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esperson Kim Yubin RAW novel - Chapter 85
85화 – 본격적인 행보(3)
“수인아, 이거 뭐야?”
화장실에 다녀온 수인을 향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의 눈빛을 날리던 남자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물건은 작은 종이 곽이었다.
“오빠, 설마 내 가방 뒤진 거예요?”
“이게 뭐냐고 물었잖아!”
남자의 성난 외침에도 여자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보면 몰라요? 피임약이잖아요.”
“그러니까 피임약이 왜 네 가방에 들어 있냐고? 너…… 그런 여자였어?”
“네?”
여자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가 오히려 더 굳세게 변했다.
“그런 여자라고요? 지금 피임약만 보고 날 그런 여자로 판단한 거예요?”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수인아, 어디 아파서 약 먹는 거지? 그렇지?”
여자의 강렬한 눈빛에 남자가 주춤거렸다.
“아니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피임 목적으로 먹는 거예요.”
“뭐라고?”
남자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리 언니. 꽃다운 스물두 살에 지윤이 낳아서 지금까지 미혼모로 살고 있어요. 대한민국에서 미혼모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아요? 아니, 당연히 모르겠죠. 상상도 못하겠죠. 승준 오빠도 남자니까.”
“……수인아.”
“남자가 콘돔도 안 쓰고 관계해서 지윤이가 생기니까 바로 도망가 버렸어요. 물론 사랑하는 사이였죠. 그래서 전 남자 안 믿어요. 그래서 피임약을 먹는 거예요. 제 몸은 제가 지킬 거니까요!”
“…….”
“실망이네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판단을 하다니.”
“아, 아니 수인아. 그게 아니고…….”
“됐어요. 오빠는 다른 남자하고는 다를 줄 알았는데. 오늘 일은 정말 실망이에요.”
여자가 잡는 남자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커피숍 밖에까지 따라 나갔지만 소용없었다.
“수인아! 수인아!”
“컷! 좋았습니다! 다음 컷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컷을 외친 PD가 정수인 역할을 맡은 이소영에게 다가갔다.
“소영씨 연기 좋았어! 캬아, 그 눈빛. 좋아, 좋아. 계속 그렇게만 가자고.”
시청률이 잘 나와서 우리 집 막내 촬영장은 활기에 넘쳤다. 스태프들의 표정도 밝았다.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PD와 이야기하던 이소영이 유빈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물론 유빈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박영란 작가를 향해서였다.
가까이서 보니 역시 배우는 배우였다.
하얀 피부와 잡티 하나 없는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까지. 배우를 안 했으면 안 될 외모였다.
“소영 씨, 오늘 연기 좋았어요.”
“정말요? 전 PD님보다 선생님께 칭찬받는 게 더 좋아요. 헤헤.”
“속으로는 여리지만, 똑 부러지고 강인한 여성을 표현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외모도 여린 편이니까. 오늘 신을 다시 보면서 앞으로 연기할 방향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충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백 번이라도 돌려 볼게요. 저도 피임약에 대해서는 편견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주신 자료 보고 놀랐어요.”
“진짜로 아는 것 하고 대본으로만 연기하는 것 하고는 다르니까요.”
“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앗, 선생님 저 가 봐야 해요. 이따가 또 올게요!”
“화이팅해요.”
“네!”
이소영이 박영란 작가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옆에 서 있는 유빈과 박 과장을 향해서도 깍듯이 인사하고 달려갔다.
“어때요?”
촬영장 뒤에서 지켜보던 장면을 지켜보던 유빈에게 박영란 작가가 물었다. 유빈이 엄지손가락을 날렸다.
“역시 작가님은 최고입니다. 배우한테 피임약 자료까지 주셨군요.”
“오버하지 마시고요. 호호. 저도 유빈 씨한테 듣기 전까지는 소영 양 하고 같았으니까요. 생각보다 좋은 신이 나와서 저는 만족이에요. 차후에 피임약과 관련해서 신을 더 넣어 볼 생각이에요.”
“네? 저, 정말이십니까?”
이소영에게 반했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박 과장이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네. 정말이에요.”
“그럼 PPL 비용은…….”
“PPL이 아니니까 비용은 필요 없겠죠?”
“……대, 대박. 아, 그게 아니고 감사합니다. 작가님.”
유빈도 박 과장과 같이 고개를 숙였다.
일단 첫 번째 단추가 제자리에 끼워진 기분이었다.
*
“피임약 장면 순간 시청률이 무, 무려 27%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현재 피임약이 녹색창 실시간 검색 3위입니다. 잘하면 1위까지도 갈 것 같아요! 제가 다 떨리네요.”
우리 집 막내 6화가 방송되고 상기된 박 과장과 송대리가 번갈아 가며 소식을 전했다. 파격적인 줄거리에 이전 화가 끝났을 때보다 이슈가 되고 있었다.
“자, 이제 시작입니다. 이벤트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제대로 폴로업을 해야 합니다.”
“휴우, 정말 매니저님은 못 당하겠습니다.”
“박 과장님, 오늘 방영된 부분 중 피임약이 나오는 장면을 짤방으로 만들어서 사용하죠. 이 부분은 드라마국과 협의해 주세요.”
“어디다 쓰시려고 하시나요?”
“여중, 여고 성교육 발표자료 앞부분에 동영상으로 넣으려고요. 요즘 애들을 글자보다는 영상을 선호하니까요. 그리고 처음에 영상이 들어가면 집중을 유도할 수도 있고요.”
“오오, 정말 조, 좋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송 대리님은 잡지사에 기사 만들어서 보내 주세요. 드라마와 피임약을 잘 버무리면 좋은 기사가 나올 것 같습니다.”
“넵!”
*
삭막한 빌딩숲 사이에서도 곳곳에 핀 개나리는 예쁜 얼굴색을 뽐내고 있었다.
서인아는 더웠는지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팔에 걸쳤다.
“다혜 씨, 새로 AM이 오면 이제 조금 편해지겠네.”
“그보다 저랑 잘 맞아야 할 텐데요. 과연 제 직설적인 성격을 잘 견딜지 걱정이에요.”
“후훗, 알기는 아네.”
“PM님!”
“아, 맞다. 어제 포탈 검색하는데 피임약이 검색어 1위에 올라 있어서 깜짝 놀랐어.”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서인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입사하고 영업과 AM을 거쳐 피레논 PM으로 일하는 동안 피임약이 이슈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녹색창 검색어 1위라니!
올해는 피레논 PM으로서 운이 트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 PM님도 보셨어요? 저 요즘 우리 집 막내 본방사수 하잖아요. 진짜 재미있어요!”
젤레크 PM 박다혜가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나도 짤방으로 봤어. 동영상 메인에 떠 있더라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줘서 속이 다 시원했어.”
“그렇죠? 하아, 다음 주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아, 그래서 다혜 씨가 요즘 수, 목요일에는 기를 쓰고 집에 일찍 가려고 하는구나. 요즘 안 바쁜 모양이네. 드라마도 보고. AM 안 뽑아도 되겠는걸.”
“아, 아니에요. 그래도 드라마 보고 집에서 일은 다 해요.”
“호호. 농담이야. 나도 한번 보려고.”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 장면 PPL이래요.”
“정말? 그렇게 안 보이던데. 누가 그래?”
서인아가 못 믿겠다는 듯이 물었다. PPL이라고 하기에는 장면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아까 서윤 씨가 지나가면서 그러더라고요. 아, 저기 서윤 씨다. 서윤 씨!”
유빈과 함께 걸어가던 주서윤이 뒤돌아봤다.
주서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개나리가 질투할 정도였다.
“PM님, 식사하셨어요?”
“서윤 씨, 수상해. 요즘 유빈 씨 하고 부쩍 붙어 다니는 것 같아.”
박다혜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유빈과 주서윤을 번갈아 쳐다봤다.
“네? 아하하. 아니에요. 유빈 씨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많아서……. 저도 귀찮아 죽겠어요.”
주서윤이 둘러대자 두 PM의 시선이 유빈에게 향했다.
“어라, 선배님. 제가 귀찮으셨습니까?”
“아, 그게…….”
주서윤의 난처해 하는 모습을 보며 유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서윤 씨, 그건 그렇고, 어제 우리 집 막내에서 피임약 나오는 장면이 PPL인 건 어떻게 알았어? 전혀 PPL 같지 않던데.”
박다혜 PM의 말에 주서윤이 유빈을 쳐다봤다. 유빈이 살짝 웃으며 질문에 대신 답했다.
“우리 집 막내에서 피임약 장면은 OC 프로젝트에서 진행한 PPL입니다.”
“네? 그럼, 유빈 씨가…….”
“네. 저와 에이전시가 했습니다.”
유빈의 간결한 대답에 서인아와 박다혜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진영 차장의 명령으로 OC 프로젝트에 참여는커녕 관련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그녀들로서는 유빈이 무슨 일을 진행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속으로는 아무리 영업을 잘한다 하더라도 이제 처음 마케팅 일을 해 보는 유빈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차치하고 문제만 일으키지 않아도 잘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들도 처음 마케팅에 왔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빈은 업무를 가르쳐 줄 선임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PPL의 유빈의 작품이라면 그건 프로 야구단에 막 드래프트 된 신인이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 것과 다름없었다.
마케팅으로 온 유빈을 반기기는 했지만, 첼시 사장의 결정은 이해하지 못했던 그녀들도 이제는 막연하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하네요. 유빈 씨, 차장님 때문에 대놓고 도와줄 수는 없지만, 궁금한 거나 아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메일 주세요.”
서인아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빈을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OC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서인아가 맡은 피레논 매출은 당연히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단지, 서인아는 지금까지는 프로젝트가 성공할 거로 믿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 맞다. 이따가 신입 마케팅 직원 환영식에는 올 거죠?”
“신입이요?”
“이번에 다른 제약회사에서 젤레크 AM으로 오는 사람이 있어요. 오늘 교육받고 저녁에 회사에 인사하러 온다고 했어요.”
“근데 아무리 그래도 차장님 너무하시네요. 유빈 씨는 환영회도 안 해 줬는데…….”
주서윤이 두 볼을 부풀리며 툴툴거렸다.
유진영 차장은 막 이연수 부장으로부터 유빈의 프로젝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리에 앉은 그녀가 입술 각질을 잡아 뜯으며 꺼져 있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바늘 같은 불안감이 비집고 올라와 심장을 콕콕 찌르는 느낌이었다. 설마 자신이 몇 년 동안 성공하지 못한 일을 유빈이 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말과 그림 역시 능력 있는 에이전시로 밝혀졌다. 자신은 못 본 걸 유빈은 봤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아니야, 이 정도로는 어림없어. 어림없고말고.”
유 차장이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OC 복용률이 PPL 하나 잘되었다고 올라갔으면 벌써 올라가고도 남았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피임약에 대한 관점의 변화였다.
‘억세게 운 좋은 자식. PPL 하는 데 얼마나 썼을까? 2억5천? 3억?’
유진영 차장은 유빈이 강승연과 이소영의 관계가 터진 후에 PPL 계약을 했을 거로 여겼다. 그래서 떠올린 금액이 최소 2억5천만 원이었다.
그 이상을 썼다고 해도 이번에는 남는 장사였다.
유 차장은 스캔들이 터진 후, 드라마를 재빠르게 선택한 유빈의 결정력에는 싫어도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10점 피켓을 들지 않아도 회사 사람들은 10점을 줄 게 뻔했다.
유 차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더 지켜봅시다. 끊습니다.”
최상렬 부사장이 유진영 차장에게서 온 전화를 끊었다. OC 프로젝트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였다.
유빈이 보여 준 성과가 놀랍기는 해도 전체적인 프로젝트의 성과는 일 년 뒤에나 나올 일이었다.
‘징징거리기는.’
유 차장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그 역시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항암사업부에서 진행된 간암 예방 프로젝트 PPL은 유빈의 성과에 비하면 전등과 반딧불의 차이였다.
유빈의 작품이라는 게 회사 내에 퍼지면 당연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일이었다.
‘보통 녀석이 아니야.’
최상렬이 고개를 저으며 전화가 오기 전에 읽고 있던 이메일에 다시 눈을 돌렸다. 제네스 아시아 리전에서 근무하는 수안 챈으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어지 데일이라…….”
어지 데일은 마크 램버트 CEO가 세계 4대 회계 법인인 달로이트에서 스카우트 해 온 회계전문가였다. 어지 데일은 일 년 전부터 전 세계의 제네스 지사를 돌아다니며 강도 높은 회계 감사를 진행했다.
물론 목표는 마크 램버트 CEO의 의도대로 비용 절감이었다.
특히 그는 아시아 리전에서는 저승사자로 통했다.
작년 어지 데일이 제네스 차이나 감사를 마치고 본사에 보고한 리포트 하나 때문에 일반의약품 부서 영업팀이 통째로 날아갔다.
마케팅만으로 충분하다는 그의 보고 때문에 결과적으로 백여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중국뿐 아니라 감사를 받은 아시아 국가는 작게는 몇십 명에서 많게는 백 명 넘게 인원 감축이 실행되었다.
그런 어지 데일을 비롯한 본사 감사팀의 다음 목적지가 바로 한국이었다. 수안 챈의 이메일에는 한 달 뒤에 감사팀이 방문할 거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드디어 오는군.”
최상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임원진 입장에서 감사라면 꺼리는 게 당연한데 최상렬은 반기는 표정이었다.
“어지 데일이라면 더 확실히 발견할 수 있겠지…….”
남에게 보이지 않는 진한 웃음이 얼굴의 반을 가득 채웠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
유빈이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를 뒤집었다. 처음으로 참석하는 마케팅 회식이었다.
지금까지는 PPL 때문에 여유도 없고 유 차장의 눈치 때문에 참석을 잘 안 했지만 너무 빠지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확실히 남자가 있으니까 분위기가 좋네요.”
“그런 말 하면 직장 내 성희롱이야. 다혜 씨.”
홍경은 PM이 이미 술기운이 오른 박다혜에게 주의를 줬다.
“앗, 그런가요? 미안해요. 유빈 씨. 전 그냥 좋아서. 그나저나 신입 직원은 왜 이렇게 안 오지? 과장님, 저희 먹어도 되는 거죠?”
이미 먹을 건 다 먹어 놓고 물어보는 박다혜였다.
“차장님이 조금 늦어진다고 먼저 먹으랬어.”
마침, 장결희 본부장, 유진영 차장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신입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식당 별실로 들어왔다.
“미안합니다. 면담이 길어져서. 많이 늦었죠?”
본부장도 참석할지는 몰랐는지 다들 먹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바빴다. 하지만 유빈은 자리에 앉은 채 신입 직원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