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ed a tyrant from a slave trader RAW novel - chapter 54
그는 자기편이 저지르는 실수와 멍청한 짓을 용납하지 못했다.
‘이 여자라면 마법진에 검상을 남겼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군.’
그는 헤레이스의 기억을 더 샅샅이 훑었다.
지금은 그것이 무기가 되어줄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느끼는 감정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마신이 알 수 있었던 것은 헤레이스가 다른 사람들과 나눈 얘기와 그들과 함께 겪었던 일 같은 것들이었다.
헤레이스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웃는 것을 보며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추측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특히나 헤레이스 아르시아가 로젠비크 에버쿠젠을 좋아한다는 것은 바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냉랭하던 헤레이스의 표정에 봄이 깃드는 것 같은 순간.
그때마다 매번 그녀의 앞에 로젠비크가 있었던 것이다.
‘흠. 재미있겠는데? 생각보다 훨씬.’
마신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턱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안개였다.
헤레이스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내비칠 생각도 없었기에 그는 사람의 형상을 가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에 좀 더 오래 있어야겠어. 급하게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겠고.’
마신이 인간계에 내려와 있는 일은 천계와 마계의 굳은 약속에 의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는 일이었지만, 이미 천신이 헤레이스 아르시아의 삶에 한 번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는 이상 한 번 정도는 그가 일탈을 해도 천계에서 봐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신이 인간계로 오면 마신의 힘이 상당히 제한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들 몇 명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그는 생각을 마치고 거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서서히 인간의 형상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억을 훑은 그는 헤레이스가 좋아하는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 것 같았다.
로젠비크 에버쿠젠의 모습과 최대한 닮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같지는 않게.
거기에 쌍둥이 황자들의 얼굴도 좀 집어넣고.
에이바르라는 놈은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를 보고 웃은 적이 많은 것 같아 적당히 그의 얼굴도 섞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주 좋군.”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뇌까렸다.
잘생긴 사람의 잘생긴 부위만 다 갖다가 섞어놔도 구성과 배치가 이상하면 굉장히 애매해진다는 것을 마신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계의 것과 다른 심미안을 가진 그는 크게 만족한 채 연신 웃음까지 지었다.
‘헤레이스 아르시아. 그러면 나를 위해서 한 가지 일을 하도록.’
그는 헤레이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고 한 가지의 생각을 주입했다.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 갖게 되는 생각이 아니지만 헤레이스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터였다.
잘만 되면 지금부터 아주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며 마신은 기분 좋게 웃음을 짓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헤레이스의 눈이 떠졌다.
* * *
회의실에 그 인원이 모인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세 황자와 로이드가 헤레이스와 함께 했다.
그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황성에서 세 명의 귀족들이 내려와서 로젠비크에게 화친을 제의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로젠비크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들이 영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을 가르쳐 주었다.
영지로 돌아가 성문을 열고 병사들을 무장해제시킨다면 그들을 공격하거나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면 싸움이라도 해 보고 영지를 뺏기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로젠비크는 일행을 거느리고 그들의 영지를 쳤다. 전투 경험도 적은 데다 실력도 없던 영주의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덕분에 로젠비크의 영토는 더욱 확장됐고 레이아스와 루엔피스는 그들이 맡고 있던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성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러느라고 마법 스크롤을 얼마나 써댔는지 몰랐다.
로이드는 꼭 매일 오셔야 하는 거냐면서 마법 스크롤이 두 분 황자 전하들 때문에 남아나질 않는다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황자들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와서 보지 않으면 너무 무섭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말에 로이드도 냉정하게 굴지 못했다.
그들이 회의실에 모인 것은 헤레이스가 불러서였는데 네 사람은 헤레이스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은 헤레이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좋은 생각을 해낸 것 같아. 지금 제국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사람은 대공이잖아. 그건 알고 있지?”
헤레이스의 말에 모두들 이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을 죽일 방법이 마땅치가 않다는 게 문제였는데, 내가 드디어 그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아.”
헤레이스의 말에 가장 반색을 한 사람은 로이드였다.
로이드는 대공저의 지하실에서 마법진을 본 이후 부담을 크게 느껴오고 있었다.
대공이 마법과 연관된 인물인 이상 그를 죽이는 것은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면 희생이 얼마나 커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로이드는 그동안 헤레이스와 함께 대공을 공략할 방법을 수도 없이 논의해 왔는데 성과 없이 끝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전에도 한번 해본 일이었지만, 역시 마법진을 공략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것 같아.”
헤레이스의 말에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거기에서 더 구체적인 얘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듯 그들은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그들을 둘러보며 어떠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게 다야?”
“응. 간단하잖아.”
“그건 알겠는데 구체적인 방법이 정해져야지. 로이드랑 갔을 때도 대공이 나타났었다며. 마법진을 공격하는 동안 대공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겠어? 바로 나올걸?”
루엔피스가 말하자 로젠비크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대공이랑 싸우면 되지.”
“우리 셋이 다 나가는 거군. 헤레이스랑 함께.”
로젠비크가 말하고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겠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다섯 분을 모시고 거기까지 공간 이동 마법을 할 수 있냐는 거죠?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그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헤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마법 스크롤로 가면 돼. 일단 거기에 가는 것까지만 하면 돌아오는 건 걱정을 안 해도 돼. 우리가 돌아와야 할 때는 서두를 필요가 없을 거거든. 그때는 대공이 죽어있을 테니까.”
로젠비크가 놀란 얼굴로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헤레이스가 말하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계획이 세밀하게 세워져있다고 해도 그녀는 몇 번이나 다시 확인을 하고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을 여러 번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해야할지 대비책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정적으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대공을 죽이지 못할 경우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로젠비크는 여러 모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헤레이스에게서 특별히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아서 이번에는 자신이 넘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매번 신중한 것도 좋지만, 이렇게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러 가기 전에는 덮어놓고 자신감을 덧입는 것도 좋을 듯하기도 했다.
“일단은 마법 스크롤이 필요한데… 그러면 저도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해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 마법 스크롤은 제한적으로 발동하니까 혹시 상황이 급변하면서 그게 듣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요.”
“언제 갈 건데, 헤레이스?”
루엔피스가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대공을 생각하면 늘 마음에 부담감이 있었다.
그는 그들이 넘어야 할 최종 관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대공을 처리하는 것은 이보다는 더 뒤의 일일 거라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헤레이스의 판단에 늘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다.
자기들도 모르게 이미 길들어 버린 것이다.
헤레이스가 두 번째 삶을 살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서 그동안 정확한 판단을 내린 거였고 이제는 많은 변수들이 작용한 결과 더는 전처럼 맞아떨어지지 않을 거였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헤레이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는 경향이 있었다.
앞으로는 자기가 하는 말이 틀릴 수도 있을 거라고 헤레이스가 이미 여러 차례 말을 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경계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 헤레이스와 황자들은 그 자리에서 대단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로이드는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끝없이 수련을 해 왔으니 그들이라면 대공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랬다. 이제는 돼야만 하는 거였다.
“에이바르나 다른 사람한테도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로젠비크가 말하자 헤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거야. 그냥 우리끼리 갔다 오자. 금방 끝날 거야. 결과만 알려주면 되지. 괜히 그 사람들까지 걱정하게 할 필요 없잖아?”
헤레이스의 말에 로젠비크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로이드의 말에 따라 그들은 다함께 공간 이동을 했고 잠시 후 그들의 모습이 회의실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 *
대공의 지하실에 온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헤레이스는 긴장감을 다 누그러뜨리지 못한 채 검을 잡았다.
원탁 밑으로 예의 그 마법진이 보였다.
“우선은 내 피를 먹여야 되는 거겠지?”
헤레이스의 말에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법진이 함부로 날뛸 경우에 대비하는 한편 대공이 갑자기 나타날 곳을 예상하며 주시하고 있었다.
공간 이동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대기의 성질이 아주 잠시 동안 바뀌게 되는데 그것을 자기가 먼저 알아차린다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집중했다.
한 번의 방심으로 일이 크게 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모두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만약 이곳에서 대공을 죽일 수 있다면 지지부진하게 계속되던 전쟁을 이대로 끝낼 수도 있었다.
대공이 사라진다면 황궁에 무혈 입성하는 것도 가능해질 거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꿈에 부풀었다.
그러면서도 방심하지 않으려고 집중하고 또 집중하면서 원탁 아래를 노려보았다.
아직 그들에게는 마법진이 보이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로젠비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로젠비크가 준비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쌍둥이 황자들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헤레이스가 단도를 꺼내자 그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마법진을 깨우기 위해서 작은 상처를 내려고 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긴장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헤레이스가 단도로 제 팔을 얕게 그었다.
몇 방울의 피가 채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마법진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듯이 솟았다.
그러자 황자들의 눈에도 마법진이 보였다.
“지금이야!”
로젠비크가 소리쳤고 다른 황자들도 검을 휘둘렀다.
헤레이스가 단도를 집어들기 전부터 이미 검에 마나를 밀어 넣어두고 있었던 그들은 단번에 오러를 만들어 날릴 수가 있었다.
마법진을 향해 오러의 폭풍이 날아들었다.
마법진은 미친듯이 날뛰었다.
저항할 수 없는 유혹 앞에서 몸부림치는 그 모습은 마법진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 같았다.
‘대공은 왜 아직 안 나타나는 거지?’
헤레이스는 마법진을 공격하면서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다.
그 생각을 하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대공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공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대공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간신히 그 자리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마법진의 공격 때문에 그렇게 된 듯했다.
대공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헤레이스는 그의 시선이 허공을 떠도는 것을 보았다.
“저에게… 저에게 왜 이러신 것입니까. 저를 버리신 것입니까?!!!”
대공이 외쳤다.
헤레이스는 소름 끼치는 그 말을 들으면서 흠칫했지만 그를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로젠비크도 마찬가지였다.
로젠비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시선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 어떤 공격을 할지 서로가 교환을 끝냈다.
쌍둥이 황자들은 대공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마법진을 공격하는 것에만 열중했다.
마법진은 이제 크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움직이는 폭도 적어지고 더는 몸부림조차 치지 못하게 된 것 같기도 했다.
누가 먼저 끝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진의 문양들이 희미해지고 있어요. 마법진이 곧 사라지려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버티세요!”
로이드의 말에 모두들 마지막 공격을 퍼부었다.
마지막.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알 수 없는 힘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로젠비크가 대공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날아갔다.
마나의 소모가 엄청나서 한번 사용하고 난 후에는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오러 블레이드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을 사용할지 말지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