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126
◈ 126화
9와 4분의 3번 승강장.
강서준은 나지막이 떠오르는 문장에 쓰게 웃으면서 하나둘 사라지는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이루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적합자.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이 뭐야?”
“……별거 아냐. 나 대위님이 장난친 거니까.”
“응?”
“됐고. 우리도 따라가자.”
강서준은 다른 사람이 그랬듯 발아래로 바다가 훤히 보이는 허공을 향해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도 훅 밀려오는 화끈한 공기.
블랙 그라운드 특유의 찬 공기가 아니라, 후덥지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후끈한 온기였다.
뒤따라 걸어 들어오는 이루리가 미간을 구기면서 말했다.
“도대체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이 뭔데. 이거 그냥 포탈 아니야?”
“맞아. 포탈.”
“응?”
“9와 4분의 3번 승강장도 따지고 보면 포탈과 같은 거거든.”
9와 4분의 3번 승강장.
어느 유명한 소설에서 등장하는 특유의 ‘웜홀’을 말했다. 마법사들만이 다닐 수 있는 학교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그들만의 포탈.
강서준은 넌지시 물었다.
“너는 해리포터 안 봤어?”
“해리…… 뭐?”
“나 대위님은 그냥 소설에서 나오는 문장의 일부를 빗대어 장난친 거야. 별거 아니야.”
“……흐으음. 봤던 것도 같은데.”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는 이루리는 돌연 밝아진 시야에 눈살을 찌푸렸다. 손으로 앞을 조금 가렸다가 펼쳤을 때는 감탄 먼저 터져 나왔다.
“우와…… 여기 뭐야? 적합자. 여기 대체 뭐냐고!”
강서준도 밝아진 시야에 적응하자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나지막이 침음을 삼켰다.
‘여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하얀 백사장 위로 야자수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해변엔 많은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노점상들은 각종 음료들을 팔기 위해 돌아다녔다.
이루리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바닷가로 달려가더니 물에 손을 담그면서 말했다.
“적합자! 진짜 바다야!”
“……어.”
“으으! 짜! 이거 진짜 바닷물이야!”
“어어. 그래.”
강서준은 약간 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종전까지 있던 곳과 너무 괴리가 커서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앞서 걸어갔던 나한석이 강서준을 발견하더니 말했다.
“어때요? 굉장하죠?”
“……네. 솔직히 이런 데인 줄은 몰랐습니다. 기껏해야 자그마한 은신처를 생각했는데.”
“저도 처음엔 꽤 놀랐습니다. 다들 이곳을 두고 ‘낙원’이라 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낙원.
강서준은 그 말에 절실하게 동의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너무나도 딱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강서준은 헛웃음을 삼켰다.
“……여긴 정말 평화롭군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아포칼립스의 세계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늘’을 찾기 어려웠다.
백사장에서 물장난을 치는 연인과 가족들, 이를 지켜보며 힐링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뒤로 우후죽순 자리 잡은 아름다운 외관의 건물들은 마치 그리스에 있는 유명한 휴양지를 떠오르게 했다.
과연 이게 정말 그가 아는 드림 사이드 속 풍경이 맞을까?
아무리 봐도 멸망 직전에 놓인 세계라고 보기엔 괴리감이 지나치게 컸다.
무너져 버린 폐허였던 카누비스에서 이곳으로 넘어와서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한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무렴 마지막으로 남은 안전 구역이니까요. 평화로워야죠.”
“……마지막 안전 구역.”
“어쨌든 환영합니다. 전 낙원에 강서준 씨가 오신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그리고 나한석은 그에게 다가온 일련의 플레이어 무리를 마주했다. 여기까지 함께 외부 작전을 수행해 온 그들은 나한석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임무도 고생했고 다들 들어가서 쉬도록 해. 내일 오전엔 전체 회의가 있으니 너무 늦지 말고.”
“네!”
“아, 김시후는 혹시 모르니 치료소부터 들러. 포션 챙겨 먹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럼 해산!”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는 플레이어들을 일별한 나한석은 강서준에게 돌아왔다.
그는 백사장의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도시를 한 번 둘러보겠습니까?”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죠. 앞으로 강서준 씨도 살아갈 곳인데.”
나한석은 강서준을 데리고 여유롭게 해변을 걸었다. 그는 이 도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을 늘어놓으면서 다양한 정보를 건네줬다.
“여긴 상업 지구입니다. 쇼핑은 이곳에서 하시면 되고, 뭔가 팔 게 있으시면 중앙에 있는 조합원을 찾아가시면 될 겁니다.”
가판대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플레이어부터 NPC까지, 곳곳에 섞여 물건을 사고파는 풍경이었다.
꽤 진귀한 아이템도 있었다.
나한석은 상점가 한쪽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닭꼬치를 구매했다.
“세 개만 주세요.”
그리고 붉은 양념을 먹음직스럽게 바른 직화 닭꼬치는 이루리와 강서준에게 건네졌다.
이루리는 함지박 웃으면서 받았다.
“흐아아, 적합자아. 이거 너무 마시써.”
“……다 씹고 말해. 더럽잖아.”
이루리는 꼬치 하나를 완전히 섭렵하고, 또 다른 먹거리를 찾아 눈을 빛냈다. 보면 볼수록 먹을 거 하나에 한없이 약해지는 녀석이었다.
전생에 못 먹고 죽은 한이라도 맺혔나.
강서준은 곳곳에서 풍겨 나는 휴양지의 여유로움에 헛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여기 대체 뭡니까?”
“말했잖아요. 낙원이라고.”
“……이래도 돼요?”
“물론이죠. 누차 말했듯 여긴 유일하게 남은 안전 구역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무려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을 넘었잖아요?”
강서준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나한석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을 이었다.
“……모르시나? 어쨌든 여긴 백신들도 찾을 수 없어요. 드림 사이드 1의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이니까.”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
“네. 아무래도 서비스 종료 이후에 만들어진 도시 같아요.”
지도에도 드러나지 않아 백신조차 찾질 못하는 도시. 설마 시스템마저 이곳을 발견할 수 없는 걸까.
강서준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그게 가능해요?”
“글쎄요. 가능하니까 있지 않겠어요?”
속 편한 소리를 하던 나한석이 다음으로 안내한 곳은 외관이 꽤 화려한 여관이었다.
“풍경이 좋은 곳으로 골랐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예쁜 곳이었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는 아마도 ‘블랙 그라운드’ 내지 ‘멸망한 세계’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햇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이는 풍경이었다.
나한석은 열쇠를 건넸다.
“오늘은 여기서 쉬시고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나죠.”
“……알겠습니다.”
나한석은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그렇게 그와 헤어진 강서준은 말없이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에메랄드빛 바다. 만약 세상에 드림 사이드가 나타나질 않았다면 언젠가 그도 여행 삼아 이런 바다를 놀러 왔을지도 모르겠다.
강서준은 헛헛하게 웃었다.
그리고 침대 위를 몇 번 뒹굴던 이루리가 강서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적합자. 나한석 대위란 사람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알지?”
“응. 알아.”
“근데 왜 가만히 있어?”
강서준은 여전히 평화로운 도시의 정경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이런 휴양지는 처음이라. 좀 더 즐기고 싶은 마음 반.”
“반?”
“아무래도 사정이 있는 것 같은 추측 반.”
이루리는 그런 강서준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맞다. 적합자. 한 가지 더 정정할 게 있어.”
“뭔데?”
“이제야 기억났는데. 해리포터에 나오는 그거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이 아니라, 9와 4분의 3번 선착장 아니야?”
강서준은 말없이 이루리를 내려다봤다.
***
밤이 늦은 시각.
아스라이 떠오른 달 아래로 고즈넉한 파도 소리만 철썩일 즈음.
예상했던 대로 어둠을 배경 삼아 나한석은 은밀하게 강서준의 방으로 들어왔다.
“……안 주무시고 계셨군요.”
“네. 올 줄 알았으니까요.”
작은 호롱불 하나 없이 조용히 나타난 나한석은 주변을 살피더니 일단 무언가를 조작했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할수록 신기하군요. 강서준 씨는 뭔가를 이미 알고 계시는 겁니까?”
“글쎄요. 전 그저 예상을 했을 뿐이죠.”
다시 생각해도 낙원이라 불리는 이 도시는 터무니없다.
과연 멸망 직전에 놓인 세계에서 이렇게 완벽히 안전한 도시가 존재할 수 있을까?
강서준은 바로 부정했다.
‘애초에 드림 사이드는 힐링 요소가 다분한 게임이 아니야. 낙원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지.’
이미 세계의 대다수는 멸망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일한 ‘안전 구역’이 정말 안전할까? 설혹 초읽기에 들어간 ‘멸망 예정 도시’는 아닐까.
강서준은 후자에 무게를 뒀다.
시스템이란 ‘신’이 직접 나서서 이 세계를 말려 죽이려는 판이다. 지도에 안 나온다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법.
강서준은 다시금 창밖 풍경을 내려다봤다. 참으로 고요하기만 한 도시의 정경은 역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것이다.
‘여긴 폐허 위에 지어진 모래성이야. 언제 파도에 휩쓸릴지 모르는 그런 모래성…….’
나한석은 그제야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낮엔 진실을 말하지 못한 점 죄송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관련된 단어를 금기로 여기거든요.”
“……금기라고요?”
“네. 다들 오늘 하루를 살더라도 마지막이 아닌 것처럼 살고 싶으니까요.”
나한석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해서 우린 외부 탐사를 나가는 인원을 제외하고 전부 ‘기억’을 봉인해 둡니다. 특정 조건이 발생하기 전엔 모두 잊고 지내는 거죠.”
“……그게 가능해요?”
“됩디다. 왠지 모르겠지만 낙원엔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아이템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나한석은 쓸쓸한 눈으로 강서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쨌든 강서준 씨가 이 타이밍에 이곳에 온 건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죠?”
“사실 한 달 전부터 백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거든요. 카누비스로 광신도가 나타나고, 블랙 그라운드 곳곳에 백신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나한석은 이 세계에 이제 생존자들도 몇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워진 것이다.
“더 이상 사냥할 게 없어진 놈들이 향할 곳은 결국 여기일 겁니다.”
“……침공이 예정됐다는 겁니까?”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어요.”
모래성인 줄은 알았지만 곧 해일이 들이닥칠 모래성일 줄이야.
강서준은 가볍게 혀를 차며 물었다.
“혹시 백신들의 전력은 어떻습니까?”
“어림잡아 수백은 될 겁니다.”
“그 구슬이 수백이라…….”
강서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삼켰다.
단 한 놈으로도 죽을 듯이 힘들게 싸웠던 기억이 있었다. 그 괴물 같은 놈이 수백이라고?
그때 나한석이 강서준의 말을 부정했다.
“구슬이 아닙니다. 적어도 3단계 형태의 백신만 수백을 넘을 거라는 얘기죠. 1단계는 결국 3단계의 과거에 불과하니까요.”
여태 들은 얘기 중 최악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괴물 수백 마리가 이 도시로 진군해 온다면 과연.
‘하기야 이 세계를 지우기 위해 태어난 놈들이야. 그 정도는 당연하려나…….’
근본적인 물음도 생겨났다.
“막을 수 있는 겁니까?”
“계획은 있습니다만 모르죠. 확실한 건 막지 못하면 죽는다는 겁니다.”
미간을 구긴 강서준의 시야에 나한석의 총이 걸렸다. 그러고 보면 그는 그 총으로 백신을 쓰러트린 전적이 있었다.
닿는 걸 모조리 소멸시키는 무적의 백신을 쓰러트리는 무기라…….
“그 총…… 백신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거죠?”
“네.”
그는 총을 테이블 위로 올리면서 말했다.
“제가 아는 걸 전부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전부 그러기 위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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