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is also a business RAW novel - Chapter (381)
몰락 (8)
“이보시오. 듣고 있는 거 맞소?”
“그럼요. 듣고 있다마다요.”
“그러면 왜 그렇게 태연한 거요?! 저 거렁뱅이 놈들이 감히 차르 폐하를 향해 그 더러운 발을 들이밀고 있다니까!”
“뭘 모르나 본데, 원래 벌레를 잡으려면 하나하나 잡아 죽이는 것보다 모여있을 때 통째로 잡는 게 더 안전하고 빠릅니다.”
1816년 7월 말.
포위 30일째.
군 내부 곳곳에 똬리를 튼 데카브리스트의 의도적인 태업, 방임과 무관심.
제일 먼저 평민들의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정보부로 달려온 사제들의 신고는 ‘절차’ 도중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행정 절차 중 누락 되는 게 부지기수, 당연히 19세기 유사국가에서는 밥 먹듯이 일어나는 일이다. 설마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고 문서를 세절했겠나.
“이보세요. 이건 우리 관할입니다! 군이 왜 경찰 쪽 일에 관여하는 겁니까?!”
“지금은 전시, 그것도 제도가 포위된 비상사태잖소. 평시와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지. 그런데 경찰력이 그렇게 남아도나? 그렇게 힘이 남으면 우리가 전선으로 갈 병력을 차출해도 되겠구려?”
“그, 그건…”
“아, 설마 군인들은 총 맞아 뒈지는데, 경찰들은 뒤에서 손 놓고 구경이나 하려는 건 아니겠지?”
거리에 점점 늘어나는 부랑자들 때문에 순찰대를 늘리고, 경찰력을 이용해 치안 정국을 조성하려던 경찰부의 계획 또한 무력화되었다.
이렇게 잠시 동안이지만 느슨해진 분위기를 타고.
“허허허, 여러분. 주님께서는 항상 우릴 지켜보고 계십니다. 잠시 고난이 있을지라도 꾹 참고 기다린다면-”
“대체 언제!?”
“우리 애가 굶어서 정신을 못 차린단 말이야!! 대체 언제 그 잘난 도움이 내려오는 건데!?”
“여러분, 갑시다! 차르께 가서 우리의 어려움을 직접 전합시다!!”
“차르께서 간신들에게 눈이 멀어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모르시는 거지, 우리가 직접 가서 진심을 보인다면 다를 거야!”
하나둘.
다 해진 외투에 헝겊으로 기운 바지를 입은 평범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힘없는 발을 옮겼다.
“하느님, 차르 폐하를 보호해주소서. 영광된 분에게 오래도록 세상을 다스리게 하소서.”
“““자랑스러운 정복자이자, 영광스러운 수호자이시자, 모든 이들을 위로해주시는 분.”””
평생 배웠던 대로. 온 신민을 굽어살피시는 차르께, 자비로우신 차르께 이 추하디 추한 몰골을 보여드린다면
“하느님, 보호해주소서.”
“““신앙과 차르 폐하의 힘을.”””
“하느님, 보호해주소서.”
“““이 땅에 평온과 평화가 깃든 제국을.”””
신의 대리인이신 그분께서는 반드시 자신들을 측은하게 여기리라.
그 고귀한 손으로, 옥음으로 신하들을 움직여 이 불쌍하디 불쌍한 자들의 입에 무언가 하나라도 넣어주시리라.
“오 하느님의 섭리가 이 곳에 강림하셨으니.”
“““선을 위하시고, 기쁨 안에 겸손을, 슬픔 안에 인내를 이루게 하소서.”””
차르의 초상을 들고, 십자가를 메고, 러시아 제국의 국가를 부르며 수많은 이들이 차르가 기거하는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의 뜻을 높으신 분들도 알았을까.
민중이 모였다 하면 몽둥이 찜질로 다스리던 경찰들도, 서슬퍼런 총검을 끼우고 순찰하던 군인들도, 오늘 그들이 향하는 길에선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황, 황궁이다!”
“거의 다 왔소. 다들 조금만 힘을 내십시다!”
“““오, 하느님. 차르 폐하를 보호해주소서.”””
허름한 우리들의 집과는 다른. 웅장하고 번쩍거리는 궁전.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 세상에 비극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너무 단정 짓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다면, 정정하겠다.
소설이나 영화나 만화에서 비극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도, 자신에게 비극적인 상황이 오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기원전에 살던 흥수아이도, 조선시대에 살던 돌쇠도, 21세기에 사는 회사원 장그래도 모두.
그렇다면, 세상에는 왜 비극이 존재하는가.
혹시나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서는 언제든지 악한 일을 자행할 수 있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21세기 군사학자들은 전쟁터에 나간 군인 중 6할 이상이 적을 향해 총을 쏘길 꺼려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살인을 저지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람은 생각만큼 선하지도 않지만 생각만큼 악하지도 않다.
“···거짓말이시죠?”
“아니. 내가 한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그, 그러면 저 사람들을 다 쏴 죽이라는 겁니까?”
“······.”
“중위님! 대답 좀 해주십쇼!”
“에이, 아니죠?”
“황궁을 침노할 낌새를 보이면 즉각 저들을 역도로 규정하고 발포하라는 명이다.”
근위대원들은 떨리는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몇 차례 바라보다가 담배를 다 함께 입에 물었다.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을 담배 연기에 담아 애써 날려 보내지 않는다면, 그 질척한 생각에 잠겨 익사할 것만 같았기에.
개중 담배를 피우지 않는 몇몇은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황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황궁이 열렸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 궁전.
군화 특유의 철컥철컥 내딛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우는 가운데, 제일 선두에 선 노년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얼굴은 어렸을 적 누가 두들겨 팼는지 어디 하나 빈말 섞어 잘생겼다고 할 수 있는 곳도 없고, 키도 작달막했지만. 그는 이 나라의 지존이었다.
“도대체 내무부는 지금까지 뭘 한 거요? 어떻게 일 처리를 하면 황궁 앞까지 저런 놈들이 올 수 있는지 모르겠군.”
“···그, 그것이.”
“됐소. 지금 탓해봐야 이미 지난 일이지. 역도들의 흉계가 그리 지독했을 수도 있고.”
“폐하, 근위대를 소집해 저 역도들을 단숨에 밀어내시지요.”
“좋아. 성벽에 있는 병력은 그대로 두고 근위대를 동원하시오. 저 거렁뱅이들을 싹 다 밀어내버리게.”
“예, 폐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
근위대 참모장, 무라비요프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생각했다.
– 난 사람이 그렇게 악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 누구던지 딱 한 번 씩은 더 기회를 줬어요.
– 각하께서요?
– 하, 다들 날 무슨 또라이 새끼 취급하는데. 내가 아니었으면 우리 오귀스트 씨, 뒤무리에 씨는 벌써 몸하고 머리하고 분리돼서 저 차가운 땅에 묻혀있었을 겁니다. 내가 얼마나 피를 덜 뿌리려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는데-
이 세상을 통째로 부수고, 올바르게 재조립하고 있는 그는 누구든지 단 한 번의 기회는 주어야 한다고 했다.
“폐하.”
“음? 저 친구는-”
“무라비요프 준장입니다. 이번에 프랑스군에게서 탈출한.”
“아. 기억나는구려. 무라비요프. 짐에게 뭐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감히 아뢰어도 되겠나이까.”
차르는 윤허의 표시로 손을 올렸고, 무라비요프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저자들도 어떻게 보면 폐하의 신민이옵니다. 반역을 저지르고자 하는 황망한 생각이 아니라, 지금 상황이 너무 열악하여 지푸라기조차 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아아.”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짐 또한 그들이 무슨 반역도라고 생각하진 않소. 우활할 뿐이지.”
“그렇다면-”
“그래서 본보기를 보여야지.”
“···예?”
“저런 놈들을 가만뒀다간 제2의 제3의 역도들이 또 나올게야. 단번에 충격을 주고 뿌리를 뽑아야지.”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 예카테리나에게 학대를 – 암살 시도도 포함해서 – 당하며 살아온 차르, 파벨 1세의 정신세계는 일반인의 것과 너무나도 괴리가 심했다.
“알아들었소?”
“알겠, 습니다.”
무라비요프는 당장에 권총을 뽑아 이 미친 학살마의 머리에 납탄을 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 안 된다.
차르를 완전히 이 러시아에서 지우려면, 차르가 제 스스로 황관을 진흙탕에 넣으려는 지금, 그가 방관해야 했다.
“단 한 블록이라도 넘어오면 바로 발포하시오.”
***
여름 궁전 앞은 수많은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단 한 사람을 찬양할 뿐.
“차르시여! 자비로운 차르시여! 우린 거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저희에겐 힘이 없습니다, 차르 폐하! 우리는 삶 대신 죽음이라는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 차르 폐하를 보우하소서.”””
그 누구도 감히 차르를 헐뜯고, 욕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었다. 자비로운 차르가 황궁에서 나와, 자신들의 손을 잡고 ‘여태껏 얼마나 힘들었느냐.’, ‘그런 어려움이 있었는가.’-라고 위로하리라고.
“황, 황궁이 열린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들 굳게 닫힌 황궁이 열리자 환호성을 질렀다.
차르께서 드디어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시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황궁의 문이 뱉어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민중이 원하는 단 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활짝 열린 황궁이 무거운 소리와 함께 닫히고, 사람들의 표정도 환호에서 점차 의아함으로, 의아함에서 절망으로 물들었다.
“모두 해산하라!”
“차르 폐하의 명이다. 당장 시위를 해산하고 본래의 업으로 돌아가라.”
제국 근위대 중 가장 충성스러운, 차르의 개.
제국 수호 연대(Lifeguard regiment)가 선봉에 섰다.
“폐하! 제발! 제발 한마디만 들어주십쇼!”
“해산하라고!”
“집에 가면 다 죽는단 말이다!!”
굶어 죽거나, 총에 맞아 죽거나. 차라리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전자보다 후자가 더 낫지 않을까.
흥분한 군중 중 여럿이 군인들을 향해 다가가며 소리쳤다.
“제발 길을 열어줘!”
“셋을 세겠다. 그 안에 물러나라! 하나, 둘-”
“폐하!”
“셋!”
– 타앙!!
불길한 총성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득 매웠다.
*
“오, 신이시여.”
무라비요프는 입을 틀어막았다.
제국을 엎어버리고 그 위에 공화국을 짓겠다는 맹세를 했으나, 그는 그래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국민으로 산 정체성이 있었다.
“쏘지 마라! 군인들이여! 우릴 쏘지 마라!”
“우린 무기가 없다! 쏘지 마라!”
“봤나? 놈들이 황궁을 침범하려 들었다. 전군 일제 사격을 개시한다.”
제국 수호 연대가 밀집대형을 이뤄 무차별적인 사격을 시작했다.
명예도 영광도 찾아볼 수 없는, 전장도 아닌 도살장.
이게 지옥이지. 뭐가 지옥이란 말인가.
군인들이 비무장한 민간인에게 총을 쏴대는 게 현실이란 말인가?
“욱, 우웨에엑.”
무라비요프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토사물을 뱉어냈다.
이번에는 제국 근위대 기병대가 검을 뽑아 들고 시위대를 향해 돌격했다.
또다시 한없이 역겨움이 치밀어오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래도 똑바로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 장군님…”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진짜, 진짜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러냐.”
귀족으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기분.
무라비요프는, 처음으로 제 병사들과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느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세묘뇨프스키 연대여! 모두 보았나?! 이 참혹한 현실을 보고 있는가!”
“““예!”””
“이 지옥도에! 여기에! 자비로운 차르 폐하가 있는가?! 하느님의 뜻이 존재하는가?!”
“““없습니다!”””
“이제 차르는 없다! 하느님의 뜻 또한 없다!”
모두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군들! 우린 군인이다!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군인이다! 이곳에는 차르도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 또한 없으나, 시민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제군들! 날 따라 사람들을 구하겠는가!?”
“““예!!”””
“일제 사격을 준비하라! 표적 대상은 수호 연대다! 저들은 더 이상 우리의 동료가 아니다! 민간인들을 잡아 죽이는 악귀들일 뿐이다!”
무라비요프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박차를 가했다.
“악마 파벨을 베고, 러시아를 구하자!”
“““러시아 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