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17
다들 놀라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칠마성전이라고요?”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막 방 안으로 들어온 인물을 바라보고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아….”
풍채가 좋은 커다란 몸, 손자를 돌보는 할머니처럼 인자한 얼굴, 그녀는 내 기억 속의 대수녀원장인 안젤라였다. 현재는 부수녀원장이었지만.
“부수녀원장님.”
주변의 수녀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나는 그녀를 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과거 안젤라와는 마왕에 대항한다는 기치 아래 긴밀하게 공조했었으니까.
특히 발푸르기스의 사망 이후에 부쩍 가까워졌다. 발푸르기스는 내겐 동료였고 그녀에겐 딸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실감이 우리에게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선물했었다.
“제가 보았습니다.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아마 안젤라라면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그녀는 버럭 화를 내는 게 아닌가?
“대체! 이 황당한 자는 누굽니까! 칠마성전이라니! 그 책은 천 년 전의 전설일 뿐입니다!”
안젤라의 호통에 주변에 있던 원로, 고위 수녀들이 모두 움찔한다.
“대수녀원장님이 위중한 이때에 일개 용병과 실랑이를 벌여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부수녀원장님.”
“얼른 내보내세요. 발푸르기스 자매가 손님으로 데려온 모양이니 내쫓을 것까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실로 오지 못하게 막으셨어야죠! 여러분!”
따끔하게 혼내는 안젤라의 태도에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돼 버렸다. 나는 금세 허풍선이로 전락했다. 수녀 몇이 내게 달라붙는다.
“당신에게 따로 벌을 내리진 않겠습니다. 얌전히 머물다 떠나세요! 지금 본회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나는 떠밀려 나가면서도 약간 의아해졌다. 기억 속의 안젤라는 누구보다도 온화하고 지혜로운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칠마성전을 언급했다고 이리 몰아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윽박지르듯 쫓아낸다?
이상한데….
“칠마성전이라니! 세상이 흉흉하니 헛된 소리나 늘어놓는 사람들이 나타나는군요!”
심지어 대놓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러자 내게 잠시나마 혹했던 수녀들이 모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부수녀원장님. 저희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잠깐 사이에 나는 저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배제돼 버렸다. 갈 때 가더라도 억울해서 좀 따져야지 싶었는데, 그 순간 안젤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차분한 눈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선,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얌전히 자리를 떴다. 발푸르기스도 함께였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미안하구나. 수녀님들이 저렇게 완강하실 줄은 몰랐다.”
발푸르기스는 고개 숙여 사과하며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녀는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발러, 그대가 어둠에 대해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대수녀원장님에게 도움이 됐을 텐데….”
“꼭 그렇게 실망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응?”
난 대답 대신 앞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아까 보았던 원로 수녀 중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름길로 앞질러 온 모양이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발러님.”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이 원로 수녀는 분명히 부수녀원장인 안젤라가 보낸 이겠지. 아마 안젤라는 모두의 이목을 피해서 나와 만나고 싶은 듯했다. 우리는 곧 은밀한 장소로 안내되었다.
“예서 기다리면 오실 겁니다. 저는 이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젤라가 도착했다.
“부수녀원장님!”
발푸르기스는 어머니에게 애교를 부리는 딸처럼 가서 안겼다.
“원, 우리 말괄량이 아가씨. 수녀원에선 갑옷을 벗고 있으렴. 갑옷을 입고 안겨오면 이리 딱딱하고 차갑잖니.”
“네, 알겠어요.”
발푸르기스의 모습은 말 잘 듣는 착한 딸 같았다. 나는 그녀가 왜 이리 이 수녀회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제자매가 없는 그녀의 공허함을 수녀들이 채워준 거겠지.
“발러님. 부수녀원장인 안젤라입니다.”
내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모습은 과연 기억 속의 안젤라 그대로였다. 나 역시 깃털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슈판다우의 발러입니다.”
“발푸르기스를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애초에 경의 도움으로 제가 살았습니다. 구명의 은혜에 보답한 것뿐입니다.”
“겸손한 분이시군요. 발푸르기스가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역시 아까 모두 앞에서 보인 태도는 거짓이었구나. 안젤라는 내가 발푸르기스를 구해줬단 것만으로도 상당한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하지만 대수녀원장의 상세가 좋지 않기에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발러님. 칠마성전을 보셨다고요?”
“네, 보았습니다.”
확언을 하자 안젤라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세상에 그런 일이. 전설 속의 성유물이 실존했었다니.”
“제 말을 믿으십니까?”
“솔직히 쉽게 믿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거짓이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지요. 그래서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역시 일 처리가 합리적이야. 같이 일하기 좋은 할머니라니까.
“그리고 이건 발러님의 안전을 위해서기도 합니다. 저희를 설득하기 위함이셨겠지만 칠마성전을 봤다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시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아직 수녀원에 배신자가 남아있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제가 경솔했군요.”
만약 오늘 그대로 대수녀원장을 구했다면, 내 행적이 페자무트의 귀에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자기 흉계를 막은 자를 페자무트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 게다가 칠마성전의 내용은 마왕도 탐내는 지식이다.
나를 붙잡아 고문해서라도 그 내용을 토해내게 할 게 뻔하다. 안젤라는 그걸 예견하고는 아까 그리 행동했던 거다. 역시 지혜로운 자로구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본회를 위해 나서주신 분이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설령 칠마성전이 아니더라도 대수녀원장님을 구한 일은 비밀로 하는 게 좋습니다. 명성을 얻으시겠지만 페자무트의 원한을 사게 되실 테니까요.”
은원의 굴레는 그 끝이 없다. 마왕의 노여움을 샀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직은 마왕과 척을 질 때가 아니었다.
“발러님. 칠마성전을 보았다는 점을 제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일이다. 나를 존중하는 것과 그건 별개다.
“물론입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어둠의 대군들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것은 은밀한 지혜를 전승한 자들만이 알 법한 내용이었다. 한데 내가 막힘없이 대답하자 안젤라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약관이 넘은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신데! 어찌 그런 깊은 지식을 쌓으시다니!”
나는 더 나아가, 안젤라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다른 이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기가 막혀서 입을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발푸르가 수녀회의 부수녀원장은 지혜의 상징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그런 부수녀원장에게 일개 용병이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라, 기회가 기회인만큼 알려주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옆에 있던 발푸르기스도 놀란 기색이었다.
“…발러. 그대의 지식은 어마어마하구나.”
눈동자가 커진 건 안젤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처음에 시험감독관 같은 태도였지만, 이내 선생님에게 질문하는 학생과 같은 태도로 변했다. 나는 수녀회의 관심사인 마왕 페자무트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페자무트가 섬기는 어둠의 대군은 오랜 시간 비밀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대수녀원장님의 용태를 보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짐작하는 바가 있습니다만….”
“아… 발러님의 지식은 경이롭군요.”
안젤라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말로 칠마성전을 보신 거라 밖에 생각할 수 없네요. 지금 발러님이 말씀하신 것들은 수녀회의 비밀스러운 서고에 보관된 책에도 없는 내용이니까요.”
그녀는 태도를 바꾸어 조심스레 묻는다.
“현인(賢人)께서는 누구십니까?”
아마 내가 그냥 겉보기와 다른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현인이라니요, 당치 않으십니다. 불학무식한 자일뿐입니다.”
“저를 바보로 아십니까? 비록 속세와 인연을 끊은 수녀라 해도 평범한 용병이 위기에 빠진 수녀기사를 구하고, 칠마성전의 내용을 줄줄 외우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일 언젠가 사정을 밝힐 날이 올 겁니다. 그저 인류의 수호에 힘쓰고자 하는 무명소졸이라고만 알아주십시오.”
일단 선을 긋자 안젤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내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렇게 본 수녀회를 위해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대수녀원장님께 안내하겠습니다.”
우리는 비밀 통로를 통해 대수녀원장이 머물고 있는 밀실로 향했다.
“안에 번을 서고 있는 자들은 제 휘하의 믿을 만한 수녀들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길. 오늘 발러님의 행적은 비밀에 붙여질 겁니다.”
안젤라가 어떻게든 날 보호해 주고자 하는 게 느껴졌다.
“여기군요.”
육중한 문 앞에 도착했는데 사악한 기운이 안쪽에서부터 넘실넘실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세요. 방안의 광경을 보고 자칫하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안젤라는 나와 발푸르기스에게 축복을 걸어줬다. 강력한 어둠과 마주하게 되면 미치거나 죽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안젤라의 안내로 안에 들어가 보니 작은 체구의 대수녀원장이 하얗게 빛나는 신성진 안에 누워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신성진의 근처에는 고위수녀들이 무릎 꿇고 앉아 끊임없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아!”
나는 대수녀원장을 집어삼킨 어둠을 보고 탄식을 내뱉었다. 시커먼 어둠이 그녀의 가슴을 중심으로 마치 거미다리처럼 돋아나 있었다.
나는 곧장 그 어둠의 정체를 파악했다.
-위대한 죽음의 기운.
-거절할 수 없는 숙명의 주인.
“발러님, 알아보시는 겁니까?”
“…네.”
설마 내가 보자마자 알 줄은 몰랐던 듯 안젤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아니겠는가. 수녀회의 날고기는 자들이 매달려도 정체가 뭔지 파악을 못했었으니. 하지만 지금 제일 동요하고 있는 건 나다.
“저것은… 어둠의 대군인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의 죽은 화신입니다.”
수녀회에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게 당연하다. 그도 그럴 게, 저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의 죽은 화신은 후반부의 중요 스토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하지만 가장 내 관심을 끄는 건 그게 아니었다. 저 힘은, 플레이어가 흡수 가능한 종류였기 때문이다.
“죽은 화신입니까? 그것보다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는 들어본 적이 없군요.”
“그럴 테지요. 인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둠의 대군이니까요. 칠마성전을 본 이만 알고 있습니다. 묘지기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무덤을 관장하는 자입니다. 즉, 사령술의 힘을 다루는 존재지요.”
“사령술! 어찌 그리 끔찍한….”
안젤라는 듣기만 해도 거북하다는 듯 성호를 그린다.
“저 힘은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의 화신인데, 오래 전 죽어 실체만 남은 껍질이로군요. 하지만 그 껍질조차 치명적이지요.”
“그렇다면 저 사체가 대체 무슨 용도로 쓰이는 겁니까? 적을 저주해 죽이는 용도인가요?”
안젤라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대수녀원장의 상태만 보면 그렇게 보이겠지. 하지만 저 죽은 화신의 사체의 명확한 용도는 그게 아니었다.
“저것은 강력한 힘을 선사하는 ‘어둠의 성유물’입니다. 모든 마족들이 탐내면서도 꺼리는 것입니다.”
발푸르기스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탐내면서도 꺼린다? 이상하구나. 마족이란 힘을 얻기 위해선 부모조차 파는 자들이다. 설령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거리낌이 없을 텐데?”
“단순 저주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얄궂은 사체는 힘을 주는 대가로 목숨을 요구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건 어둠의 성유물 중에서도 상당히 지랄 맞은 종류였다. 죽은 화신에 담긴 힘을 받아들인 자에게 능력을 주지만, 그 대신 목숨을 가져간다.
아마 쫄보인 페자무트는 저걸 손에 넣고도 사용할 방법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 했겠지. 그러다가 궁여지책 끝에 함정으로 쓴 모양이었다. 제법 머리를 굴려 괜찮은 방법을 찾아냈다고 자평하고 있겠지. 실제로 잘 먹히기도 했고.
하지만 특별한 방법을 알고 있다면 저 어둠의 힘을 받아들이면서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제가 저 힘을 뽑아내 대수녀원장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겁니까!”
“그게 정말인가! 발러!”
반색하는 안젤라와 발푸르기스.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단, 제 요구를 들어주셔야겠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안젤라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천사의 심장입니다.”
아마 이들은 대수녀원장을 위해 천사의 심장을 쓸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수녀원장이 어둠의 힘을 받아들일 리 없으니 결국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일에 불과하다.
반면 나는 다르다. 천사의 심장으로 대가를 치르고 어둠의 힘을 취한다.
이건 다시없을 기회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죽은 화신을 흡수하고 얻게 되는 직업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자’. 용사와도 맞먹는 사령술사 계열의 최상위 직업이었으니까.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적으로 등장한 피도 눈물도 없는 자가 리치들의 호위 속에서 해골용을 타고 나타난 모습을. 사방을 가득 채우는 죽음의 냉기가 모든 생명체를 얼러버렸었다.
그건 실로 장관이었다.
그는 망자의 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