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57
라이테르 기사가문은 가문이 생긴 이래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사가문을 이끄는 가주 발두어는 최근 몇 달간 얼굴을 제대로 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깐깐하고 잔인한 성품의 발두어가 우중충한 인상을 쓰고 있자, 그가 머무는 성은 그야말로 마왕성이나 다름 아닌 분위기였다.
“짤츠부르크 대주교가 이번 사건을 니더바이에른으로 이관하라고 했다고?”
“…네. 형님.”
결국 황제의 끄나풀인 짤츠부르크 대주교까지 떨어져나갔다. 얼마 전에 작센 선제후까지 손을 뗐으니 이제 제국 어디에도 그들의 편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고소를 머금고 쳐다보는 자들이 많았다. 과거 이 가문의 패악질에 피해를 본 도시들이 특히 그랬다. 그들은 대놓고 니더바이에른 백작을 응원하여 발두어의 성질을 건드리는 중이었다.
“발러슈테드 발러… 그놈이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이로군.”
“그렇습니다. 형님.”
제국의 수도로 갔다 돈만 쓰고 돌아온 게오하르트는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에게 형님은 늘 어려운 자였다. 잔인한 성품을 떠나서도 그 실력이 검술 대가에 다다른 강자기에, 곁에서 서면 절로 오금이 저린 것이다.
‘하지만 보고할 건 보고해야겠지.’
게오하르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형님. 그 검객이 이탈했습니다.”
“뭐라?”
발두어의 이마가 꿈틀했다. 그 검객이라 하면 몇 달 전 돈을 주고 초빙한 엄청난 고수를 말한다. 스스로 대검호의 마지막 전인이라 소개한 자로, 그가 진짜 대검호의 전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실력만은 진짜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가올 싸움에서 그나마 믿는 구석이었는데 이탈했다니?
“그게 말입니다. 마을에서 세금을 걷는 것에 반발해서 우리 병사 다섯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사라졌습니다.”
“이런 미친놈이! 그리고 네놈은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어!”
급기야 발두어가 폭발해 물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게오하르트는 자업자득이라 여겼다.
‘세상에 자기 영지를 약탈하는 자가 어디에 있나.’
라이테르 기사가문은 실로 다급한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끌어 모은 용병 300명의 봉급도 감당이 안 될 정도.
가뜩이나 빚 때문에 고생이었는데 빈에 가서 헛짓거리를 하며 탈탈 털어 넣었다. 이미 금고는 바닥이었다. 그래서 결국 발두어는 전비를 명목으로 자기 영지에서 가혹한 징발을 실시했다.
말이 세금을 걷는 거지 그냥 약탈이나 다름없었다. 반항하는 농부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기사가 지나간 곳은 피바다로 넘실거렸다.
결국 악행을 참다못한 대검호의 전인이 그대로 병사 다섯을 베어 죽이고는 사라졌다는 것.
“으아아아!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날 우습게보고!”
결국 발두어는 눈이 뒤집혀 검을 뽑아들었다. 이 칼 한 자루로 살아온 세월이었다. 궁지에 몰린 맹수가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작정이었다.
“좋다. 이렇게 된 이상 그 니더바이에른 백작을 인질로 잡는다. 그리고 바이에른 선제후와 협상하겠다.”
그 말에 게오하르트는 계략을 하나 냈다.
“바이에른 선제후를 상대로 억지로 협박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시죠?”
“무엇이냐?”
“니더바이에른 백작을 인질로 잡은 뒤에 우리 쪽 누군가와 결혼 시키는 겁니다. 강제로 범해서 애라도 생기고 나면 바이에른 선제후도 입장이 난처해질 겁니다. 그 뒤에 협상하지요.”
물론 결혼 자체가 제대로 성립은 안 되나 이쪽에서 그건 결혼이었다고 우기자는 얘기다.
“명안이다!”
발두어는 그 계획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일단 니더바이에른 백작과 결혼하면 그녀의 영지까지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급기야 노욕이 오른 그는 장가를 새로 들겠다고 나섰다.
“형수님이 계시잖습니까?”
내심 자기가 욕심을 냈던 게오하르트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됐다. 그딴 쓸모없는 여자는 버리면 그만이지! 뭐? 그 발푸르기스 년이 추녀기사라고? 크하하하! 뭐, 그건 그것대로 재밌겠지!”
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 발러는 이쪽에 수호자로 의심되는 대검호의 마지막 전인이 있다고 여겨 과할 정도로 안배를 하는 중이란 사실을.
게다가 바이에른 선제후는 이들이 상상하는 거 이상으로 조카바보였다.
***
“이게 다 무엇인가….”
나 발러슈테드 발러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발푸르기스를 통해서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민병대 500명을 고용하고 싶다는 연락을 넣었다. 그런데 도착한 건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척! 척! 척!
제법 군기가 든 병사들이 근사하게 행진하고 있었다. 사방에 하늘로 솟은 장창이 가득해 멀리서 보면 흡사 갈대밭이 움직이는 것 같다.
대략 그 수를 어림짐작해 보면 5,000명.
요구한 것의 10배에 이르는 민병대가 도착한 것이다. 민병대는 장구류를 스스로 맞춰야 하는데, 부유한 바이에른의 시민들답게 무장 상태도 훌륭했다.
“발푸르기스 경. 저건 대포가 아닙니까?”
“그, 그렇구나. 중포가 적어도 12문. 경포는 적어도 20문은 넘겠다. 이 무슨….”
나와 나란히 란츠후트의 성벽에 서 있던 발푸르기스도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발러, 저길 봐라. 황금쌍두사자 기사단이다.”
“맙소사. 저들까지 왔군요. 바이에른 최강의 기사단이 아닙니까?”
황금쌍두사자 기사단은 바이에른의 귀족들과, 그 귀족이 개인적으로 고용하고 있는 중기병들로 이뤄진 집단이다.
용병으로 전전하는 중기병 중 자질이 뛰어난 자는 귀족가에 고용되어 자기 영주를 호위하게 된다. 아무리 이 세계에 상비군이 없어도 영주에게는 수십에서 수백의 근위기병대가 있기 마련이다.
저 황금쌍두사자 기사단은 그런 바이에른 영주들과 근위기병대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 수가 총 3,500여 명. 전원 철갑과 기병창, 마상권총으로 무장한 최정예다.
당연히 저 기사단의 기사단장은 바이에른의 최고봉인 바이에른 선제후이시다.
“음… 발푸르기스 경.”
“말하라. 발러.”
“혹시 선제후 전하께선 어디론가 전쟁을 나가시다 경의 영지에 잠시 들리신 겁니까? 그 길에 경이 요구하신 민병대 500명을 주고 가려고요.”
“그, 그렇겠지? 발러, 그대의 의견이 참으로 합리적이구나.”
지금으로써는 가장 그럴 듯한 추론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은 그게 아니라는 점을 직감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바이에른이 용병을 모집하지 않고 끌어 모을 수 있는 최고 전력에 가깝지 않습니까?”
“그렇지. 도시 방어를 위해 배치한 병력을 빼고는 총출동이구나. 저 깃발들을 보아라. 저 수많은 깃발이 다 귀족가의 깃발이다.”
참고로 바이에른 선제후는 제국 제일의 거부이다. 황제도 그에게 돈을 매번 빌려서 연명하고 있을 정도다.
그가 만약 제대로 용병 모집을 시작하면 4만 대군도 만들 수 있을 터. 새삼 제국 최고 권력자의 위엄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마왕들도 한 수 접어준다는 바이에른 선제후의 위용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구나. 일단 숙부님을 맞이하러 가야겠다. 그대도 같이 가자.”
“알겠습니다.
백작 관저로 가자 손님맞이 준비로 아주 부산했다. 고용인과 관료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제대로 준비할 틈도 두지 않고 바이에른 선제후는 기병들을 이끌고 바람처럼 들이닥쳤다.
“하하핫! 우리 조카딸! 오랜만에 보는구나!”
한 거인처럼 덩치가 큰 노인이 말에서 내렸다. 노인은 몸이 얼마나 큰지 남들보다 큰 군마를 탔음에도 그 말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그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 발푸르기스에게 달려왔다.
“이리오렴!”
“숙부님!”
발푸르기스도 밝은 음성으로 자신의 숙부인 바이에른 선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바이에른 선제후가 포옹을 하려는 순간 귀신같은 회피로 쏙 빠져나갔다.
“아니, 얘야!”
“숙부님, 저도 이제 시집갈 나이의 과년한 처자랍니다.”
“작년까진 안 그랬잖니!”
거기에 대해서 발푸르기스는 새침한 듯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바이에른 선제후가 성대하게 콧김을 내뿜으며 불만을 표시했다.
“너한테 꼬였다는 그 근본 없는 놈 때문이구나! 크흥!”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근본 없는 놈’은 주변에 있던 메이드들의 뒤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채신머리없다고 해도 지금 나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곧 들이친 병사들이 장작더미를 들고 오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왜 그걸 마당에 쌓아? 쌓지 마!
“숙부님! 전에도 말했지만 제가 결혼할 남자는 제가 정하고 싶습니다!”
발푸르기스의 말은 정략결혼이 당연한 시대치고는 신선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것도 그가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제후들의 거래에 의해 상품처럼 팔려가는 귀족 여식이 아니라, 바이에른의 후계자기 때문에 저리 말할 수 있는 거다.
물론 후계자라고 해도 정략결혼에는 자유롭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바이에른 선제후는 그런 정략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벌컥 화를 냈다.
“이런 못된 놈! 금이야, 옥이야 키웠더니 이제 이 숙부 말도 안 들으려는 것이냐!”
“그게 아니에요! 제가 숙부님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걸 아시잖아요.”
“시끄럽다! 이놈! 네가 시집갈 곳은 이 숙부가 정할 것이다! 너는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훌륭한 사내에게 시집가야 한단 말이다!”
뭐랄까, 바이에른 선제후는 정략결혼이 아니라 자기 맘에 드는 남자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내 몇 해 전에 황자와의 혼담도 거절했건만 어디서 그런 풀 베는 자(발러라는 성의 뜻)를 데려온 것이야!”
“역시 숙부님도 들으셨군요.”
“그런 근본 없는 놈는 어울리지 않는다! 얘야!”
“아니요!”
하지만 발푸르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더니, 주변에 당당히 선언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발러가 마음에 듭니다!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그 남자가 아니면 싫습니다!”
“오오오오!”
지켜보던 자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아무리 니더바이에른 백작이 일반적인 귀족 영애랑 다른 별종이라고 해도, 이렇게 백주대낮에 당당히 한 남자가 좋다고 폭탄선언을 할 줄은 몰랐던 거다.
“백작님 대단해!”
“저것이야 말로 사랑!”
“너무 멋있어!”
주변에서 감탄이 터질수록 내 근처에 있던 메이드들의 표정은 짜게 식어갔다. 그들은 자기들 뒤에 숨어 있는 날 쓰레기처럼 보는 중이다.
“발러 경? 언제까지 저희 엉덩이 뒤에 숨어 있으실 건가요?”
급기야 메이드장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여왔다. 결국 나는 사태가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다.
“흠흠! 아니, 뭐 내가 꼭 계속 여기에 있겠단 소리도 아니잖나.”
하지만 대답대신 메이드장은 날 떠밀며 외친다.
“발러슈테드 발러 경이십니다!”
그 순간 관저 앞마당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백작부터 일개 고용인까지, 대강 세도 300여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계속 쭈뼛댈 수는 없었다. 나는 당당히 나가기로 했다. 숨을 한 번 내쉰 뒤 앞으로 나섰다.
“고귀하신 전하. 발러슈테드 발러가 인사 올립니다.”
그러자 바이에른 선제후가 코웃음을 친다.
“흥! 네놈이 소문의 그놈으로구나!”
침착하자. 나는 위기 상황에서도 항상 상당한 말빨로 버텨왔다.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으리라. 그리 다짐하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바로 이어진 바이에른 선제후의 말에 내 결심은 와르르 무너졌다.
“내 이럴 줄 알고 장작은 충분히 가져왔다!”
“네? 저, 전하… 뭘 태우시려고요?”
당황해서 되묻자 바이에른 선제후가 음산하게 웃는다.
“흐흐흐. 글쎄, 뭘 태우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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