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esperson Kim Yubin RAW novel - Chapter 22
22화 – 지역 배정(1)
유빈은 새로 구한 노원구의 작은 원룸을 나섰다.
저번 주로 인수인계를 마무리하고 드디어 혼자 거래처를 방문하게 되었다.
1년 6개월 만에 MR로 돌아온 유빈의 심장이 기분 좋은 떨림으로 두근거렸다.
강북 2팀에 들어가게 된 그는 완전히 겹치지는 않지만, 배정받은 지역이 백서제약에서 일할 때와 거의 비슷했다.
유빈이 맡은 지역은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의정부 그리고 경기 북부 지역이었다.
하지만 일하는 장소만 같을 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소속된 회사, 제품, 동료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유빈 자체가 변해 있었다.
남다른 체력과 기억력, 오라를 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전생의 영업 경험이 유빈과 함께했다.
수련으로 전생을 본 유빈은 인연이 얼마나 질긴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쪽 지역으로 배정받은 이상 백서제약 이동우 지점장과는 점유율을 두고 맞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빈이 목표로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통과점에 불과했다.
유빈에게는 본사 CEO라는 높은 목표가 있었다.
지금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놀림감이 될 게 뻔한 목표지만 계속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분명히 손에 닿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우선은 베스트 MR.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
건물에서 나오자 찬 공기가 유빈을 맞았다. 그가 좋아하는 새벽 공기였다.
하늘은 캄캄했지만, 대로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 대학 병원은 불빛으로 환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이 있다면 바로 하루에 주어지는 24시간이다.
하지만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공평함의 의미가 무색해지기도 한다.
3주간의 신입사원 교육 동안 유빈은 세 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
호심법과 완무의 수련으로 어떤 경지에 이르고 나서는 그 이상 잠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충분하니 반 동기를 하나하나 챙기면서도 남들의 배 이상으로 공부할 수가 있었다.
시간과 노력 거기에 범인을 뛰어넘는 기억력까지 더해지니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영업도 별다른 건 없지.’
백서제약 때는 성실하게 일은 했지만, 요령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 배 이상 성실하게 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생의 경험이 모자란 점을 채워 줬다.
유빈이 굳이 노원구에 있는 은산병원 바로 앞에 자취방을 구한 것도 그런 전략 중 하나였다.
은산병원은 노원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덩치와 명성 면에서 한강대병원과 쌍벽을 이뤘다.
“내 집처럼 들락날락해 줄게.”
마음에 드는 여자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호감을 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주 얼굴을 보이는 것이다.
고객과의 유대도 마찬가지. 자주 만나는 것만큼 강력한 방법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는 것처럼 은산병원에게 미소를 날린 유빈은 근처 슈퍼에서 요구르트 한 줄을 사 병원으로 향했다.
새벽이라 외래 환자가 없는 병원은 썰렁함을 넘어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산부인과 앞에 도착한 유빈이 가방 안에서 요구르트를 꺼냈다.
이른 아침이라 간호사도 보이지 않았다.
“보자. 오늘 오전 진료는 이인규 교수님하고 홍라선 교수님이구나.”
열려 있는 진료실에 슬쩍 들어간 유빈이 진료 책상에 요구르트 두 개를 놓고 나왔다.
옆 진료실에도 똑같이 두 개를 놓고 나오면서 나머지 요구르트는 간호사 리셉션데스크 밑에 넣어 놓았다.
“이봐요.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유빈이 할 일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까칠한 여자의 목소리가 움직임을 막았다.
고개를 마저 돌린 유빈 앞에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 의사가 푸석푸석한 얼굴로 유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새벽부터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아무도 없는 진료실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경계심이 들 만도 했다.
‘레지던트인가.’
몰골을 보아하니 새벽에 분만수술을 뛰고 막 나온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제네스코리아 김유빈이라고 합니다.”
“제네스코리아요? 제약회사? 그런데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제네스의 약품은 산부인과 전반에서 애용하는 메이커다. 전공의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의사의 반응이 조금 누그러졌다.
“사실은 제가 이번에 은산병원을 새로 담당하게 돼서 인사차 진료실에 음료수를 놓고 나왔습니다. 의욕에 넘치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와 버렸네요. 하하.”
잘생긴 유빈이 멋쩍게 웃자 여의사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아, 그랬군요. 저는 수상한 사람인가 했네요. 아침부터 고생 많네요.”
“교수님이야말로 당직 서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여기 요구르트 하나 드세요. 그런데 교수님 성함이?”
“저는 교수님이 아니고요. 4년차 레지던트예요. 유진희입니다.”
오, 4년차 레지던트면 곧 교수도 될 수 있는 위치였다. 혹시 의국장일지도.
자기소개를 하던 레지던트가 괜스레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유빈의 잘생긴 얼굴을 보자 밤을 새운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녀도 의사이기 전에 여자였다.
그녀의 심리를 파악한 유빈이 재빨리 자리를 피해 줬다.
“그럼 선생님. 다음에 의국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힘내십시오.”
“고마워요.”
유빈은 병원을 나서면서 은산병원 데이터에 ‘유진희’를 추가했다.
교수는 아니지만, 의료진을 한 명이라도 더 알게 된 것은 수확이다. 누가 아는가. 저 선생님이 교수가 안 돼도 근처에 병원이라도 오픈할지.
“시작이 괜찮은데.”
유빈은 은산병원과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잇는 자취방으로 향했다.
저번 주 토요일에 회사에서 받은 흰색 아반떼가 주차장에서 유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 문을 열자 좋은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흐음…… 향기 좋다.”
아반떼는 주서윤이 쓰던 차였다. 주서윤이 마케팅으로 옮기면서 반납한 차가 유빈에게 넘어온 것이었다.
차 안에 은은하게 남아 있는 주서윤의 향수 냄새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자, 그럼 출발해 볼까. 반떼야, 앞으로 잘 부탁한다!”
*
“여보, 어젯밤에 왜 그렇게 뒤척거렸어요?”
“아, 미안해. 나 때문에 잘 못 잤지?”
이혁 지점장은 아내가 차려 준 아침밥을 먹으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있으면 직원들의 출근 보고 전화가 올 시간이었다.
“뭐 고민이라도 있어요? 신입사원이 말을 잘 안 듣기라도 해요?”
“그런 거 아니야. 잘하고 있어.”
“교육에서 1등 한 친구하고 수의사인 여자애가 들어왔다고 했죠?”
아내에게까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아내 말고는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었다.
다행히 아내는 주제를 바꾸지 않고 계속 질문을 해 줬다.
“어어. 그게 사실은 말이지. 당신도 알잖아. 내가 지점장 되고 신입사원은 처음 받아 본 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긴 해.”
“뭐가 고민인데요?”
“아니, 그 1등 한 친구 있잖아. 김유빈이라고. 이 친구가 퇴근 보고할 때 꾸준히 열다섯 콜(의사를 방문한 횟수)을 한다고 보고하거든.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지. 다른 직원들은 많이 해도 열둘, 열세 콜 정도인데 매일 열다섯 콜이라니.”
“열심히 하나 보죠.”
“나도 그렇게 믿고 싶은데, 이 친구가 신입답지 않게 디테일도 수준급이고 아무튼 능력이 있어. 그런데 보통 그런 친구가 성실하기가 쉽지 않잖아. 그렇지 않아?”
“당신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셀프디스하는 거예요? 당신은 성실 빼면 시체잖아요. 호호. 아무튼,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죠.”
“그렇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아. 그래서 말인데 진짜로 보고처럼 콜을 했는지 확인할까, 아니면 그냥 믿고 내버려 둘까? 내가 사원일 때 지점장님한테 당해 봐서 알잖아. 그 더러운 기분. 기습적으로 아침에 내가 담당하는 지역에 와서 삼십 분 만에 어디로 오라고 하지를 않나. 콜 수를 실제로 확인하지 않나. 당해 보면 정말 기분이 나쁘거든.”
“음…… 그럼 이건 어때요? 요즘 회사에서 나눠 주는 거 뭐 없어요?”
이혁 지점장의 아내도 남편의 회사 일을 자주 듣다 보니 대충 제약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응? 뭐? 기믹? 책자? 음…… 마케팅에서 다음 주에 월경전증후군 리플렛(소책자)을 나눠 준다고 하긴 했는데.”
“그럼 그렇게 해요. 당신이 콜 하는 데마다 꼭 리플렛을 배치하라고 시켜요. 그리고 나중에 몰래 가서 확인해 보는 거예요. 병원에 다녀갔으면 그 리플렛이라고 했죠? 그게 대기실에 떡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 신입한테 들키지만 않으면 지점장으로서 권위가 깎이지도 않고 미움도 안 받고 실제로 성실한지도 알 수 있잖아요.”
“역시 여보야는 천재야! 이리 와 봐. 찐하게 뽀뽀해 줄게.”
“저리 가요. 지현이가 봐요.”
“하아,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나도 사원일 때가 좋았어. 맘 놓고 영업만 하고 싶다.”
“그런 소리 말아요. 지현이 이번에 피아노 학원 새로 들어가는 거 알죠?”
“알았어, 알았다고.”
마침 유빈으로부터 출근 보고 전화가 왔다.
이혁 지점장의 눈빛이 아내와 대화할 때와 달리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