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127)
128화 구천지옥 (1)
해무파 마을로 들어서는 야수문 행렬은 요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가는 코끼리는 남만 너머 초원지가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든 동물이고, 그 뒤를 이어 가는 호랑이와 코끼리들도 예사 맹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럴까?
길거리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응? 왜 이리 사람이 없어?”
“파하하, 무림맹 놈들이 야수문의 행차에 겁먹고 몸 사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너무 조용한데?”
구천 행성은 어딜 가나 증명의 비석을 중심으로 발전된다. 비석으로 인한 역사의 가호는 중원인도, 마몬인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축복.
남만 오지에도 비석이 하나 있다.
그 드넓은 남만을 무림맹에서 딱히 탐내지 않는 것도, 험지를 뚫고 쟁취하기에 비석 하나는 아무런 매력이 없어서다.
반대로 남만에서 힘을 기른 가문들은 언제나 중원 땅을 탐내 주기적으로 침공해 왔는데, 맹에서 이를 적절히 견제해 왔다.
야수문의 이번 출정도 마몬족 사냥으로 그들의 비석을 뺏는 것이기는 하나, 적절한 거래를 통해 남만 인근의 비석과 바꿀 속셈이었다.
해무파 마을은 무림맹 후방의 최요지 마을.
오가는 사람들도 많고, 고수들도 많아 언제나 후방의 중심지 역할을 해 오던 곳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조용하기만 했다.
행렬을 막아서는 무사들도 없고, 심지어 구경꾼들도 없다.
“음, 대형 어딘가 좀 이상한데요?”
마을이 불과 50장도 남지 않은 곳까지 다가오자 부하들도 이상한 낌새를 읽은 듯했다.
야수문 문주 구낙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을을 살폈다.
‘무슨 속셈이지?’
오가는 행인도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한 게 의심스러웠다. 마을 자체를 방패삼아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동파! 가서 보고 와라.”
“넵.”
동파라 불린 날쌘 부하가 뛰어가 마을 초입을 대충 둘러보고 돌아왔다.
“거리는 쥐새끼 하나 없고, 사람들은 죄다 건물 안에 숨어 있습니다.”
구낙수가 자신의 생각이 맞음에 콧방귀를 꼈다.
“흥! 이따위 허술한 매복으로 우리 야수문을 상대하려 하다니.”
무림맹 놈들은 언제나 세외세력들을 오랑캐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마몬족처럼 반드시 죽여야 하는 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방도 아닌.
그저 세외 오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로 업신여김 당해 왔다.
이따위 얕은 매복술을 걸 정도로 무시당했다는 것에 구낙수는 빈정이 상했다.
“흥, 놈들에게 알려라. 마몬족을 사냥하러 가는 길이니 길을 열라고 말이다.”
“대형. 한바탕 안 하는 겁니까?”
구낙수가 부하의 뒤통수를 때렸다.
“네놈은 출정 목적도 모르더냐?”
같은 중원인을 잡아 봐야 공적 대신 악명만 쌓인다. 남만을 떠나 야유하는 이유는, 마몬족을 사냥해 그들의 마을을 뺏고 야수문의 힘을 드높이기 위해서다.
단련으론 한계에 다다른 경지를 마몬족과의 투쟁을 수단으로 공적을 인정받고 역사의 축복을 받음으로써 더 높은 경지에 이를 것이다.
늘 그래 왔듯 세외세력의 팽창을 꺼려하는 중원인들의 방해가 있겠지만, 이번 출정은 야수문 전력의 대부분을 끌어온 만큼 결코 호락호락 당해 주진 않을 것이다.
“겁먹은 쥐새끼들 몇 잡아봐야 뭐하겠느냐? 가서 전해라. 음식과 술을 내어오고, 격전지로 가는 길을 트라 전해라.”
“예에.”
한 대 맞은 수하가 꿍얼거리며 말을 몰아 갔다.
“쳇, 싸우자는 말이구만.”
여태 역사가 그래 왔듯, 저런 무례한 요구에 부흥하는 무림맹 소속 가문은 없다.
가문 하나하나의 힘은 별 볼 일 없지만 단체로 엮인 그들의 결속은 수대에 이르러 두터웠으니 말이다.
마을까지 뛰어간 수하가 쩌렁쩌렁 소리쳤다.
“대 야수문의 고수들이 마몬족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격전지로 가는 길이다. 어서 길을 트고 음식과 술을 내어와라!”
한 호흡 크게 숨을 들이켠 후 본론을 꺼냈다.
“거부한다면 마을 전체가 야수들의 발아래 짓밟히고 불탈 것이다!”
이내 눈먼 화살이라도 날아오기 전에 부리나케 내뺀 부하가 문주에게 보고했다.
“똑똑히 전했습니다.”
“잘했다. 모두 진격 준비…….”
막 개진을 알리려던 구낙수는 눈을 비볐다.
“저게 뭐냐?”
“하얀 깃발인데요?”
“그러니까 그게 왜…….”
마을 대로를 따라 흰 깃발을 매단 일단의 무리들이 음식과 술이 담긴 수레를 끌어오고 있었다.
*수호에게 당한 야수문 문도들이 탈출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스스슥.
온몸을 구속한 식물을 단검으로 쉴 새 없이 비볐다.
“대체 이건 무슨 나무가 이래!”
질기기가 어지간한 쇠심줄보다 더하다.
분명 나무넝쿨인데 칼로도 잘 잘리지 않아, 톱질하듯 반시진이나 낑낑 거리고서야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어서 문으로 돌아가자.”
“안 돼! 놈의 사술을 봤잖아.”
길들여진 늑대들이 제 주인을 만났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 흔들며 넘어가버렸다.
더군다나 주변 식물들을 이리 다루는 술사는 여태 본 적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
“당장 문주님께 알려야 해.”
문의 대부분 고수들이 출정 상태다.
남은 무사들만으로는 그 고수를 막을 수 없다.
가만히 있던 문도 하나가 말했다.
“목영, 넌 문주님께 알려. 너는 문으로 돌아가 상황을 살펴봐.”
“넌?”
“난 그분을 모시러 가야겠어.”
“그분?”
“만충 도사님.”
“아, 그분이라면!”
문도들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럼 서둘러.”
늑대를 뺏겨버렸지만, 태어나길 남만에서 태어나 정글을 놀이터 삼아 자란 문도들이다.
원숭이보다 빨리 내달려 각자 목적지로 흩어졌다.
*만충 도사는 한달음에 남만 야수문 본단을 찾았다.
“저깁니다.”
“허허, 내 생에 남만이 외부인의 침입에 무너지는 날이 오다니.”
그의 나이가 현재 207살.
사실상 역사 이래 손에 꼽을 정도로 외부의 침입이 없던 곳이다.
빽빽한 정글을 지나 나만 야수문의 입구인 사곡으로 접어들었다.
양쪽으로 까마득히 높은 절벽과 골짜기 아래 자란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절경인 곳인데, 숲길을 걸을수록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응? 사곡의 뱀들이 어딜 갔느냐?”
“사곡의 고수들도 이번 출정에 따라 갔습니다.”
전통적으로 사곡은 야수문을 지키는 문지기를 자처하는 집단이다.
“그런 멍청한…….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찌 한 마리도 없을 수 있느냐?”
사곡에서 길들인 뱀들 외에도 야생의 뱀들이 많이 살아 외지인들에게 위험한 곳이다.
“그것이 침입한 고수가 사술을 부리는데 늑대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 뱀들도…….”
야생동물들의 실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야수문 마을 입구를 지키는 조련사들이 죄다 박제되듯 넝쿨에 포박되어 있었는데, 그들 곁에 있어야 할 길들인 곰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것이냐?”
“뭔가 지나간다 싶더니 주변 풀들이 자라나 저희를 포박했습니다.”
“곰들은?”
“곰뿐만이 아닙니다. 길들인 놈, 막 사냥해 가둬 둔 놈 할 것 없이 죄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허.”
만충 도사는 서둘러 마을 이모저모를 살피다가 야수문의 핵심인 증명의 비석으로 향했다.
“이쪽으론 발걸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허면 놈은 어디로 갔느냐?”
“사육장으로 갔는데, 그 이후 사라졌습니다.”
사육장엔 아직 덜 자란 맹수들과 한창 조련중인 녀석들이 있는 곳이다. 아직 길들이기를 마치지 않은 포악한 녀석들도 있는 곳.
“설마.”
만충 도사가 서둘러 사육장을 찾으니, 끝없이 이어진 창살 안에 빼곡히 들었을 야수들이 종적을 찾을 수 없이 사라져 있었다.
주변에 조련사들이 어김없이 넝쿨에 묶여 있었다.
“놈이 어디로 갔느냐?”
“요, 용을 타고 날아갔습니다.”
“용?”
“도마뱀처럼 다리 달린 용이었습니다.”
“허어.”
만충 도사가 탄식했다.
야수문이 기습을 당했는데 야수들이 죄다 사라져 버렸다. 허나, 문도들의 피해는 전무.
사람 하나 다치지 않고 맹수들만 사라져버렸으니 기행도 이런 기행이 없었다.
야수들을 훈련시키거나 전력으로 쓰는 문파는 몇 있다. 그중에서도 야수문은 구천 행성 제일이라 자부하는데 어이없게 털려버렸다.
들어본 적도 없는 고수의 출현에 만충 도사는 깊은 호기심이 들었다.
별종이라 불리며 야수문에서도 쫓겨난 전대의 고수가 이 순간 중원행을 결정지었다.
비이이이이.
만충 도사의 곁으로 몰려든 벌을 보며 의지와 내력이 담긴 목소리를 전했다.
“쫓아라.”
비이이이.
수백의 벌 떼가 사라진 괴한의 자취를 찾아 움직였다.
*높게 난 비룡이 서서히 고도를 줄였다.
“여기야?”
“확실히 전설대로의 지형이오.”
“아까처럼 없으면 괜히 헛걸음인데.”
“전설일 뿐이라 확실한 것은 아니오.”
수호 일행은 남만 야수문을 털면서 어지간한 맹수들을 모조리 길들여 잡아갔다.
‘양은 충분하고 이제 강한 놈으로.’
이무기나 인면지주처럼 강력한 놈들 위주로 찾아다녔지만 야수문을 떠난 지 벌써 네 번째 허탕이다.
“저기서 내려서 걷자.”
수호 일행이 이름 모를 산에 내렸다.
산세도 날카롭고 자란 나무들이 뾰족한 것이 묘하게 으스스한 숲이다.
“실상 많은 영물들이 있지만, 구미는 거의 구전으로 내려오는 놈인지라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소.”
“그만 조용히 해봐.”
수호는 숲의 나무에 손을 대고 주변의 기억을 읽었다. 감각이 확장되며 오가는 토끼, 고라니부터 온갖 동물들의 자취를 쫓았다.
한참 만에 눈뜬 수호가 씩 웃었다.
“있다.”
“응? 정말이오?”
여기까지 안내한 당진철도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근데 왜 꼬리가 여덟 개냐?”
“허, 팔미요!”
놈도 이무기처럼 세월을 먹고 꼬리가 하나씩 자라난다. 아직 덜 자란 놈이니 상대하기는 더 쉬울지 모르나, 즉각전력으론 아쉬웠다.
“아쉬운 대로 얘 데려가야겠다.”
구미나 팔미나 어차피 길들일 자신이 있었기에, 수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산을 탔다.
“삼촌, 백구 부를 시간이에요.”
“벌써?”
수호가 백구를 불러보니 그간 뜸했던 준호의 편지 몇 장과 보고서 한 장이 들어있었다.
구구절절한 길드 현황보고와 건의사항 하나가 있었는데, 요약하면 간단했다.
‘이미 과잉전력이니 하던 일 얼른 하고 돌아오세요.’
수호는 보고서를 읽고 탄식했다.
“그러네. 그냥 빨리 돌아가면 되는 일인데.”
큰 깨달음에 수호는 손뼉을 쳤다.
기이한 야수들 수집에 재미를 붙이다보니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다.
실상 야수들을 증원하는 이유는 수호의 부재기간 동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인데 말이다.
“얘만 잡고 얼른 남궁 목 따러 가자.”
수호는 당진철을 보았다.
“모용 걔 치는데 도와주면 넌 뭘 해줄래?”
“……만약 나의 복수를 완수할 수만 있다면…….”
복수 자체를 삶의 동력으로 삼아온 당진철이다.
복수를 마치고 당가를 재건하겠다는 2차 목표가 있었으나 사실 불가능한 목표다.
재건해 봐야 반쪽짜리 가문.
사천당가가 아니라 당씨 성을 쓰는 흔한 무림가문이 될 뿐이다.
그 혼자 모든 걸 재건해내기에는 가문의 자산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으니까.
만약.
정말 만약 이 살생부의 이름을 모두 지울 수 있다면.
“복수를 마칠 수만 있다면……. 나를 가져도 좋소.”
수호가 기괴한 얼굴로 당진철을 보았다.
“설마…….”
이것이 구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