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sword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너머의 세계 (4)
머릿속 꽃밭인 애들이 나 없이 이 세상에서 오래 버티리라 여겨지지는 않았다. 나는 녀석들의 죽음을 듣고, 그 죽음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또 살아갈 터.
이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조량은 되묻지 않았다. 중국어를 모르는 김강산과 서은창은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분위기를 살피며 데록데록 눈을 굴렸다.
길어진 침묵을 깨며, 최지수가 입을 열었다.
“궁주님. 지금 림이에게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고 책망하시는 겁니까? 림이의 이야기를 듣고도 그리 말하시다니요.”
“천룡검신도 그저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뿐이네.”
“그러는 궁주님이야말로, 균열에서 나온 뒤 균열을 없애기 위해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최지수의 목소리가 나지막한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조량이 최지수를 응시하며 느릿느릿 말했다.
“나 역시 그저 인간이다. 생명력이 사그라드는 느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더군.”
***
북경의 외성에서 멀지 않은 곳.
나는 가만히 균열을 내려다보았다.
발밑에서 검은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짙은 어둠에서 옅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블랙데이마다 세계 곳곳의 균열의 마기가 짙어지고, 그곳으로부터 괴물이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초월의 탑은 지금껏 어떤 균열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베리아의 끝, 차탄카에 있다는 최초의 균열. 그곳에 초월의 탑이 존재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검황이었을 때 최초의 균열에서 탑이 솟아났던 것처럼.
그리고 내 추측은 사실이었다.
-균열에서 나오니 흰 눈이 뒤덮인 벌판이더군.
조량은 허베이성의 균열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가 균열에서 나와서 닿은 곳은 시베리아의 벌판이었다.
까마득한 초월의 탑. 연분홍빛 하늘. 하늘에 뿌리박고 탑을 에워싼 세계수.
-균열과 마찬가지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네. 생명력을 소모하면 틈새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조량은 그곳을 떠났다.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와 들이닥치는 괴물 사이에서 죽을 고비를 수십 번 넘기며 허베이성으로 돌아왔다.
‘차탄카까지 갈 시간은 없어.’
하지만 조량의 말에 따르면, 모든 균열은 그곳으로 통한다.
지금이라도 균열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면 초월의 탑에, 초월의 탑을 에워싼 세계수에 닿을 수 있다.
나는 가만히 선 채 균열을 내려다보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발이 균열을 향해 가까워졌다.
어느덧 나는 균열 위에 서 있었다. 밤보다 짙은 어둠이 발목을 감싸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단지 그뿐. 발밑은 땅처럼 딱딱했다.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거지.’
그러나 나는 균열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물론 문을 열고 그곳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균열을 통해 세계수에 닿을 수 있다면.
‘그걸 없애면 균열이 사라질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추측일 뿐이다.
희망보육원의 담장을 넘을 때에도, 내 앞에는 그저 불확실한 미래만 놓여 있었다. 각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약을 찾으러 월악을 향해 떠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언제까지 망설일 거냐.’
차탄카까지 갈 시간을 내지 못한다는 핑계로 미루고 또 미뤄왔다. 하지만 그 핑계는 이제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곧 블랙데이가 시작될 것이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불쑥 딴 마음이 일었다.
행협멸악 구약보세. 협을 행하고 악을 멸하고 약자를 구하고 세상을 보호한다. 참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본 적 없는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목숨까지 걸어야 되냐?
-사형. 제가 떠난 뒤에도 지키는 검을 놓지 않겠다 약조하십시오.
……이놈의 기억은 왜 이렇게 잊히지도 않고 또렷할까. 700년 전의 일이면 흐릿해질 만도 한데.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검을 뽑았다. 머릿속을 스치며 애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김강산과 최지수, 서은창과 하하민, 박명칠과 양범진, 조은조와 이바름…….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내 편지를 발견하면, 애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내 말을 얌전히 들으리라는 기대는 생기지 않았다. 분명 나를 찾아 온 균열을 들쑤실 것이다. 따라 들어오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문이 열리기 전에 끝내야 해.’
재앙의 둥지를 열었을 때, 문이 열려 있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애들이 내 편지를 발견하고 나를 따라오려 해도 이미 문이 닫힌 후일 터.
……애들 얼굴이나 좀 더 봐둘 걸 그랬나.
나는 떠오르는 회한을 무지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곧, 단전 깊은 곳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을 타고 흘러나온 선천진기가 느릿느릿 기맥을 타고 올랐다.
삼반공의 5절, 합(合).
검황이었던 내가 그 삶의 마지막 순간에 시전했었던 기공.
나는 틀리지 않았다. 조금 돌아왔으나, 이번 생에도 결국 정답을 찾았다.
지금은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이 균열 안에서도 결국 그러할 것…….
그때.
기감의 그물에 기운이 느껴졌다.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기운.
‘이 새끼들이, 벌써 따라왔어?!’
멀리에서 질러대는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형!!!! 혼자 가면 나 뒈진다!!!!!!!”
작은 점처럼 보였던 김강산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 뒤를 따라 새벽의 고요를 깨뜨리며, 서은창과 최지수의 목소리가 쟁쟁 울렸다.
“사형, 스톱!! 스톱하십쇼!!!!”
“림아아아아——-!!!!!!!”
분명히 코 골면서 뻗어 자고 있는 꼴을 보고 나왔는데. 졸라리 빨리 달렸는데. 벌써 따라왔어?
……애들 앞에서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얼른 의혼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지금 문을 열어 봤자 애들이 따라 들어올 시간은 충분하다. 따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것.
“왜? 무슨 일 있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추켰다. 얼굴이 벌게진 김강산이 무릎을 짚은 채 씩씩거렸다.
“형이야말로 이 밤에 뭔 짓이냐? 혼자 슬그머니 나가? 우리가 형을 찾느라 온 성을 다 뒤졌어!”
보아하니 남긴 편지는 아직 못 읽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리발을 내밀기 최적의 타이밍이지. 옛날 생각나서 산책 좀 했다고 하면, 전생 얘기만 나오면 꼼짝 못하는 애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제격이다.
“옛날 생각…….”
“옛날 생각 나서 산책 좀 했다는 소리는 꺼내지도 말아라.”
뒤이어 도착한 최지수가 서늘하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에 구겨진 종이는 내가 남긴 편지였다.
종이를 편 최지수가 또박또박 편지를 읽었다.
“나 볼 일 보고 올 테니까 찾지 말고 얌전히 계룡에 돌아가 있어. 얌전히 안 있으면 뒈진다?”
……망했네.
세 녀석이 세모꼴로 눈을 치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시선에서 거의 살기가 느껴지는 기분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했냐?
“림이 너는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 먹지를 않는구나.”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라잖아?”
“내가! 너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너는 어쩌겠느냐?”
“졸라리 빡치겠지. 근데 형이랑 내가 같냐? 내가 전생에 이미 한 번 박살냈다니까?”
나 이래 봬도 초월자였다.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초월자가 인증한 전직 초월자를 뭘로 보고?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무슨 전생 타령?”
“강산이가 오랜만에 옳은 말을 하는구나.”
“아, 됐고. 사형. 이거 하나만 알아두십쇼. 사형이 사라지면 김강산 이 새끼 진짜 감당 안 됩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겁니다. 이거 협박 아닌 거 아시죠?”
“알아. 안다고. 나도 목숨 아까운 사람이야.”
김강산이 흥, 코웃음을 쳤다. 최지수와 서은창은 코웃음까지는 치지 않았으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얼굴이다.
이것들이 대표의 말을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것은 왜일까.
“형. 균열에 들어가려는 거지?”
나는 체념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닫혀 있는 문을 열기 위해서는 선천진기가 필요할 텐데?”
“조금만 쓰면 된다고.”
“조금? 선천진기가 마력이냐? 가져다가 쓰고 퍼질러 자면 다시 채워지는 거야? 아니잖아! 나도 들어서 다 안다… 악!”
“이게, 어디 형 앞에서 소리를 질러?”
김강산은 대가리를 후려 맞고서도 기세를 꺾지 않았다.
이럴 때 최지수가 말려야 하는데…….
“림아. 꼭 가야겠다면 말리지 않으마. 세상을 구하겠다는 너를 내가 어찌 말리겠느냐.”
“이제야 말을 알아듣…….”
“내가, 림이 너와 함께 가겠다.”
최지수가 결연한 표정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미친놈 뒤에 더 미친놈이라더니.
“지수 형. 돌았냐? 저기가 어딘 줄 알고!”
“파천궁주도 무사히 돌아왔잖느냐. 너와 함께 가는데 걱정할 일은 전혀 없다.”
“지수야. 아주 좋은 생각이네. 그래, 사형! 같이 갑시다. 매일 사형 튀지 않는지 감시하느라 속 끓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하겠어요.”
“너네 균열에 들어가는 게 북경 나들이 온 거랑 같은 줄 아냐?”
“알아. 형. 우리도 알 거 다 안다고.”
김강산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은창이 헤실헤실 웃으며 손에 쥔 월영검을 흔들었다.
“행협멸악 구약보세 아닙니까? 균열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이 월악문의 문주가 해야 하는 일이죠.”
개파시조가 여기 있는데, 누구 마음대로 문주 타령?
내 애들에게는 협박도 애원도 설득도 먹히지 않았다.
“아, 몰라! 형 사라지면 나 진짜 어둠속성으로 전직함!”
“림아. 네가 염려하는 바는 이해한다만 그것이 내 알 바냐?”
“사형. 행협멸악 구약보세입니다.”
입이 마를 정도의 긴 대화는 영원히 제자리를 맴돌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대체 누굴 닮아 이렇게들 고집이 세냐.
끝나지 않을 듯했던 대화가 종료된 것은 내 의지와는 무관했다.
“잠깐.”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녀석들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넓게 펼쳐 두었던 기감의 그물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눈앞의 균열을 향해 촘촘하게 펼쳤다.
“림아. 왜 그러느냐?”
“기다려.”
균열을 채운 마기가 기감의 그물을 파고들었다. 서늘하고도 진득한 마기.
……아주 약간, 조금 전보다 짙어진 느낌이다.
균열의 마기가 짙어지는 것은 블랙데이의 전조.
서너 달 동안 농도를 더해가며 짙어진 마기가 한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면, 며칠 내로 블랙데이가 시작된다.
균열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세상을 뒤덮고, 그 안에 갇혀 있던 괴물이 기어 올라오는 죽음의 시기.
‘지금 균열에 들어가니 마니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냐.’
그럴 기회는 진작 지났다. 내가, 그 기회를 모두 떠나보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간다.”
***
“블랙데이의 전조가 나타났다는 말씀이십니까?”
“말했잖아요. 몇 번을 물을 겁니까?”
“하지만 파천궁의 연구소에서 확인한 바로는 아직 마기의 농도 변화가 없습니다. 궁주님께서 느끼시기에도 이전과 같다고 하시는데…….”
“그렇게 믿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믿으세요. 내 대답은 변하지 않으니까.”
나는 바쁘게 짐을 챙기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 대꾸에 등소민이 입을 다물었다.
계룡문을 세우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블랙데이다. 그 사이 계룡성은 두 번의 확장을 거쳐 대전성보다 더 커졌다.
그 탓에 성벽과 인근 균열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다. 가장 가까운 균열은 북쪽 계룡성벽과 10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12년만의 블랙데이. 이전처럼 몇 달 지속되고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러리라는 기대는 쉽게 가지기 어려웠다.
……이렇게 되기 전에 무엇이라도 시도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운이 좋았어.’
마기의 변화는 아주 미세한 수준이었다. 나 역시 균열에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
마기가 짙어지기 시작한 뒤, 균열이 열리기까지는 세 달 남짓의 시간이 있다. 계룡에 돌아가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다.
이번 블랙데이가 앞선 네 번의 블랙데이와 다르지 않다면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행장을 꾸리는 일은 금방 끝났다.
김강산과 서은창이 파천궁주의 선물, 마력증폭제와 힐링포션이 빵빵하게 든 배낭을 들쳐 멨다.
“지수 형은?”
“아까 배 아프다고 화장실 갔는데.”
“그거 한참 전이잖아.”
“사형. 지수가 뭘 잘못 먹었는지 밤새 배가 아프다더라고요.”
“각성자가 고작 잘못 먹었다고 배가 아파? 이거 파천궁 새끼들이 약 탄 거 아냐?!”
“사형. 진정하십시오. 저도 가끔 설사 하고 그럽니다.”
“……그래? 지수 형 오면 바로 출발한다.”
“예,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