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177
“만약에 제가 돕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질문에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가 피식 웃는다.
“뭐, 영원히 여기 있어야지.”
“…제 혼이 이 테멘 앙 키에 귀속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물론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혼이 귀속되지 않아도 물리적으로 잡아둘 방법이야 많으니까.”
그는 내가 교활하니까 언젠가 탈출할 거라고 했다.
“하나 그전까지 네놈의 고향이 불타고, 사랑했던 모든 게 무너져가는 꼴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지.”
결국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군. 내심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후배.
여태 입 다물고 있던 누미디아의 사기꾼이 조용히 말을 건 것이다.
-태연한 척해요.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는 제가 제압된 줄 알고 있어요.
-뭐야? 그래서 말 못하던 거였어?
역시 사정이 있었구나. 어쩐지 이 수다스러운 여자가 입 꼭 다물고 있는 게 이상하더라.
-아마 제가 끼면 후배를 설득하는데 방해될 거라 여겨서겠죠.
-그나저나 아퀼라가 배신한 거 맞아?
시간이 없어서 중요한 걸 바로 물었다. 그녀라면 제대로 대답해 줄 거라 여겼는데, 의외로 말꼬리를 흐렸다.
-저도 모르겠어요…. 사실 여태 그분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퀼라의 파트너였던 누미디아의 사기꾼조차 그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후배, 어떻게든 우리가 대화할 시간을 만들어줘요.
-알겠어.
나는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에게 왕관을 쓴 후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또한 앞으로 그가 통치하는 우주가 어떻게 되는 건지도 궁금하다고 했다.
내게 대답을 강요하던 그는 질문에 흥미를 느낀 듯한 표정이었다.
“우주의 지존으로서 말인가!”
그는 허영심에 들 떠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그 사이 재빠르게 마음속으로 누미디아의 사기꾼과 얘기를 나눴다.
-후배, 지금 우리는 최악의 상황이에요.
-굳이 말 안 해줘도 안다고.
-어차피 그의 제안에 응해야 해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여지를 남기는 겁니다. 반전을 일으킬 여지.
일단 선배 사기꾼의 의견을 경청했다.
-저는 이것을 씨앗을 심는다고 표현해요.
-재밌는 표현이네.
-그러면 우리의 속임수도 뭔가 건실한 작업 같이 들리잖아요. 아무튼, 사기의 기본은 가능한 순간마다 씨앗을 심는데 있어요.
과연 경험의 차이인지 그녀는 나보다 멀리 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제 마음 속에는 엿 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물스물 피어오르네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아퀼라에게 속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그녀의 태도가 맘에 들었다. 여기서 아퀼라 님을 믿어야 해요, 아퀼라 님이 그럴 리가 없어요, 라고 했으면 정이 뚝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기꾼의 기질이란 어디 가질 않는구나. 뭔가 아니다 싶으니 거대한 모험을 함께한 파트너조차 바로 뒤통수 용의선상에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우리는 궁지에 몰려있어요.
-당장 묘수는 없지만 후일을 위한 포석을 두자 그거군.
-역시 후배는 대화가 통해서 좋네요. 어차피 외통수예요.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세요.
-받아들이는 건 좋은데 내게 이런저런 제약을 걸 거야. 배신하지 못하게.
단순히 봉인을 해제하란 조건만 걸 리가 없다. 분명히 뒤로 꿍꿍이를 부리지 못하게 할 조건도 걸겠지. 제약이 많아지면 뒤통수치기는 급격히 난이도가 올라간다.
-그러니까 선수를 치자고요. 저를 인질로 넘기겠다고 하세요. 그걸로 제약을 좀 완화할 수 있을 거예요.
그뿐 아니라 누미디아의 사기꾼이 이번 계약에 묶이는 일도 막을 수 있을 거라 했다.
-스스로 이번 일의 씨앗이 되겠다는 거야?
-그래요.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는 분명 저를 불안요소로 판단하고 있어요. 일단 보자마자 술수를 부려 절 침묵하게 만든 걸 보세요. 실제로 중간에 풀어냈지만.
이 감방 선배가 비록 갑옷에 빌붙어 지내는 신세긴 해도 내 생각 이상의 거물이 아닐까 싶었다. 비록 당하긴 했지만 저런 초월자의 술수를 풀어낸다는 건 범상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내 수준에선 어림도 없을 정도니까. 과연 대사기꾼이라 그건가.
-절 바치겠다고 하면 분명히 만족할 거예요.
-깨어난 걸 숨기고 내부로 침투하겠다 그거군. 하지만 위험해. 무슨 일을 겪을지 알 수 없어.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죠. 후배, 잘 생각해요. 이건 그의 품에 폭탄을 심는 일이에요. 게다가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와 같이 거만한 이는 자기 기술이 실패할 거라 쉽게 생각하지 못해요.
아마 누미디아의 사기꾼이 깨어났다는 걸 알아채려면 시간이 꽤 거릴 거라고 했다.
-지금 상황이 어려워 불발탄이 될지도 몰라.
내 지적에 누미디아의 사기꾼은 낄낄 웃었다. 지금의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저는 항상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해왔어요. 늘 불확실함이 함께했죠. 하지만, 아직 운이 다하지 않았다고 믿는답니다.
결국 나는 그녀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민할 시간도 없었으니까.
-…몸 조심해.
-해줄 얘기가 많았는데 시간이 없네요. 저도 후배에게 전부 솔직했던 건 아니에요. 그점은 미안해요.
-괜찮아. 사기꾼이잖아.
누미디아의 사기꾼은 다시 웃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웃음이 어쩐지 낯익었다. 어디서 들었지? 누구의 웃음 소리였지?
-후배. 아니, 발러슈테드 폰 비텐바이어-바젤 공작.
-말해.
-약속해 줘요. 설령 실패하더라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고. 우리는 신들도 속이는 사기꾼이잖아요? 이대로 넋 놓고 털릴 셈은 아니겠죠?
그 말에 하마터면 표정관리 하고 있던 얼굴에 미소가 어릴 뻔했다.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가 눈치채지 못하고 조심하며 대답했다.
-그래, 이 발러슈테드. 남을 밀어 쓰러뜨리는 걸 인생 최대의 기쁨으로 삼고 있는 남자다.
-우와, 역시 기분 나쁜 사내군요. 쿡쿡.
한데 누미디아의 사기꾼은 왜 이 정도까지 협력해 주는 걸까. 그 점을 묻자 그녀는 다소 침울한 목소리가 됐다.
-언젠가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저를 의심해도 좋아요. 하지만 제가 쓸모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그거면 충분하잖아요?
-알았어.
그 뒤로 빠르게 이것저것 대강이나마 합의를 했다. 누미디아의 사기꾼을 두고 가는 게 악수일지, 묘수일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뭐라도 해야 했다.
“발러슈테드, 이 몸의 구상은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 선택하라.”
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조아렸다. 그러자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가 만족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하하!”
“위대하신 분이여, 제가 당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지상에 내려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치는 죽음의 봉인을 풀겠다고 약속했다.
“온 마음과 몸을 다해 일을 수행하겠습니다.”
“좋다.”
“또한 이 일을 보증하고자, 누미디아의 사기꾼을 맡기겠습니다.”
“뭐라?”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는 매우 재밌어 했다.
“그년은 실로 교활하지. 이곳에 두고 가겠다고 하니 발러슈테드, 네놈이 계약을 잘 이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알겠다.”
내 제안은 그를 상당히 흡족하게 한 기색이었다.
“하신 말씀이 다 맞습니다. 그깟 잡초 수백만이 죽으면 어떻겠습니까? 대신격의 위가 보장됐는데.”
“역시 기회주의자다, 네놈은.”
“제 성인 발러는 사실 ‘풀 베는 이’란 뜻입니다. 이 기회에 무수히 많이 자란 잡초를 베고 이름값 좀 하겠습니다.”
“크하하하! 좋다!”
하지만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는 추가적인 계약 조건을 걸었다. 신의성실에 어긋나게, 계약 조건을 우회해 흉계를 꾸밀 시에는 내 영혼이 이 테만 앙 키에 귀속된다는 조건이었다.
“이 계약이 정한 바에 의해 네놈의 영혼이 이곳에 귀속되면, 네놈을 지켜주는 가호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정당한 계약에 의한 대가기 때문이다. 영혼이 통째로 뜯기고 싶지 않는다면 속임수를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 붙어버렸다. 지금까지 나는 계약의 빈틈이나 독소조항을 이용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의와 성실이란 말로 그걸 원천 봉쇄해 버린 것이다.
그 신의와 성실의 범위는 실로 광범위해서 봉인을 푸는 것만이 아니라, 이후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가 발버둥치는 죽음을 공격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내용까지 규정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사기꾼의 손발을 묶는 일이었다.
“철저하시군요.”
“네놈이 어떤 놈인지 알기 때문이지.”
누미디아의 사기꾼도 우려를 표했다.
-다행히 저는 계약에 묶이지 않았어요. 저는 적의 품속에서 자유를 얻은 셈이죠. 반면 후배는 너무나 철저한 제약에 놓이는군요.
-괜찮아. 행동까지 어쩌진 못하니까.
내가 인형 같은 걸로 전락한 게 아닌 이상 행동 자체까지 제약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나는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 말고도 다른 초월자에게 후원을 받고 있으며, 신격의 길을 걷고 있어 그 격도 높다. 노예 계약도 아니고 행동까지 제약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계약은 계약이에요. 어겼다가는 파멸이랍니다. 설마 인류를 위한 순교자가 될 셈이에요?
-미안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은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당연한 얘기지만 인간 수백만 보다 내 목숨이 더 귀하다.
-넋 놓고 털리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답을 찾을 거야. 늘 그랬듯이.
-좋아요. 행운을 빌겠어요.
누미디아의 사기꾼을 벗어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에게 바쳤다.
“좋다. 네놈이 이리 협조적으로 나오는데 이 몸도 약속을 지켜야지.”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는 시커먼 오브를 내밀었다. 프로그래마 모르티스의 복제품이었다. 손바닥을 내밀자 그것은 내 안으로 흡수되어 들어왔다.
“이제 네놈은 이 몸에게서 독립한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신격이 된다면 이 정도 힘은 아무것도 아니지. 네놈이 하기에 따라 스스로 위대해질 수 있다는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이후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와 계약을 맺었다. 지난 세월 그와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어쩐지 끝이 좋을 거 같지 않은 계약이었다.
하지만 정면 돌파만이 방법이었다. 나는 계약을 떠안고, 계약을 이용해서 길을 찾으려 한다.
“자, 그러면 네놈의 세계로 떠나 서둘러 일을 처리하라. 이 몸은 지금 어둠의 대군간의 벌어지는 전쟁이 끝도 없이 길어지게 손을 쓸 테니.”
***
돌아온 장소는 그로스글로크너였다. 마침 밤이었기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별을 살피는 일이었다.
“허, 정말이군….”
끓어오르는 심연이 형언할 수 없는 암흑을 무섭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비단 그뿐이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심연 곁에 다른 어둠의 대군들이 포진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승부수를 던졌군. 이 일로 우주적 공포 가운데 하나인 형언할 수 없는 암흑이 대권에서 탈락하면 좋을 텐데.
나는 한 동안 별을 보며 상념에 잠겨있었다. 앞으로의 계책을 정리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산지를 서성여도 좋은 방법이 안 나왔는데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가만…….”
현재 내 영혼의 그릇은 초월자 셋의 후원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에게 독립하는 덕에 그 후원 슬롯이 한 칸 비게 된 거다.
프로그래마 모르티스의 복제품으로 인해 후원 따위는 받지 않아도 피도 눈물도 없는 자의 힘을 쓸 수 있게 됐으니까.
“크크킥.”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후원자 공개 모집이라도 해야 하나.”
새로운 후원자가 앞으로의 행보에서 변수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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