같이 생겼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
대인은 평소 세상만사 귀찮은 표정을 하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주변 사람들을 일일이 챙겨주는 다정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선지자가 풍기는 느낌은 정반대였다.
부드러운 눈빛과 나른한 미소.
하지만,
‘무슨 눈빛이···.’
깊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그대로 빨려들 것처럼 깊고 어둡다.
선지자는 대인보다 마른 편이었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앞머리가 시야를 가리자, 그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그 손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었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
수천의 광신도 앞에서 산 제물을 해체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비밀까지 다 말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마성의 목소리였다.
다행히 소신한은 이런 종류의 마력에 충분한 내성을 쌓아 두었다.
-쿵!
바닥에 무릎을 꿇은 소신한이 선지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지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린 양아.”
헐렁한 로브 자락에서 뻗어 나온 선지자의 손이 소신한의 오른 어깨에 닿았다.
순간, 소신한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선지자이십니다. 저희를 그분에게로 이끌어주실 분이십니다.”
그 옆에 함께 무릎을 꿇은 안준은 소신한의 연기에 감탄했다.
자신이 미리 알려주긴 했지만, 지금 소신한의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는 종교에 완전히 심취한 자의 것이었으니까.
선지자도 그들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피식.
웃음을 흘린 선지자가 말했다.
“그분의 부활을 위해 너희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영광입니다!”
둘은 동시에 힘껏 대답했고, 선지자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의 등 뒤에, 마계수의 안에 있는 거대한 존재가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내 너에게 세례를 내리겠노라.”
그 말에 정작 소신한보다 옆에 있던 제사장이 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예? 선지자께서 직접 말입니까?”
선지자가 직접 내리는 세례는 레드핑거의 제사장들, 또는 가장 우수한 전사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선지자가 직접?’
안준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제사장들에게 세례를 받는 신도조차 소수에 불과했다.
아까 본 정화의식에 사용되는 제물들은 세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고, 진짜 신도는 세례를 받은 자들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소신한의 재능을 높게 봤다는 건가? 지금 처음 봤는데?’
세례를 받은 신도들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게 되고, 또한 재능에 따라서 또 다른 특성을 개화하게 된다.
안준의 도 그렇게 해서 얻은 능력이었다.
이미 조직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는데도, 안준은 은근히 질투심이 났다.
“그분을 위해 사용될 칼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직접 벼려야지.”
선지자는 소신한의 어깨에 올려두었던 손을 들어 그의 머리에 올렸다.
“마음을 편히 먹거라.”
츠츠츠츳···.
선지자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소신한의 몸 안으로 침투했다.
꿀꺽.
이질적인 마력의 침입에 소신한은 긴장했다.
‘여기서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세례의 과정 자체는 단순했다.
신도의 몸 안에 시술자의 마력을 심어 세뇌를 강화하고, 잠재된 능력을 자극해서 개화하도록 돕는다.
그 과정에서 피시술자는 약물과 주문을 통해 레드핑거에 대한 충성심을 몇 번이나 주입받는다.
본래는 몇 시간이나 걸리는 긴 과정이지만, 선지자는 그 대부분을 생략했다.
소신한이 이미 제사장에게 충분히 점수를 따 둔 덕분이었다.
‘이것만 견디면···. 레드핑거 내부를 더 자세히 둘러볼 수 있어.’
그때였다. 소신한의 단전에서 파천신공이 멋대로 움직이며 선지자의 마력에 반발했다.
-치직!
“!!”
깜짝 놀란 소신한이 기운을 억눌렀다. 잠깐 반발했던 파천신공의 기운은 곧바로 단전으로 돌아갔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긴장한 소신한은 선지자의 눈치를 봤지만, 선지자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선지자는 소신한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
그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자, 옆에서 제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지자시여. 무슨 일이라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로써 너는 그분의 아이가 되었다.”
고개를 저은 선지자는 짧은 기도로 소신한에게 축복을 내려준 뒤, 이만 나가 보라고 했다.
그런데 소신한을 바라보는 선지자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제사장이 알려줄 것이다.”
“예!”
제사장이 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후, 나른했던 선지자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크윽···!”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갑자기 왜···.”
선지자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마계수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크윽···.”
선지자는 자신이 선지자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가끔씩 꿈속에 흐릿하게 나오는,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는 누구인지.
그런데 방금 전, 소신한이 익힌 파천신공과 접촉하면서 백지가 된 기억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그 균열은 두통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으득!
이를 악문 선지자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마계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전부 알고 계십니까?”
-꿈틀.
마계수의 중앙에 있는, 붉은 알 속의 존재가 꿈틀댔다.
저 존재가 바로 레드핑거의 신도들이 부활을 기다리는 ‘그분’이었다.
태아를 닮았지만 아직 형체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
다만 두 개의 머리가 선지자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답을···. 알려주셔야 할 겁니다.”
선지자는 이를 악물며 ‘그분’을 노려봤다.
자신이 모시는 신을 바라보는 것치고는 무척이나 불경한 태도였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부활시킨 걸 내가 후회하게 될 테니까.”
-휘익!
몸을 돌린 선지자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선지자가 나간 후, 고요히 침묵하던 알 속의 존재가 천천히 움직였다.
놀랍게도 두 개의 머리가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
[[무언가가 그를 변화시켰다.]]<>
[[알 수 없다. 문제는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때, 바알과 소울이터라 불린 존재들이었다.
***
소신한이 선지자를 만나 세례를 받고 오는 동안, WHA에서 데려온 다른 신도들도 제사장들에게 세례를 받았다.
“몸 안에 힘이 넘쳐!”
“이게 그분이 내려주신 능력···.”
그들은 세례가 끝난 후 더 충성스러운 신도가 되었다.
레드핑거의 세례는 피시술자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세뇌를 더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효과가 없는 사람도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못 느끼겠는데.’
지난 몇 주간의 지옥훈련으로, 소신한의 잠재력은 거의 다 개발이 된 상태였다.
혹은 안준처럼 두 번째 특성을 개화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런 기미도 없었다.
“너희가 할 일을 알려줄 것이다.”
제사장은 안준이 데려온 신도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WHA를 서울에 추락시켜라.”
“!!”
WHA는 마왕성을 개조해 만든 시설이었다.
여의도만 한 면적의 섬이 도시에 떨어진다면, 그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미친···.’
소신한은 겉으로는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은 분노로 활활 끓어오르고 있었다.
제사장이 말을 이었다.
“외부에서 우리가 도울 것이다. 일부러 우리가 흔적을 드러내 영웅들을 끌어내면, 너희는 그때 움직여라.”
“WHA의 내부로 잠입해 중앙관제실을 장악한 후, 이걸로 프로그램을 해킹해라.”
제사장은 안준에게 해킹 툴을 넘기며 사악하게 웃었다.
“너희는 섬이 서울 한복판에 떨어지기 전에 게이트를 타고 빠져나와라.”
“···네.”
안준은 떨리는 손으로 해킹 툴을 받아 들었다. 제사장의 그의 손을 맞잡으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봤다.
“명심하라. 이것은 성전이다. 상대는 불신자들이다.”
‘미친 테러겠지.’
두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테러였다.
그들은 기껏해야 내부에서 학살극을 벌이거나, 폭탄을 설치할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 한복판에 섬이나 다름없는 구조물을 떨어뜨리는 테러라니.
제사장이 안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WHA로 돌아가 명령을 기다려라.”
“예? 벌써 말입니까? 좀 더 머물면서 이 친구들에게 교리를 가르쳐는 주는 것이···.”
안준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레드핑거 본단은 위치를 주기적으로 바꾼다.
한 세계에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아공간이기에 가능한 일.
달리 말하면, 여기서 그들이 돌아간 후에 본단의 위치가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시간을 더 끌어야 돼.’
‘지금 돌아갈 순 없어.’
안준과 소신한의 시선이 은밀히 마주쳤다.
하지만 제사장은 단호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랬겠지만, 최근 차원 허브의 추적이 심해져서 어쩔 수 없다.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도록. 그리고···.”
제사장은 하려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쿠구구구구구궁!
아공간 전체가 뒤흔들리는 진동.
갑작스러운 지진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제사장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무슨?”
레드핑거의 본단은 아공간으로 이루어진 도시.
지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아공간 너머 먼 곳에서, 소신한에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끼들. 결계 한번 더럽게 단단하게 쳐놨네.-
‘사장님?!’
소신한이 놀라서 눈을 부릅뜨는 가운데, 대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둘셋. 이거 잘 들리는 거 맞지?-
-레드핑거. 너희는 포위됐다. 이 쓰레기 새끼들아.-
건물 안에서 본단의 신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쿠구구구구궁···!
아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점점 강해질수록, 목소리도 점점 선명해졌다.
상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모두 무장을 버리고 순순히 항복해라. 그럼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
대인은 도중에 말을 바꿨다.
-아니다. 그냥 저항해라. 니들은 유혈사태를 좀 겪어야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뒈졌다고 복창해라. 이 사이비 새끼들아.-
“적의 공격이다!”
“성전을 준비하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제사장들이 신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레드핑거의 전사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고, 전쟁용 병기들을 꺼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이게 어떻게 된···. 설마 꼬리를 잡힌 것이냐!”
당황하던 제사장이 안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안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너희가 아니면 어떻게 이곳이 발각된단 말이냐!”
분노한 제사장이 안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붉게 물든 손이 안준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우지직!
목이 부러진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안준이 아니라 제사장이었다.
“크르르···.”
웨어울프로 변신한 소신한이 제사장의 시체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너, 너···.”
“제사장님을 죽이다니! 무슨 짓이야!”
당황한 표정을 짓는 다른 신도들을 무시하며, 소신한은 안준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 싸움은 이미 시작됐어.”
“···젠장.”
소신한은 빠르게 움직여 WHA의 학생들을 제압했고, 안준도 정신을 차리고 그를 도왔다.
“이 배신자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제압당한 학생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곧 수혈이 제압당해 쓰러졌다.
그러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저기 배신자들이 있어!”
“저놈들이 적을 데려왔어!”
레드핑거의 전사들 일부가 소신한과 안준을 향해 달려왔다. 그들은 등을 맞대며 몰려오는 적들을 바라봤다.
안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여기서 죽진 않겠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
“······.”
선지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한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궁!
부서질 듯 요동치는 아공간의 하늘.
그곳에서 생소하고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뒈졌다고 복창해라. 이 사이비 새끼들아.-
목소리는 잠시 쉬었다가, 마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약간의 한숨을 담아서.
-특히 선지자 너 이 새끼. 도망가지 말고 거기서 딱 기다려.-
그 순간, 선지자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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