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33
떠들썩한 난리가 진정되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서 조용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방인 듯 관저의 다른 곳과 다르게 신경 써서 꾸며져 있었다.
“잠시 기다리면 백작님께서 오실 겁니다.”
그렇게 시종이 떠나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음?”
당연히 발푸르기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발푸르기스라면 건틀렛으로 나무문을 쿵쿵 치는 소리가 나야 했다. 그런데 맨손으로 가볍게 두들기는 게, 마치 귀족가의 정숙한 숙녀처럼 나긋나긋하다.
“들어오세요.”
발푸르기스가 늦는다고 누군가 말하러 온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던 나는, 방 안에 들어온 인물을 보고 그대로 뿜고 말았다.
“푸웁!”
그러자 그녀도 놀라 허둥댄다.
“발러! 괜찮은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내 입가를 닦아준다. 더없이 다정다감하며 봄바람 같은 몸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황당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니더바이에른 백작님.”
“음? 왜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 부르는가?”
“어떤 여자가 드레스를 입고 투구를 씁니까?”
지금 발푸르기스는 예쁜 드레스를 챙겨 입고 나타났는데 머리에는 철제 투구를 단단히 착용하고 있었다. 괜히 이리저리 포즈를 잡아보는 게 자기 딴에는 멋을 부린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기괴한 차림은 처음이었다.
“안 어울리는가?”
이제 보니 상당히 신경 쓴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속으로 꽤 놀랐는데, 안 하던 팔찌나 여타 장신구를 하고 왔다. 모두 소녀를 위한 귀여운 물건이었다.
지난 회차의 100년을 모두 회상해도 발푸르기스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봤다. 그녀에게 저런 액세서리는 가문의 인장인 반지나 신분을 증명하는 목걸이 같은 게 전부였었다.
“아닙니다. 귀엽습니다.”
“정말이냐!”
나도 바보도 아니고 눈치가 있다. 발푸르기스가 왜 저런 차림으로 나타났겠는가.
뭐, 아무튼 다 좋은데… 저 투구만 없었으면 정말 완벽하겠군.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정도면 그녀 나름대로 미지의 영역에 한 발 내딛은 거니 감사하도록 하자.
“리본이 많은 드레스가 잘 어울립니다.”
내 말에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안도한다.
“그런가… 다행이다. 본녀에게 리본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 입었는데, 잘 어울린다고 해주니까 기쁘구나.”
노출이 적은 기품 있는 드레스. 요즘 귀족가의 영애들이 즐기는 가슴이 확 파인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옛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의 드레스다. 다행히 체형이 같아서 그대로 입을 수 있었다.”
그녀에겐 의미 있는 드레스인 것 같았다.
“제게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보여준 건….”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저한테만 보여주신 건 맞지요?”
“그, 그건 사실이긴 하지만….”
나는 막 한 가지를 깨달았다. 말로 그녀를 허둥대게 만드는 게 의외로 즐거웠던 것이다. 이대로 발푸르기스와 노닥거리고 싶었지만 오늘은 중요한 용건이 있다.
“곤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그 일 때문에 온 건가?”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게 현재 상황이 많이 답답한 듯했다. 워낙 권력자들이 얽힌 상황이긴 하지.
“발러,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그대의 성의는 감사하나 이번 건은….”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배려해서 한 그 말은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발러….”
“황제나 선제후가 개입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대답은 같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건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정말인가?”
“네. 황제가 문제겠습니까? 전 어둠의 대군이 끼어 있던 문제도 해결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황제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지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치란 게 때로는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발푸르기스는 날 믿어주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다. 발러 그대가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거겠지.”
이렇게까지 금방 결론을 내리다니. 이 신뢰가 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발푸르기스 경.”
“응?”
“어째서 가능한지 더 추궁해야 정상 아닙니까?”
“글쎄… 그게 정상인가?”
발푸르기스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린다.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그대가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본녀는 알겠다고 한 것뿐이다.”
“역시 경은 괴짜입니다.”
“…후훗. 뻔히 사정을 알고도 돕겠다고 쫓아온 그대가 더 괴짜가 아닌가?”
그런 식으로 말하니 할 말이 없긴 하다.
“일단 마르가레타님에게 다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당사자에게 한 번 더 듣고 싶군요.”
“물론이지.”
고개를 끄덕인 발푸르기스는 면갑의 숨구멍으로 빨대를 꽂아 넣어 차를 마신 뒤 설명에 들어갔다.
얘기는 간단하면서 복잡했다.
그녀의 영지인 니더바이에른에는 파사우란 도시가 있다. 도검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으로, 파사우의 ‘달리는 늑대’ 마크가 그려진 도검은 제국뿐 아니라 외국에도 명성이 높았다.
심지어 마왕령에서도 인기라, 석 달 전에 파사우에서 생산한 수많은 검신이 로엘린이 다스리는 로제란트로 판매되었다.
“이그니스 상단이 판매를 맡았지. 파사우의 도검장들이 위탁 판매를 하는 상단이다.”
그런데 판매 대금이란 게 바로 지불되는 게 아니란다.
“이그니스의 상인들은 로제란트에 머물다가 한 달 전에 대금과 로제란트에서 구입한 교역품을 잔뜩 싣고 파사우로 귀환을 하고 있었다. 총 12대의 마차였다.”
“그런데 그걸 기사가문이 습격한 거고요?”
“맞다. 라이테르 기사가문이다. 더러운 놈들이지.”
로제란트를 출발해 북상하다가, 짤츠부르크를 지날 때 행렬이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거다. 황제가 봉쇄령을 내린 게 두 달 전이니, 이 거래는 봉쇄령 전에 이뤄진 셈이다.
다만 대금의 지급이 봉쇄령 이후에 이뤄졌을 뿐이다. 당연히 칙령을 소급적용할 수 있는가에 문제가 생겼다.
“이 무슨 문명인답지 않은 폭거인가. 기사란 작자들이 제국의 상인을 공격해 약탈하다니. 그래서 이그니스 상단은 본녀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그녀라면 즉각 개입했겠지. 자기 식구를 감싸고 도는 발푸르기스 성격상 가만있을 리가 없다.
한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긴다. 발푸르기스가 라이테르 기사가문을 압박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짤츠부르크 대주교가 관할령을 핑계로 끼어들었다. 자기 앞마당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거다.
“짤츠부르크 대주교는 친황제파의 대표 중 하나다. 그러니 라이테르 기사가문의 편을 든 거지. 현재 압류된 물품은 짤츠부르크 법정에 있다. 제국의 공식적인 압류가 된 셈이다.”
“그래서 숙부인 바이에른 선제후님께 도움을 요청하신 거군요?”
이번엔 발푸르기스가 반격에 나서 숙부님을 불렀다. 위엄 넘치시는 바이에른 선제후의 출동으로 다시 상황은 발푸르기스 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망할 것들이 이제는 황제 폐하께 일러바쳤더구나.”
전형적인,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 경우다.
급기야 황제까지 끼어들었다. 결국 바이에른 선제후와 황제가 으르렁거리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황제에겐 카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작센 선제후가 끼어 들어서 황제 폐하의 편에 섰다.”
가만히 있던 선제후가 하나 더 난입했다. 바이에른 위쪽에 있는 작센령의 선제후 요한 게오르그가 나선 것이다. 결국 다시 힘의 균형은 저쪽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현재 발푸르기스는 불합리한 합의를 강요받고 있다고 한다. 그녀로써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순 날강도들이다. 합의란 이름으로 이그니스 상단의 돈과 물품을 다 집어삼킬 속셈이다.”
이에 발푸르기스는 마왕 로엘린에게 SOS를 보냈고 로엘린까지 가세할 상황이라는 것. 상황이 산 아래로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일단 쉽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제국황제 VS 바이에른 선제후
작센 선제후 니더바이에른 선제후
짤츠부르크 대주교 로제란트 마왕
라이테르 기사가문 이그니스 상당
그야말로 4:4 빅매치.
제국의 관심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주조연급의 대표만 추려도 이 정도고, 지지표명 등으로 간접적 개입한 귀족은 훨씬 많았다.
“연일 제국에선 이 소식을 다루는 주간지와 팸플릿들이 인기다. 다들 신이 났지.”
“그 정도면 다행이게요. 이대로 잘못했다가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벌어질 지도 모릅니다.”
자칫하면 대전쟁이 5년 일찍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대전쟁이란 것도 인류 VS 마족이란 갈등으로 발발한 게 아니다.
권력문제였다. 누가 왕관의 주인인가를 두고 싸웠을 뿐이다. 인간과 마족이 이념과 종족 갈등으로 성전을 벌이던 시절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끝났다. 제국에서 중요한 건 생활이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권력이었다.
애초에 이게 마왕을 무찌르자는 단순한 게임이었으면 진작 해피엔딩을 봤겠지.
“맞다. 이번 건은 정치적으로 아주 복잡하다. 화약고를 향해 심지가 타들어가고 있는 것과도 같지. 발러, 무언가 할 생각이라면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
솔직히 가장 훌륭한 모사꾼조차 지금의 뒤죽박죽인 상황에선 계책을 내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이번 에피소드는 익히 겪어보지 못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해결책을 찾지 못할 건 없었다.
지금 이 매치에 참여한 인물들의 비밀과, 과거 이 시기에 벌어졌던 시나리오를 기본으로 생각해 보면 되기 때문이다.
“발푸르기스 경.”
“응.”
“이번 싸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도 마십시오.”
내 단언에 그녀는 꽤 감탄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든든하구나. 솔직히 그대가 오기 전까지 의기소침해졌다. 검을 휘두르는 싸움은 자신 있다만 이런 싸움은 어렵더구나.”
나는 그녀의 고운 손을 잡았다. 건틀렛을 낀 손이 아닌 맨손을 잡자 발푸르기스는 움찔했다. 부끄러운 지 손가락을 살짝 움츠렸지만 빼지는 않는다.
“제가 여기서 약속드리겠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사람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두 명이라고요.”
“그게 정말인가?”
“믿으십시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알겠다.”
발푸르기스는 그리 대답하더니 내 손을 마주잡아 왔다. 따뜻하다. 어쩌면 신뢰란 손바닥의 온기를 통해 전달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그대를 전폭적으로 돕겠다. 필요한 것은 모두 말하라. 본녀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일단 발푸르기스 경께서는 최대한 합의를 할 의사가 있다는 태도를 보이십시오. 저쪽의 요구를 수용해서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는 연기를 하시면 됩니다.”
“시간을 끌라 그 말인가?”
역시 척하면 딱이다. 과거에도 나랑 제일 상성이 좋은 영웅이 발푸르기스였다. 벌써부터 손발이 이렇게 잘 맞으니, 그녀와 함께 할 앞으로의 싸움이 기대된다.
“맞습니다. 저쪽 요구를 들어줄 것처럼 하면서 계속 이런저런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라 그것이죠. 본디 소송이란 작정하면 한없이 늘어지게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자신있다. 이번 일을 위해 유능한 변호사들을 여럿 고용했다. 법률적인 기술이라면 어디가서도 안 밀리는 자들이다.”
“잘됐군요. 그렇게 시간을 끌어주시면 제가 일을 하나씩 해결하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
아무리 복잡한 일이라도 사실은 그 본질만 안다면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한 경우가 있다. 지금 일이 전형적으로 그런 경우다.
하나씩 풀어간다면 결국 황제니 선제후니 하는 양반들이 개입할 틈도 없이 끝날 거다.
“이럴 때는 일단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음… 라이테르 기사가문 말인가?”
“맞습니다. 이번 일,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나포 면장 때문에 눈이 돌아가서 날뛰는 기사가문이라고 해도 봉쇄령 전에 끝난 거래까지 건드리는 건 이상한 일이지요. 심지어 대금만 받아서 돌아오는 상단이었습니다. 상당히 무리수를 둔 거지요.”
발푸르기스는 맨손으로 투구의 턱 부분을 쓰다듬는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구나. 라이테르 놈들이 안하무인이긴 해도 이그니스 상단을 건드린다면 본녀가 가만있지 않을 걸 알 것인데…….”
요컨대 라이테르 기사가문으로도 상당한 모험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이 잘 끝나도 장기적으로 좋을 게 없다.
왜냐? 발푸르기스가 미래의 바이에른 선제후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바이에른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자신들을 증오의 눈으로 본다면 밤에 잠이나 오겠는가?
아무리 유명한 무가라고 해도 결국 일개 기사가문에 불과하다. 선제후가 기침만 해도 날아간다.
즉, 라이테르 기사가문은 무언가에 의해 상당히 궁지에 몰려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그 점을 지적하며 발푸르기스에게 물었다.
“왜 그들은 무리수를 뒀을까? 이번 사건을 해결한 단초는 거기에 있는 겁니다.”
“발러, 그렇다면 그대는 그걸 알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발푸르기스 경.”
약속하겠습니다. 석 달 뒤에, 라이테르 기사가문의 가주가 당신 발밑에서 무릎 꿇게 만들겠다고.
그냥 꿇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개처럼 기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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