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25
25. 어떤 만남
다음 날 오전, 수연은 유리로 된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관으로 쓰는 청사 건물엔 아직 빈 매장이 많았다. 건물이 둘러싼 넓은 광장 건너편에 있는 유명 스파 브랜드 매장과 운동복 브랜드 매장이 그나마 입점해 있는 매장이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두드려 가며 잠깐 스트레칭을 했다.
“계장님, 첫날이라 정신없으시죠?”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주무관인 정은경이었다.
“네. 그러네요.”
첫날이라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어젯밤 잠깐 내려왔다 새벽같이 올라간 태산 때문에 몸이 뻐근해서 나온 것도 있었다.
퇴근하고 KTX를 타고 왔다는 태산은 복직을 축하한다며 와인과 케이크를 내밀었다. 와인잔이 없어 머그컵에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아서 문제이긴 했지만.
새벽 첫차로 올라간 태산을 생각하며 수연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은경이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커피를 내민다.
“믹스지만 한잔하세요. 오늘 저녁에 환영 회식인 거 아시죵?”
“그럼요.”
수연은 커피를 받으며 대답했다.
“아 참. 계장님도 주말에 서울 가세요? 구 과장님이 동기분 결혼식이라고 서울 가신댔는데.”
“네. 저도 가요.”
수연이 대답했다. 다가오는 토요일은 연수원 동기였던 다영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교육 기간 내내 친하게 지냈던 데다 첫 발령까지 같은 부처로 받아서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다영의 결혼식도 결혼식이지만, 기왕 서울에 올라간 김에 태산과 만나서 보고 싶었던 전시회도 보고, 근처의 맛집도 가 보기로 약속을 했다.
“그때 아프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서기관 되셨을 텐데. 딱 승진 심사 앞두고 아프셔서는.”
“어쩔 수 없죠, 뭐.”
“그래도 얼굴 엄청 좋아지셨어요. 잘 쉬셨나 봐요.”
“네. 이젠 체력도 회복했으니, 열심히 해야죠.”
수연의 말에 은경이 파이팅을 외쳤다. 그리고는 몸을 뒤틀어 뻐근한 허리를 풀며 말했다.
“언제쯤 밥 먹을 만한 식당이 들어올는지. 영 황량하죠?”
“그러게요. 점심 먹기 힘들겠어요.”
“그래도 제가 맛집을 뚫었답니다. BRT 타고서 세 정거장만 가면 꽤 괜찮은 회전 초밥집이 있는데, 어떠세요?”
“좋죠.”
남은 커피를 한입에 마시고 마주 보며 웃었다. 1년을 쉬다가 출근해서 적응하려니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책상에 앉으니 사회인 이수연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어 좋았다.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옆자리의 송근호가 수화기를 귀 옆에 끼고 마침 잘 왔다는 표정으로 수연을 불렀다.
“계장님. 전화요.”
수연은 걸음을 빨리해서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네, 안전문화교육과 이수연입니다.”
– 저, 혹시……. 기억하나요. 태산이 엄마예요.
잠깐, 수연의 호흡이 멎었다.
– 실례가 안 된다면 한번 만나고 싶어서 염치 무릅쓰고 전화했어요.
천천히 숨을 내쉬고 나서 수연은 대답을 했다.
“네. 괜찮습니다.”
– 세종에 있다고 들었어요. 내가 내려갈게요. 언제가 괜찮은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이상하게도 두근거렸던 심장이 천천히 제 박자를 찾는다. 수연은 영혜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내일 마침 동기 결혼식이 있어서 서울 올라갈 거라서요. 괜찮으시면 그 전에 뵐게요. 11시 어떠세요?”
– 그래 줄래요?
“결혼식장 근처에 괜찮은 커피숍이 있어요. 주소 보내 드릴게요.”
– 그래요.
“내일 뵙겠습니다.”
–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이만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고서 수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조금 멍하지만 전처럼 떨리진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나 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 뿐이다.
뭐. 이젠 어쨌거나 상관없지만.
수연은 무슨 일로 보자고 했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라 해 봤자 헤어지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일 텐데, 그건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이라 그런지 겁이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태산에게 말을 해야 하나. 수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수서역으로 올라가는 SRT 열차 안에서 수연은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환영 회식이 늦도록 이어져서 어제는 태산과 짧게만 통화를 했다. 어머니의 전화에 대해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 말하지 못하고 그냥 끊었다.
[어제 어머님이 전화하셨어. 오늘 만나자고 하셔서 잠깐 뵈러 가려고.]메시지 창에 문자를 치다가 빠르게 지웠다. 어느새 열차 안에는 수서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결혼식장이 있는 양재까지는 전철로 이동을 해야 했다.
[나 지금 어머님 뵈러 가는 중이야.]짧게 문장을 써 놓고, 보내기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보내지 않은 채로 메시지 어플을 끄고 핸드폰을 닫았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이니 가감 없이 알려야 하겠지만, 왠지 아직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태산이 알면 분명 만나지 말라 하겠지만 왠지 만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막연하게 자신에게 남겨진 숙제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의 이수연에게 지금의 이수연이 해 줄 수 있는 일. 그리고 지금의 장태산에게 지금의 이수연이 해 줄 수 있는 일.
열차가 멈추었다. 수연은 후, 숨을 내쉬고 핸드백을 들었다.
양재역에서 내려 예식장으로 안내된 컨벤션 센터로 향했다. 그 옆의 빌딩 1층 카페가 약속 장소였다. 막상 카페의 문을 열려니 긴장이 되어서 멈추게 된다.
잠깐 눈을 감고 도망가지 말라던 태산을 떠올려 보았다. 거짓말처럼 괜찮아진다. 너와 나 사이에 다른 옵션은 없다 했었지. 나도 그래. 수연은 한 번 깊게 숨을 쉬고 눈을 떴다.
카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몇 개의 테이블 뒤로 태산의 어머니 영혜가 보였다. 두 개의 커피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모습은 10년 전과 다름없이 곱고 우아했다.
수연이 영혜를 보았을 때, 영혜도 수연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일어서서 수연을 기다린다. 수연은 영혜가 앉은 테이블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영혜의 얼굴에 흐리게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이네요. 예전이랑 똑같아서 금방 알아봤어요. 편히 앉아요.”
“잘 지내셨어요?”
수연의 형식적인 질문에 영혜가 곱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김이 오르는 따뜻한 커피잔을 내밀며 수연에게 말했다.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젊은 아가씨들 잘 마시는 걸로 달라고 했어요.”
“감사합니다.”
수연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영혜도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다. 잠깐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영혜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수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차마 태산이한테 물어볼 수는 없어서, 형주한테 연락해서 수연 씨 연락처 좀 찾아 달라 그랬어요.”
“네.”
“한 번은 만났으면 좋겠다. 다시 만나면 꼭 내가…….”
잠깐 마른침을 삼키더니 영혜가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내가 크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야지 그랬어요. 미안해요, 수연 씨. 그때 내가 너무…….”
영혜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그리고 흐리게 웃으며 다시 수연을 본다.
“내가 너무 오만했어요. 스무 살 어린 학생한테 못 할 짓을 해서 미안해요.”
수연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여러 가지를 상상하고 나왔지만 사과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변명이겠지만 수연 씨한테 그러고 나서, 내가 너무했나 잠깐 후회를 했는데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영혜는 10년 전의 수연을 떠올렸다. 차분하고 영리해서 마음에 들었던 학생이었다. 그 차분한 눈빛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수연의 마음에 금이 쩍쩍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눈빛이, 표정이 자꾸만 생각나서 괴로웠었다. 태산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도 괴로웠지만, 그보다 더 괴로웠던 건 어린 수연이 산산조각 난 자존심을 어떻게든 그러모아 보려 애쓰던 장면이 떠올랐을 때였다.
영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태산이는 어릴 때부터 쉽게 다룰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어요. 고집도 세고 한번 결정하면 좀처럼 바꾸질 않았죠. 그래서 더 겁이 덜컥 났었어요. 애써서 합격한 학교도 그만둔다 하고, 갑자기 독립하겠다고 나가 버린 그런 상황에서 수연 씨를 보는 눈빛을 봤어요. 가슴이 내려앉는데, 이러다 연애라도 하면 정말 잘못되겠다, 했죠. 착실하게 자라서 제 아버지 뒤를 이어야 하는데, 얘가 왜 자꾸 이러나.”
영혜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힘없이 웃었다.
“내가 태산이한테 기대가 컸어요. 남편을 많이 닮았거든요. 남편이 갖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고 태어난 남편의 분신 같았어요. 내가 힘껏 받쳐 주면 크게 되겠지. 아버지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겠지 싶어서 정말 열심히 했는데.”
수연은 조용조용한 영혜의 이야기를 들었다.
“애초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을, 너무 늦게 알았어요. 태산이가, 그쯤에 나를 볼 때마다 눈을 피했어요. 잠깐씩 마주치면 까맣고 단단한 눈으로 나를 보는데, 왜 그러셨냐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하면서, 그냥 눈빛으로만 나를 아프게 하더라고요. 그때마다 움찔움찔 찔리면서도 그래도 나는 내가 잘한 거라고 믿었죠.”
헤어지고 나서의 태산을 상상해 보았다. 그때조차도 자신의 말을 잘 지켜 준 태산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아팠다.
“남편은 태산이를 참 좋아했어요. 워낙 아이들 좋아했지만, 태산이랑은 잘 통하는지 자퇴를 한다 해도, 여행만 다니겠다고 해도 뭐든 해 보라고 했었죠. 내가 발을 동동거릴 때마다 스스로 성장하는 아이라고 걱정하지 말라면서.”
영혜가 입이 마르는지 커피를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는 수연을 보고 가만히 미소를 짓는다.
“남편이 죽고 나서.”
영혜의 목소리가 잠깐 끊겼다. 입술을 깨물고 크게 숨을 쉰 다음 영혜가 다시 말했다.
“끝없이 막막했을 때 태산이가 버텨 줬어요. 나랑 제 동생들을 등에 지고서 무섭도록 성장을 하는데, 그때 깨달았죠. 내 아들이 다 컸고, 내 그릇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아이가 되었다는 걸요.”
수연은 눈앞의 영혜에게서 태산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엔 닮은 곳이 거의 없다 생각했는데, 있었다. 웃을 때 부드러워지는 입매나 이마에서 코로 내려오는 선이 닮았다.
“남편이 죽고 나니까, 그냥 다 부질없고. 내가 그렇게 이루려고 했던 것들이 대체 뭐였나 싶고. 그냥 오래오래 내 옆에서 건강하게만 살아 달라고 할걸. 매일 그 생각만 했어요.”
수연은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어 냈다. 오면서 무수히 많은 상상을 했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을까. 이번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떨지 말고 잘 말해야 할 텐데.
만약에 헤어져 달라거나 왜 또다시 나타났냐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땐 담담히 말을 하려 했었다. 제게 이야기하실 사안이 아니라고. 태산이와 먼저 이야기를 나누시라고. 스무 살 어린 학생도 아니고 이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들이라고.
그런데 상상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오래된 상처가 천천히 아물어 간다.
태산과 자신이 자라는 동안 영혜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이제는 전보다 약해지고 부드러워진 영혜를 보며, 수연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영혜가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고 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이번에는 도망가지 말고 태산이 편이 되어 줘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나왔거든요.”
수연의 말에 영혜가 웃었다. 웃는 입매가 태산과 비슷해서 수연도 그만 미소 짓고 말았다.
“그때 그냥 계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 봤는데, 서로 상처만 주고 헤어졌을 것 같아요. 어머님 때문이 아니라, 저희 둘이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요.”
그냥 그렇게 될 일이라 그렇게 된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산의 어머니가 되었든, 자신의 자격지심이 되었든, 태산의 미안함이 되었든 어찌 저찌 만남을 이었어도 결국엔 헤어지고 말았을 거다.
“웃긴 말이긴 하지만, 지금 다시 만나려고 그때 헤어진 것 같아요.”
수연의 말에 영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깐 핸드폰을 보았다.
“여기 오기 전에 태산이한테 수연 씨 만나러 간다고 메시지 보냈는데, 지금쯤 올라오느라 정신이 없겠네요. 그래도 수연 씨한테 전화는 안 하네.”
수연은 그 말에 놀라 핸드백을 열었다. 혹 대화에 방해가 될까 봐 무음 상태로 설정을 해 놓았었다.
부재중 전화 여섯 통. 메시지가 일곱 개.
기다려. 혼자 가지 마. 어디쯤이야. 전화받아. 연락해. 수연아 제발. 전화해 줘. 태산의 다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수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영혜를 보았다.
“오고 있다고 하죠? 나는 전원을 꺼 버렸거든요. 그동안 속 끓인 거 생각하면, 이 정도 골탕은 먹여야지.”
그 말을 끝으로 영혜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연도 자리에서 일어나 영혜를 마주 보았다.
“잘 지내고, 인연이 되면 또 봐요.”
부드럽게 건네는 말에서 영혜의 마음이 느껴졌다. 수연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건강하세요.”
“이러다 진짜 우리 아들이랑 마주치겠네. 먼저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수연은 영혜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배웅을 했다.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내쉬면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생각보다 긴장 안 했다고 하지만 힘이 탁 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듣느라 거의 줄지 않은 커피를 카운터에 반납하고 밖으로 나왔다. 컨벤션 센터의 입구에 서서 태산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 * *
용인 현장에서 서울까지의 길이 멀고도 멀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태산의 속이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여러 통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수연에게서 도통 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예 전원을 꺼 놓으셨다.
덕수궁 미술관 앞에서 1시에 만나기로 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수연이 나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된다. 그래서 결혼식이 양재역 컨벤션 센터라는 것만 기억하고 그리로 향하는 중이다.
태산은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쯤 수연이 어머니를 만났을까. 무슨 말을 들었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나에겐 말하지 않았나.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불길한 상상은 멈추지 않는다.
‘뒤도 돌아보고 도망가야지. 삼십육계 줄행랑.’
수연이 가볍게 웃으며 했던 이야기가 갑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다. 애매했던 수연의 미소도, 물이 멎었던 날 이별을 말하던 것도 이제 생각하면 전부 어떤 신호처럼 느껴졌다.
수연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 태산의 의지로 밀어붙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거리를 두는 수연을 잡아 키스를 한 것도, 아직 네게 마음이 남았다 명백하게 표시한 것도, 머뭇거리는 수연에게 기다리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던 것도, 밥을 먹자고 한 것도, 커피를 사다 준 것도 전부 태산이었다.
내 마음을 받으라고. 받아만 달라고. 그러면 아프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가장 두려운 것은 수연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숨어 버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상처를 두 번이나 주는 거냐고 원망하며 그만하자고 하면. 이미 상처를 받아 단단하고 견고한 껍데기 안으로 숨어 다시는 나오지 않으면. 아니 그것조차 하지 않고 이대로 숨어 버리면. 나는…….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태산은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예식 때문인지 토요일 오후의 양재역 근처의 도로는 말 그대로 주차장이었다. 태산은 그대로 핸들을 꺾어 근처의 빌딩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리고 달렸다.
수연이 상처받기 전에. 수연이 울기 전에. 수연이 떠나기 전에.
오로지 그 생각으로 뛰고, 또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서 폐에서 비릿한 쇳내가 올라왔다. 저 앞에 컨벤션 센터가 보였다. 그리고 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보고 있는 수연을 발견한 순간 힘이 탁 풀릴 뻔해서 태산은 잠시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