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ed a tyrant from a slave trader RAW novel - chapter 53
무료하던 차에 누군가 자기를 부른 것을 알고 충동적으로 내려와본 것이었는데 와보고 나니 기가 막혔다.
마법진은 누더기 같았고 제 앞에 서 있는 놈은 누군지 알 수도 없었다.
아마도 자신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놈인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엇을 원하느냐.”
“헤레이스 아르시아를 원합니다.”
대공은 여전히 머리를 바짝 붙인 채 말했다.
“네가 원하면 스스로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그 여자는 특별합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고작 인간 여자를 찬양하는 말 따위나 듣자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목소리에 짜증스러움이 묻어났다.
대공은 다급해졌다.
“이상합니다. 그녀는 제 마법진을 봤고, 그것을 공격했습니다.”
허둥지둥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마신은 처음에는 흥미를 잃은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대공이 하는 말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마법진을 공격하다니.
그것은 그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준 일종의 호위기사 같은 것이었다.
마신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어디 가서 허망하게 당하지는 말라고, 그래서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만들어 준 거였다.
대공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대공에게 특별히 안 좋은 마법진을 주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는 마법진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말 검격을 맞은 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라운 것도 놀라운 거였지만 그보다는 화가 났다.
어디서 이런 멍청한 놈이 생겨나서 망신을 시키는 건지.
어쩌다가 이런 놈이 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번만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대공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신은 기왕 거기까지 왔으니 이 일은 해결해주자고 생각했다.
대공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가 인간계에 나타나서 작은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천계가 발칵 뒤집힐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무료하게 지내왔으니 그 정도의 소소한 재미는 만끽해도 좋을 것 같았다.
“헤레이스 아르시아. 그렇군.”
마신은 대공에게 일일이 말을 듣는 것도 귀찮아져서 그의 머릿속을 뒤졌다.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냈다.
대공은 마신의 기운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느꼈다.
올 때도, 갈 때도 마신은 말이 없었다.
대공은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발 받아들여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 * *
헤레이스는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로젠비크와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쌍둥이 황자들에게 걸렸다.
그들은 자기들도 헤레이스와 함께 놀 권리가 있다면서 따라와 버렸다.
헤레이스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이제 곧 다른 영지로 갈 거라는 생각을 하자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쉽기도 했다.
“레이아스. 루엔피스. 가면 잘할 수 있겠어?”
많이 자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들이었다.
헤레이스에게는 특히나 더 어리게 보이는 그들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노예상의 마차 의자 밑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그들의 모습이 선했다.
레이아스와 루엔피스는 헤레이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웃음을 지었다.
“잘해야 하잖아. 그리고 꼭 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앞에 있던 영주놈들이 아주 잘못을 많이 저질렀으니까 우리는 적당히만 해도 잘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그러니까 잘할 수밖에 없겠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잘할 수 있다는 말이야.”
레이아스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뭐라는 거냐, 하는 표정으로 헤레이스가 바라보았다.
“레이아스가 뭐라고 말하는 건지 헷갈리지, 헤레이스? 이거 리카르도한테 배운 거다? 영주가 돼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건 말을 어렵게 하는 거래. 그러면 나중에 잘못해도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할 수가 있대.”
루엔피스가 자랑스럽게 설명을 해 주었다.
“리카르도가 그랬다고?”
“응. 정말 중요한 얘기인 것 같았어. 그래서 나도 연습하고 있는데 나는 잘 안 돼.”
루엔피스는 희한한 부분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로젠비크는 그런 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로젠비크를 힐끔 바라본 레이아스가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헤레이스. 그런데 그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어? 여전히 나이 많은 늙은 남자가 좋아?”
헤레이스는 그 말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늙은 남자 안 좋아하는데?”
“형 정도면 늙은 거지. 나처럼 파릇파릇한 남자를 보면 저 남자 갖고 싶다! 그런 생각 안 들어? 헤레이스는 왜 그러지? 뭐가 잘못된 걸까? 원래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정상이란 말이야.”
레이아스의 말에 헤레이스는 아예 배를 감싸안고 웃었다.
그럴수록 레이아스와 루엔피스의 가슴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 나랑 레이아스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형이 워낙 막강하니까 우리가 한 사람씩 승부를 보려고 하면 영 가망이 없을 것 같거든? 그래서 말인데, 우리를 선택하면 우리 둘을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걸로 해 줄게. 나는 헤레이스의 사랑을 독차지하겠다는 욕심은 없어. 레이아스랑 같이 나눠 가질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루엔피스의 눈은 정말로 절절했다.
헤레이스는 웃겨 죽겠다면서 웃어댔고 로젠비크는 계속 놔두면 별소리가 다 나오겠다고 생각한 듯 쌍둥이들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헛소리들 하지 말고 그럴 시간에 너희도 너희 짝을 찾아.”
“우리 짝을 어디서 찾아! 보이는 건 맨날 시커먼 용병들뿐인데. 눈을 뜨면 말 궁둥이만 보이고. 그런데 어디서 짝을 찾냐고!”
레이아스의 말에 헤레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가면서 웃어댔다.
“너희 정말 왜 이렇게 웃기는 거야? 언제 이렇게 재미있어졌지?”
헤레이스의 말에 레이아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헤레이스. 늙은 남자보다 재미있는 젊은 남자가 더 좋지 않아?”
그러다가 로젠비크가 한 대를 더 얻어맞고 왜 때리냐고 대들었다가 한 대를 더 맞았다.
헤레이스는 간신히 웃음을 참고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헤어져 있던 시간도 많았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상당히 길어서 그런 건지 제 친동생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자식 같은 건지도 몰랐다.
“정말 잘 자랐네. 건강하게.”
헤레이스가 흐뭇해 하면서 말하자 레이아스와 루엔피스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헤레이스. 정말 고마워.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가도 정말 자주 와야 돼? 헤레이스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쁠 거야.”
“그래. 아주 가는 것도 아니잖아. 임시로 있는 거야. 보고 싶으면 언제든 통신 마도구로 나를 불러.”
“그러면 바로 올 거야? 매일 불러도 돼?”
루엔피스가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자니 섣부르게 대답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조절에 들어갔다.
“너무 자주는 안 되지만.”
“응. 그래. 알았어. 우리도 너무 자주 부르지는 않을 거야.”
그 말을 듣고서야 쌍둥이 황자들의 얼굴이 그나마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가 보지 그러냐? 여기에 있을 때 리카르도한테 조금이라도 더 배워두는 게 낫잖아.”
로젠비크가 말하자 두 사람이 입술을 내밀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자기들도 그게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어서 그런 것처럼 곧 말머리를 돌려 성으로 돌아갔다.
로젠비크는 헤레이스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다가 말에서 내려 같이 걸었다.
이제는 많은 것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용병들을 이용해 헤레이스는 정보 조직을 운용하기 시작했는데, 미네른의 수장으로서 정보원들을 다루던 실력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자 지금은 제법 도움이 많이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황제가 사라지고 대공이 그 자리를 차지한 채 실권을 장악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 그들은 그 상황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대공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할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귀족들이 대공을 배신하고 로젠비크에게 붙으려고 할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미는 손을 잡는다면 일은 쉬워지겠지만 로젠비크는 그러지 않겠다고 일찌감치 뜻을 정해놓은 후였다.
과거의 행적으로 이미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괜히 그런 사람들과 손을 잡는다면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힘이 들더라도 걸어가는 길을 탄탄하게 만들겠다는 뜻을 견고히 하는 그였다.
조금 더 걷는 동안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헤레이스는 바람이 이는 곳을 바라보았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헤레이스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로젠비크가 그것을 깨닫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피곤해. 헤레이스? 그만 걷고 돌아갈까?”
헤레이스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야 할까 봐. 그러는 게 좋겠어.”
그때까지 활달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피곤이 짙게 깔리는 것 같아 로젠비크도 걱정이 됐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헤레이스? 로이드한테 봐 달라고 할까?”
“그 정도는 아니야. 갑자기 피곤하긴 한데 조금 쉬면 나을 거야.”
헤레이스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돌아가자.”
성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헤레이스가 머무는 건물 앞에서 헤어졌다.
자신은 피곤해 바로 잘 것 같다면서 헤레이스가 그를 먼저 들여보냈다.
“내가 데려다줄게. 헤레이스.”
“아니야. 괜찮아. 혼자 갈게.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시간 많이 보냈어.”
에이바르와 용병 몇 사람이 그를 기다리는 듯 보였고, 그와 같이 가다가는 걱정을 끼치게 될 것 같아 고집을 부렸다.
‘왜 이렇게 머리가 무겁지? 속도 울렁거리는 것 같고.’
그녀는 빨리 걷지도 못했다.
바닥이 서서히 올라오는 것처럼 어지러운 기분이 느껴졌다.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서 자야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헤레이스는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비틀거리지는 않았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이 모이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몇 사람이 다가와서 부축해주겠다고 했을 터였다.
헤레이스는 간신히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거대한 해일처럼 졸음이 밀려왔고 순식간에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침대 아래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다가 형상을 이루었다.
마신이었다.
그는 헤레이스 아르시아를 단번에 찾아냈고 그녀를 조종해 방으로 데려오는 것에 성공했다.
그는 멀뚱히 헤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대공을 미치게 한 여자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생각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조금 난감했다.
대체 어떤 여자기에 그런 건가 해서 기대하는 마음이 컸는데 그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신은 인간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 헤레이스의 모습을 보고 역겹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조금 귀엽기는 한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헤레이스의 기억을 훑었다.
“…?!”
순간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두 개의 삶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뭐지?’
그는 자기가 착각을 한 건가 싶어 다시 살폈다.
그러나 분명히 두 개의 삶이 있었다.
그는 헤레이스의 기억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서 로젠비크 에버쿠젠을 발견했다.
레이아스 에버쿠젠과 루엔피스 에버쿠젠도 그의 눈에 보였다.
헤레이스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지식들이 그에게 옮겨졌다.
‘이게 뭐라는 거지?’
잠시 당황하던 마신의 얼굴에 기이한 웃음이 떠올랐다.
몰래 인간계에 내려와서 그들의 삶에 간섭을 하고 천계에 혼돈을 야기하려고 했다가 이미 천신 하나가 헤레이스 아르시아의 삶에 개입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감히 누가 이런 귀여운 짓을?’
잠시 유지되던 웃음이 사라지자 그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자신도 그럴 계획이었지만, 그보다도 천신이 먼저 규칙을 깬 이상 절대로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천계로 찾아가서 그 일을 밝히고 헤레이스를 다시 살아나게 한 천신을 찾아낼 기세였던 마신은 잠시 멈췄다.
그의 시선이 헤레이스에게 옮겨졌다.
‘아니지. 이렇게 쉽게 터뜨려버리는 대신에 더 재미있게 놀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지어졌다.
꽤 사악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는 헤레이스 아르시아를 살려낸 천신이 무엇을 위해서 그 일을 했는지 생각했다.
단순히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천신은 헤레이스 아르시아를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헤레이스 아르시아가 다시 삶을 살아가도록 했고 결과적으로 황자들의 삶이 달라지고 있었다.
‘황자들? 그들을 위한 포석이었던 건가?’
마신은 의자에 앉아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쌔근거리며 잠을 이루고 있었다.
평화로워보이는 광경이었다.
‘소드 엑스퍼트. 미네른. 대공, 이 멍청한 자식. 이용만 당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군.’
마신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헤레이스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테니 그러는 것이 당연하기는 했겠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