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Corpse-Collecting Warrior RAW novel - Chapter 290
성자(2)
주르르 늘어지다 뚝 끊기는 알림창.
세상이 문득 뒤틀리는 듯한 희미한 이질감.
초월자의 시체를 회수하는 것도 벌써 여러 번.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감각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 시계가 바뀌고, 의식은 설산으로 이동해 있겠지.
눈꺼풀이 내려앉는 찰나의 순간 속에서, 댈런은 회수하고 있는 시체의 주인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올곧은 성자, 댈로스’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정도(正道)를 떠나지 않았던 성기사.
순수하게 악을 벌하고 선을 행하는 플레이를 해보고자 만들었던 캐릭터.
그는 중반부 이후에 등장하곤 하는 영웅, 악마 살해자 루시아 카스타챌드를 본따 만든 인물이었다.
비록 게임을 클리어하지는 못했지만, 만들 당시 목적했던 바 자체는 성공적이었고.
‘죽기 전까지는 악마 도살자라 불렸지.’
기사단 내에서 악마 살해자 루시아와 쌍벽을 이뤘고, 한창 종말이 다가올 때쯤에는 아예 기사단장과도 비교되곤 했다.
최후에 스스로를 불태워 성기사단의 전우들을 전부 부활시키던 광경은, 모니터 너머에서 봐도 충분히 신성함이 느껴지는 장면이었고.
‘하지만 플레이 자체는 그 어떤 회차보다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는 비슷한 컨셉으로 게임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지.’
애초에 이 게임의 근본적인 목표는 하나였다.
종말을 막고 소원의 돌을 얻어, 클리어에 도달하는 것.
때문에 다른 회차의 영웅들은 성자 댈로스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종말을 막기 위해 전우와 친구마저도 쉽게 버릴 정도.
비록 마지막 회차의 댈라인만큼 극단적으로 나가진 않더라도, 백 회차쯤 넘어간 이후에는 NPC와의 교류에 깊게 빠져들 이유가 없었다.
‘···그들 모두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모니터 너머 캐릭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캐릭터들 대부분이 용병이나 은거기인, 혹은 동료도 없는 떠돌이의 모습으로 살아간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비록 전쟁신은 그 영웅들의 삶이 먼저인지, 자신의 마우스 딸깍거림이 먼저인지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한편에 묻어둔 책임이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후우.”
옅은 한숨으로 답답함을 몰아낸 순간, 눈앞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
휘이이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칼바람.
사박.
발목 언저리까지 쌓인 눈밭.
눈이 소복하게 쌓인 테이블과 낡은 사냥꾼의 집기들. 지붕의 처마에는 투명한 고드름이 반짝인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설산의 정경이었다. 차디찬 설산의 공기 속에서 댈런은 문득 온기를 느꼈다.
뽀드득. 뽀득.
그때 등뒤에서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아, 벌써 때가 그리 되었나요.”
산길을 따라 내려온 건 금발의 남자였다. 낡은 로브를 걸친 채, 지게에 굵은 나뭇가지를 한가득 짊어진 남자의 모습.
“신께서는 이때가 언제 올지 가르쳐주지 않으셨죠. 영겁과도 같았지만, 돌아보니 그리 길지도 않았군요.”
“그쪽은···.”
“댈로스라고 합니다. 미욱한 몸으로나마 성기사단에 몸을 담고 있는···아니, 한때 담았던 신의 종이죠.”
남자가 살짝 웃으며 지게를 테이블에 기대놓았다. 그 동작에 품 넓은 로브 자락이 펄럭이며 남자의 맨살을 드러냈다.
신성문신이 흐릿하게 새겨진 목과 쇄골, 손등과 얼굴.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신성문신을 새긴 성기사는, 손을 탁탁 털고 지게 곁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생각해보니 제가 누구인지야 이미 알고 계시겠군요.”
“그렇소.”
“이곳에 오신 목적 역시 짐작할 수 있을 듯하네요.”
성기사는 어깨어림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쓸어넘겼다. 입가에 잔잔하게 깔린 미소와 정중하면서도 사근사근한 말투.
미형의 얼굴도 얼굴이지만, 그가 키워온 캐릭터답지않은 분위기였다. 댈런은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굉장히 평온하시군.”
“다른 영웅분들과 비교해서 말씀이시죠?”
성기사가 웃었다.
“진심으로 신을 믿는다면 평온하지기 마련이죠. 천지를 자아낸 창조주에게 시선을 맞추게 된 이후에, 속세에 큰 미련이 없어지고 가치들이 재정의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니까요.”
“그거 돈주머니 가져다 바치라는 사이비 교주나 할 법한 소리인데.”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저만 봐도 아실 수 있지 않나요? 당장 밥 지어먹으려고 나무를 한 짐이나 해왔는데?”
댈런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오두막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하긴 지금까지 만났던 초월자들 중에 밥 챙겨먹는 놈은 없었지. 애초에 죽은 뒤에 밥 먹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먹는 것은 즐겁습니다. 꼭 필요한 금식이 아니고서야 인생의 낙 하나를 배제할 이유가 없죠.”
“그건 맞는 말이군.”
“역시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다니까요. 저희는 뭔가 통할 것 같았습니다.”
“그건 또 사이비 같은 이야기고.”
성기사의 눈이 과장스레 동그래졌다. 평소에 놀려먹기 좋은 반응이었다.
“······.”
잠깐의 침묵 사이, 산봉우리에서 내려온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지나갔다.
따뜻한 봄바람이었다.
날카로운 설산의 냉기를 품은 칼바람은, 성기사의 곁을 지나치면서 자연스레 이빨을 감추고 온화해졌다.
잠시 말을 고르던 성기사는 삐걱이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입을 열었다.
“믿었습니다.”
성기사 특유의 희미한 미소. 언젠가 루시아나 기사단장에게서도 봤던 것 같은 표정.
“제 믿음의 대상은 신밖에 없습니다. 허나 그렇기에 당신 역시 믿었습니다. 신께서 당신을 택하셨으니 그 선택을 믿었고, 그 선택을 받을 만한 성품과 능력을 지닌 당신 역시 믿었죠.”
“······.”
“당신은 저의 시작과 끝을 알고 계시니, 저를 찾아오셨다는 건 살리고 싶은 이들이 생겼다는 이야기겠죠. 다행입니다. 당신이 이 대륙에서 마음 둘 곳을 찾았다는 사실이.”
끼익.
성기사가 일어섰다.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각막에 새긴 신성문신의 발동이었다. 뒤이어 이마와 뺨, 목과 쇄골 역시 빛나기 시작했다.
파아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촘촘히 새겨진 직선과 곡선, 문자들이 빛을 뽐낸다.
저마다의 의미를 담았음에도, 따로 노는 일 없이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빛을 발하는 문신.
이내 전신이 새하얗게 빛나게 된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어서 가십시오. 상황이 그러하다면, 아쉽지만 더이상 담소를 나눌 시간은 없을 테니까요.”
빛이 오두막 뒷마당을 뒤덮었다. 마치 밝은 전구를 정면에서 바라보듯 희뿌옇게 일그러지는 시야.
전성처럼 주변을 울리기 시작하는 목소리에 댈런은 무심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을 가득 채우던 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설산과 오두막 뒷마당, 나뭇짐을 해온 성기사의 모습 대신 보이는 건 함락된 백금 구역 거리와 거대한 포식자의 시체뿐.
일렁이는 알림창들은 그 광경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댈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대륙 남서부의 투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대전쟁에 참가한 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지능 +1, 마력 +1] [대전쟁에 참가한 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 [올곧은 성자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2, 기량 +2, 체력 +2, 감각 +2, 지능 +2, 마력 +2, 성기사단의 신성전문(A), 천벌(고유), 광역 부활(고유)]폐부로 스며든 호흡이 활력을 온몸으로 실어 나른다.
단순히 능력치의 상승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극도의 고양감.
청명한 기운이 혈관을 맴돌며 신경을 일깨우고, 피부에 자리잡은 채 은은한 생기를 퍼뜨린다.
댈런은 숨을 천천히 가다듬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손등과 손바닥 전체에 걸쳐 복잡하게 새겨진 선과 문자들이 희뿌옇게 빛을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신성전문(神性全文)’
수백 회차의 플레이 중에서도 단 한 번만 얻어낸 스킬.
성기사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신성문신의 총아.
스킬을 얻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이 게임에서, 고등급 스킬을 익히는 건 운과 실력 모두 따라줘야 하는 기연이다.
성기사단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의 스킬인 신성전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모든 신성문신을 하나의 육신에 새기고, 실전된 것들까지 복구해서 각인시켜야 얻을 수 있는 스킬이지.’
신성문신의 숫자가 곧 성기사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낸다는 걸 생각하면, 댈로스가 기사단장인 에드거 라인하르트를 넘어섰다는 풍문도 과언이 아닌 셈.
허나 그 강대한 능력마저도 역시 뒤따라 얻은 고유 스킬, 광역 부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댈런. 아무래도 내가 네 생각을 잘못 읽은 것 같구나. 지금 네가 하려는 일···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인 것처럼 보인다.]생각이 표층 의식에까지 닿은 걸까. 걱정이 묻어나는 적창의 물음에 댈런은 피식 웃었다.
[우린 지금 에낙사구스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느니라.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 해.]틀린 말은 아니다.
광역 부활이 요구하는 대가는 신성력의 완전한 소실.
이 스킬을 얻은 시점이 성기사로서 가능성의 끝을 본 회차 극후반부라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인생 전체를 날려버리는 행위라 봐도 과언이 아니겠지.
실제로 완숙한 A등급 스킬인 신성전문을 포함해, 모든 기적과 성기사단의 기술을 잃어버린 댈로스는 청린의 한 입 거리 간식이 되었고.
‘적창. 허튼 소리 마시오.’
[그게 무슨···.]‘모든 걸 잃어버리고 거둔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소?’
동료 마법사들을 외면한 전격술사.
평생의 친우를 버리고 은거한 대장장이.
인간성 자체를 쏟아버린 흑마법사와, 신위에 올랐음에도 자유를 빼앗긴 투신.
소중한 인연을 스스로의 손으로 놓아버리고, 자신과 타인의 평범한 일상을 짓밟아가며 승리를 갈구한 초월자들.
허나 저마다의 대의를 가졌던 영웅들이 마지막에 바라본 것은, 모든 걸 잃어버린 채 괴물이 된 자기 자신이었다.
‘내가 그 비극의 원흉일지, 아니면 그저 관람자일 뿐이었을지는 알지 못하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약속했소.’
적어도 이번 회차에서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겠다고.
그건 모니터 너머를 스쳐간 영웅들에게 하는 약속인 동시에, 이미 한 번 소중한 것들을 잃어번 스스로에게 내건 맹세이기도 했다.
[마음대로 하거라. 어찌되건 나는 너의 창이니.]“···댈런.”
그때 힘없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루시아였다.
그녀는 석상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댈런을 이 장소까지 이끈 외눈 외팔의 성기사와 꼭 닮은 석상이었다.
“파른은 늦었습니다.”
“······.”
“엘가이아 마탑주님의 마지막 술식은 강력했지만,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는 비의였습니다. 시간선을 앞으로 감아버린 상태는···원래라면 몇 시간도 유지될 수 없을 예정이었어요.”
짧은 몇 마디의 상황설명.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애초부터 미래에 직접 간섭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기적.
아무리 대마법사가 스스로의 목숨을 바쳤다고 해도 그 한계는 여전할 테였다.
“술식의 마력이 전소한 뒤에는 스스로 값을 치르며 시간선을 고정시킨 거군.”
“···예. 성기사다운 최후죠.”
생명력까지 태워가며 버텼다.
댈런 한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
그 대가는 본래의 시간선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존재 자체가 굳어 멈춰버린 죽음.
오래 전 알리아트의 손에 소멸한 만신전의 화신체를 떠올려보면, 시간선의 괴리로 인한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영역일 터.
“걱정 마시오.”
“···예?”
그렇기에 상관없었다.
확정된 죽음을 되돌리는 역리(逆理)가, 아무리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해도 감안할 수 있었다.
그건 신을 죽인 흑마법사도, 신위에 닿은 투신도 닿지 못한 미답의 기적.
루시아의 머리에 부드럽게 손을 얹은 댈런은, 다시 한 번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적어도 아직은 이별할 때가 아니오.”
그의 전신에 빼곡하게 새겨진 신성 문신이, 찬란하게 빛을 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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