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46)
447화 – 루나 (3)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다.
“진정해. 나도 그 녀석과는 좋은 관계가 아냐.”
수호의 말에 야누르는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야누르의 경계심에 수호가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영 멍청이는 아니구나.”
“응? 정령을 흉내내?”
흥미로운 이야기에 수호는 턱을 쓰다듬었다.
“네가 거래 대가로 정령의 힘을 받은게 아냐?”
야누르의 말에 수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부터 이리 잘 흥분하는 성격인지, 긴 세월 억압된 삶을 살아오느라 자아가 뒤틀려 괴팍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충 어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루나 행성의 정령이 진짜다?”
“호, 자연이 정령이다?”
화가 나서 한참 말이 길어지던 야누르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흥분해서 떠들다가 조금 이성이 돌아왔는지 입을 딱 닫았다.
야누르가 그러거나 말거나 수호가 씩 웃었다.
“창조주 흉내도 냈나 보네. 정령을 놈이 만들었단 말이지?”
야누스가 정령을 만들어냈다.
그 근간이 되는 힘은 다름 아닌 조화력.
생명의 에너지다.
나무에도 있고, 생명에도 있는…….
‘계약이라 그런가?’
정령은 계약자의 마력을 베이스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엘프 정령사들이 대부분 그랬다.
자신의 마력을 빌려주고 정령이 그것을 다룬다.
‘난 둘 다 쓰던데.’
수호야 조화력 스탯이 차고 넘치니, 마력을 쓰기도 하고 주변의 생명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엘프들의 경우만 생각하면 확실히 족쇄라는 의미도 이해는 갔다.
“그럼 루나 행성 정령들은 따로 계약을 안 한다는 거네?”
“오, 조금 똑똑해졌네.”
흥분하면 주절주절 잘도 읊어주더니.
수호는 조금 더 화를 돋워 볼까 하다가 참았다.
“좋아 날 소개하지. 수호다.”
“왜 대답이 없어?”
“그럼?”
“허,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네. 멍청하게 속아서 사기나 당해놓고.”
“너, 야누스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구나?”
제 스스로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더니 이제 와 저리도 주절주절 말하는 걸 보면, 화가 나면 자기통제가 심하게 되지 않든가…….
“너, 실은 내가 그냥 가버릴까 봐 두렵구나?”
“오. 세게 나오네.”
수호는 빙긋 웃었다.
녀석은 멍청하지 않다.
어쩌면 저 흥분된 말도 꾸며낸 감정일지 모른다.
녀석이 원하는 건 뭘까?
오랜 시간 갇혔으리라.
녀석에게 있어 수호의 등장과 지금의 대화는, 흡사 무인도에 표류했던 자가 지나는 배를 발견한 것과 같지 않을까?
“확실히 그렇네.”
녀석의 침묵에서 불안감이 읽혔다.
이대로 떠나버리면 야누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또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애초에 모든 주도권이 수호에게 있는데 녀석은 화를 내고 있다.
마치 허술한 것처럼 보이도록.
‘이용해먹을 가치가 있다고 보이려는 걸까?’
녀석이 원하는 건 뭘까?
“넌 복수하길 원하는 거야? 거기서 탈출하길 원하는 거야?”
결국엔 둘 중 하나다.
아니, 둘 다인가?
“왜?”
죽일 수 없다는 건 공감한다.
신계에서 수없이 싸웠어도 야누스를 타격할 방법은 전혀 없었으니까.
요정왕은 실체가 없다.
하지만 후자의 말은 이해되질 않았다.
“죽여서는 안 된다고?”
복수심도 없는 놈이 그렇게 흥분해?
미친놈이든가, 여태의 흥분이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자백밖에 안 된다.
“뭘?”
루나도 지금의 지구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니, 하드웨어만 보자면 지금의 지구가 멸망한 루나의 수인족을 대신해 인류가 부흥해 점거한 루나겠지만…….
“말을 바꿨나 보군.”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지켜졌는데 왜 그렇게 분개하나?”
“허, 신수 강림까지 갔나 보네.”
수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약속은 지켰다. 외계종까지는 막아줬나 보니까. 그 뒤에 일어날 신수 강림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문제지.
“으음.”
그분이 누군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쿠로를 말하는 거냐?”
“응? 호랑이 말하는 거 아냐? 두 발로 걷는 덩치 큰 호랑이 말야.”
“친구니까.”
야누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짧은 침묵 동안 얼마나 많은 추리를 했을까?
제 혼자 말을 잇던 야누르가 불현듯 말을 멈췄다.
“왜?”
“뭘?”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래.”
“…….”
수호의 미간에 진심을 담은 주름이 생겼다.
“어쩌면 내가 착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연기는 무슨, 이놈 그냥 하도 오래 갇혀 있어서 멍청해져 버린 게 아닐까?
“그냥 네가 하도 오래 갇혀 있다 보니 미쳐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
수호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어차피 시간은 수호의 편이다.
야누르는 늘 그랬듯 이곳에 뿌리내리고 있을 터였으니까.
지금이 야누르가 비협조적이라면 일단 물러나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나은 선택.
“가기 전에 하나만 묻자.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루나가 멸망한 걸 아는가 본데, 어떻게 알았냐?”
분명 야누르가 아루카 행성에 갑작스럽게 소환되었을 때 루나는 멀쩡했다.
그랬으니 고향에 돌아가 안부를 전해달라는 안배를 남겼겠지.
수호가 궁금한 건, 눈도 귀도 없는 그가 어떻게 루나 행성의 결말을 알고 있냐는 것이다.
“아, 그 정령?”
루나의 정령은 아루카의 엘프들이 다루는 정령과 다르다고 하였나?
야누르의 친우들.
정령들은 루나의 자연에서 태어난다 하였다.
“그럼 행성의 힘인가? 흐음. 차원에너지인가.”
루나 행성의 정령들이 베이스로 하는 힘이 조화력이 아닌 차원에너지일지도 모르겠다.
차원에너지가 몸에 쌓이면 각성을 하고, 더욱더 쌓이면 각성 레벨이 오른다.
우린 그걸 경험치라 부른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다른 차원의 생명을 죽여 그것을 뺏는다.
사냥이라는 행위를 통해 강해진다.
고블린도 레벨업을 하고, 오크도 한다.
루나 행성의 수인족들도 했겠지.
정령도 그랬던 모양이다.
“정령이 다 사라졌나?”
“으음.”
차원이 사라졌으니 에너지도 사라졌다라.
수호는 그 말을 조금 곱씹다가 작별을 고했다.
“뭐, 나는 네가 남긴 지팡이 찾으러 갈 테니 다음에 또 보자고.”
“왜?”
“그랬지.”
대답과 달리 조금도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수호의 목소리에, 야누르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상대가 누군들 어떠하리.’
자신에겐 선택지가 없다.
떠날 수도 없으니.
이대로 기다리며 다른 존재가 찾아오길 기다리기는 무리다.
상대는 야누르가 약속의 나무에 갇히고 요정왕이 아닌 처음 대화해보는 존재니까.
주변에 얼쩡거리는 엘프들은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더 이상 재고 말고 할 때가 아니다.
상대가 원하는 게 있어 보여 협상 좀 하려고 판을 깔아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대화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 협상이 미숙했던 것 같다.
“갑자기?”
수호가 슬쩍 웃었다.
녀석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돼.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지.”
야누르가 급해졌다.
저 녀석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무얼까?
오랜 고립 생활로 사고가 굳었다 하여도 그의 지능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목적을 물었지. 복수가 쉽지 않다고 하니…….’
그러다 갑자기 녀석은 확 식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나무 기둥에 댄 손의 감촉이 느껴지고 그 감정이 옅게 느껴진다.
목소리도 많은 것이 담겨있어 감정이 조금 읽힌다.
녀석이 원하는 건 분명.
“음? 아까는 죽일 수 없다며? 차원관리자여서.”
“오, 복수랑 탈출을 동시에?”
들뜬 음성에서 수호의 감정이 느껴진다.
‘기뻐해?’
야누르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 있어?”
“권한? 그렇군.”
이 녀석은 확실히 다른 세계수와 다르다.
세계수들이 그저 기본적인 툴이라면 야누르는 관리자라 하는 게 맞았다.
보조적이라고 했지만 스스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실체도 없는 그 녀석을 어떻게 잡아 오지?”
야누르의 탄식을 들으니 그녀도 생각해보진 않은 모양이다.
‘정령왕을 정령으로 잡아와?’
“나도 정령과 계약했다.”
야누르는 말을 하다 말고 경악했다.
불현듯 익숙한 네 개의 기운이 느껴져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