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Corpse-Collecting Warrior RAW novel - Chapter 294
결전(3)
라필렘.
역병과 뒤틀림의 악신.
세간에는 때로 질투와 원망의 신이라는 조금 고상한 어감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놈의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부그르르! 울컥!
숭숭 뚫린 구멍으로 진물과 꿈틀대는 덩어리들을 토해내는, 작은 동산 크기의 종양들이 무엇보다 뚜렷한 증거였고.
촤아악! 쏴아아아······.
악취를 넘어선 독기를 아지랑이처럼 피워올리며, 해변가에 동식물의 파편을 배달해대는 고름의 바다 역시 이를 대변했다.
결국 라필렘의 환영궁전은 끊임없는 변질로 점철된 지옥도일 뿐이었다.
고상하게 포장한 질투와 원망이라는 단어 역시, 그 변질의 동기와 향방을 내비치는 그림자에 불과한 표현이었으니까.
자신보다 완전해 보이는 대상을 시기한 끝에, 스스로를 강제로 변이시킬 정도의 극단적인 질투심.
그러고서도 불완전한 스스로의 모습과, 닿지 못할 완전성을 향한 원망.
용신을 제외한 악신과 악마들은 인간의 악의에서부터 탄생한 존재라던가.
예전에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맥락을, 대지옥 한가운데 선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폐부에서 불타 정화되는 유독성의 공기를 느끼며, 댈런은 저 멀리 지평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스물여섯 전당의 힘을 이용해, 원본의 대지옥에 한없이 가깝게 고정시킨 지옥도.
허나 대여섯 개의 전당을 한데 뭉쳐 구현했음에도, 정말로 원본처럼 무한에 가까운 공간은 아니다.
‘저쯤인가.’
이미 댈런의 예민한 감각은 마력풍의 흐름 속, 출구의 존재를 또렷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지평선 저 너머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출구를 통하면, 이곳과 연결된 다른 전당들로 건너갈 수 있을 터.
찾는 것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벌어질 충돌이 시간을 잡아먹을 뿐.
그의 드넓은 감각 범위 곳곳에서, 일행의 향해 다가오는 지옥의 존재들이 벌써부터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허허···왠지 이 장소, 어디선가 본 기분이 드는구만.”
같은 정경을 보던 펠버가 나직하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락기사 에버로크 글라스덴······. 놈이 에스트라 요새에 덧씌웠던 지옥의 그림자가 라필렘의 환영궁전에서 비롯된 것이었군요.”
“맞네.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네만, 전대 부단장은 조금만 늦게 처리했어도 큰 위협이 될 놈이었어.”
오래 전 성기사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재의 마녀와 내통하며 성기사단의 요새들을 점거하고 농성하던 부단장 에버로크.
자신의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하자마자 도망친 놈은, 머지않아 청린의 권세를 등에 업고 대대적으로 기사단을 침공해왔었다.
놈과 지지부진한 싸움의 결착을 지었던 곳이, 바로 마물 군세에게 점령당해 폐허가 되었던 에스트라 요새.
악신 라필렘에게 영혼을 팔았던 놈은, 요새 전체에 라필렘의 환영궁전 외곽 지대인 우묵함의 정원을 덧씌웠었다.
‘노인장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골치 아파질 뻔했지.’
비록 그림자일 뿐이었지만, 당시의 일행에게는 그마저도 상당한 위협이었다.
경험은 뭐든 간에 다 이득으로 돌아온다고, 한 번 겪어본 만큼 다시 상대하기는 오히려 수월해진 셈.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라필렘의 환영궁전은 다섯 대지옥 중 댈런이 가장 자신 있게 무너뜨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흑마법사 댈룸 자이브로 플레이하던 회차에서는 아예 지옥 전체를 접수한 적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지옥을 상대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여유가 많지 않았다.
대지옥의 모습으로 변질된 스물여섯 전당은 미궁도시의 여섯 번째 구역.
에낙사구스는 지금 일곱 번째 구역을 손에 넣고 그 힘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놈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도시 전역을 망라하는 결계 안쪽은 그대로 지옥이 되어버리겠지.
부활의 기적으로 정화하기 이전, 지옥에 오염되었던 상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참극이 펼쳐질 테였다.
‘금강궁의 귀족들이 시민들을 구해내고 있지만···숫자에는 장사 없는 법이지.’
기존에도 수백만이 살던 거대도시 팔시온이다.
곳곳에서 난민이 몰려든 지금, 도시 인구는 평시의 몇 배에 달할 정도였고.
초월자들이라 해서 정말로 무한한 힘을 가진 건 아니었기에, 에낙사구스가 일단 목표를 달성한다면 살육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수백만 이상의 영혼과 육신이, 현세에 나타난 지옥에 산 채로 저당 잡히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겠지.
설령 부활의 기적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지옥과 하나가 된 도시와 시민들을 구해낼 방법은 없었다.
그저 완벽하게 불태워 소멸시키는 게 가능할 뿐.
“···이런 게 도시 한가운데 있었으니, 도시가 그리도 끔찍하게 변질되었던 것이군요.”
스릉.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상념을 파고든다.
댈런은 시선을 돌렸다. 청년 파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댈런 님, 먼저 가십시오.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파른!”
루시아였다. 그녀는 파른의 어깻자락을 거칠게 잡아당기기며 소리쳤다.
“너 미쳤어? 대지옥에 혼자 맞서겠다고?”
“아닙니다, 심문관님. 시간만 벌겠다는 이야기에요.”
“시간만 벌겠다고? 아무리 너라도···.”
“루시아 카스타챌드 심문관.”
나직한 중저음의 목소리.
성기사를 호명하는 파른의 음색은 단장 에드거를 닮아있었다.
“······.”
순간적으로 말을 잃은 루시아에게서, 파른은 한 걸음 물러나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쳤다.
청년의 빈 소매는 조용히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서 이야기했다.
“루시아 심문관님. 구해주시고 양육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앞으로도 과거의 저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허나 지금의 저는 검성입니다. 승산과 전황을 떠나, 제가 마땅히 서야 할 전장을 피해서는 안 되겠지요.”
자박.
다시 한 걸음 멀어지는 발걸음. 일행과 거리를 벌린 청년이 고름의 바다를 향해 몸을 돌렸다.
키이이잉······.
등 돌린 청년의 뒷모습에서 밝은 빛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신성 문신의 범위를 넘어선 신성력이었다.
육안으로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짙은 권능이자,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환영궁전의 독기를 몰아내기 시작하는 정화의 빛.
“댈런 님.”
“왜 그러냐.”
“최대한 오래 버텨보겠습니다. 그 간악한 악신의 목을 꺾고, 놈의 지옥을 불태워주십시오.”
파른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악의 패망과 인류의 보전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두 삶을 위해서도.”
“······.”
두 삶이라.
그러고 보면 청년은 미래의 인물이었다.
장성한 소년의 키는 댈런과 그리 차이 나지 않았다. 몸의 골격과 품은 힘의 밀도 역시, 소년일 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고.
마녀의 제물들 사이에서 구해졌던 어린 용병 소년이, 어느새 은인들과 시선을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한 모습.
저 모습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이나 흐른 결과물일까.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청년은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했을까.
“···그래.”
묻고 싶은 게 없을 리 없다.
비록 그는 기로에서 한쪽을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쪽 역시 바라 마지않는다는 건 여전했으니까.
펠버의 주문은 이 시대에 실재하는 소년 파른의 존재 위에, 미래의 모습을 일시적으로 고정시키는 대술식.
시간선을 역행하는 술식이 가져온 건, 비단 검술 실력과 신성력뿐만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무리하지 말아라. 말했지만 두 번은 못 살려준다.”
하지만 지금은 문답을 이어갈 때가 아니었다.
댈런은 청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소년일 때와 달리 손을 적당히 들어 올려서, 윤기 흐르는 금발을 사정없이 헤집어놓는 손길.
청년은 부스스해진 머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보조개는 용병 소년일 때와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걱정 마세요. 주문에 내포된 마력이 소실될 즈음이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칠 테니까.”
쿵─!
질척한 대지가 들썩였다. 헤어짐의 신호였다.
댈런은 말없이 파른에게서 등을 돌려 달렸다. 그의 뒤를 나머지 일행이 따랐다. 루시아가 마지막이었다.
“······.”
그 멀어짐을 한동안 응시하던 청년은, 어깨를 휘휘 풀며 검을 들어 올렸다.
지옥의 군세가 몰려오고 있었다.
새까만 개미 떼처럼 사방에서 달려오는 악마와 마물의 군세.
고름의 바다를 부글거리며 뚫고 올라오는 거대한 살덩어리.
낭종에 뒤덮인 땅은 지글지글 끓으며 크고 작은 변이체들을 쏟아내고, 하늘에서는 온갖 흉측한 벌레를 버무린 듯한 괴물들이 활강해 내려온다.
베고 또 베어도 끝이 없으리라는 건, 한쪽 눈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전쟁의 신이시여.”
끝없는 군세 앞에서, 파른은 천천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중심으로 넘실대던 신성력이, 한순간 폭포같이 사방으로 쏟아져나왔다.
「영역 완전개방 : 흉터에서 비롯된 전쟁신의 칼날」
신성력이 흘러넘친다.
오염된 땅을 태우고 공기를 불사르며,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는 신성력의 불길.
빛에 둘러싸인 청년의 모습은 마치 땅에 내려앉은 작은 태양 같았다.
머지않아 그에 화답하듯 고름의 바다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
놈이 포효했다.
지면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고, 샛노란 고름의 바다가 파도로 변해 땅을 휩쓴다.
산맥의 일부를 끌어다가 놓은 것 같은 거체를 올려다보며 파른은 슬쩍 웃었다.
그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악마 때려잡아본 게 몇 년 만인지.”
외팔에 쥐어진 검이 가볍게 공기를 갈랐다.
「참옥일검(斬獄一劍)」
그건 지옥의 바다를 둘로 쪼갠 검성의 빛이었다.
***
출구를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현실에 강림한 대지옥의 바탕은 결국 금강궁의 스물여섯 전당.
출구라고 여겼던 통로 역시, 다른 전당으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일 뿐이었던 것.
“여긴···.”
[대룡전이군.]그렇게 건너간 다른 전당들 역시 지옥에 삼켜져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낙사구스가 금강궁의 심처를 요새화한 방법이, 대여섯씩 묶은 전당 위에 지옥을 고정시키는 방식이었기 때문.
일행의 눈앞에는 한때 성기사단 위에 드리웠던 붉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수백 마리 용의 울부짖음이 뾰족한 산맥과 구름 사이를 메아리쳤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용신 뒈지면서 여기도 사라진 거 아니었소?”
[악신을 죽인다 하여 대지옥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힘을 상당 부분 잃을 뿐이지. 그대로 둔다면 소멸하든 새 악신이 나타나든 하겠으나, 이번에는 에낙사구스가 남은 걸 집어삼킨 모양이구나.]시발. 그럼 그 도마뱀 새끼들이랑 또 싸워야 한다는 건가?
다행인 점은 용신 때와는 달리, 대룡 열세 마리 합체로봇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다.
이곳에 있는 용 군세 역시 당시 패퇴해 도망치거나 자리에 없어 살아남았던 남은 용들을, 에낙사구스가 죄다 긁어모아 어설프게 재편성한 것일 뿐.
세로로 찢어진 녹갈색 눈이 번뜩였다. 버번이 말을 이었다.
[독립된 주체로서의 자의식마저 잃어버린 이들에게, 지성체에게 주어져 마땅한 참회의 기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터.]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