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45)
446화 루나 (2)
엘프 신녀 리오라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이 정도 압박감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평생에 처음이다.
그 존재감은 어머니 야누르보다 커 보이고, 그 기운은 숨을 옥죄어 온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그의 기색이 그녀의 심리를 더욱 궁지로 몰고 있었다.
저벅.
천천히 걸어오는 그 발걸음이. 더없이 크게 울리며 압박했다.
척.
그가 자신의 앞에 서자 숨을 참았다.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분명 앞을 보고 있는데 그를 쳐다보기 힘들었다.
눈을 마주치면 꼭 그의 눈빛이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시간도 결국 흐르고, 그의 입술이 열렸다.
“너 알고 있었지?”
“…….”
“긍정이냐?”
“허윽. 허억!”
“숨 쉬어. 잡아먹냐?”
수호의 말에도 리오라는 가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의 심호흡을 했다.
수호는 기다려주었다.
자비롭게.
“추태를 보였나이다.”
“대답이나 해. 너 알고 있었어?”
“무엇을 말함입니까?”
“야누르가 묘족이래.”
“그분은 하이엘프 중에서도 하이엘프. 순혈 중에서도 순혈. 우리 엘프들을 이끄시는 어머니십니다.”
“아.”
수호는 대번에 이해했다.
“하이엘프가 묘족이랑 엘프 혼혈이었구나.”
“…….”
“이해했어.”
수호는 기가 확 죽어버린 리오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도 자손 중 하나냐?”
“…….”
“뭐, 구전 그런 거 좋아하잖아. 어른들이 말 안 해 줘? 아무리 족보 없어도 엄마가 누군지 할머니가 누군지 정도는 알 것 아냐?”
기록이 없더라도 그들이 좋아하는 구전이 있지 않나?
“어머니께서는 자손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녀의 말소리는 작았다.
마치, 수호에게만 들렸으면 하는 심정을 담아.
“그럼 뭐야. 하이엘프와 엘프 구분은 뭐고?”
“그것은 어머니의 희생과 관련이 된지라…….”
점점 기어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수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하이엘프니 엘프니 저들끼리 구분해 봐야 외형적인 변화는 없다.
“뭐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수호는 세계수를 향해 걸었다.
세계수는 본디 행성을 관리하는 툴.
A.I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최초의 세계수인 야누르라면 어느 정도 자아가 더욱 강력하지 않을까?
세계수는 거대한 나무다.
최초의 세계수는 그 자체로 아파트 몇 개는 이어 붙인 정도의 몸통을 자랑하기에, 근접할수록 주변에 나무가 없었다.
기둥 근처에는 태양 빛이 닿지 않아 어둠뿐이었고,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함을 자랑했다.
숲이 보이지 않고 시야가 트인 이후에도 한참을 걸어가야 할 정도로 세계수 주변의 황무지는 넓었다.
수호는 길잃은 강아지처럼 자신을 따르는 리오라를 보며 물었다.
“너도 글 모르냐?”
“모르옵니다.”
“그렇게 어머니로 모시는 야누르가 왜 글을 안 가르쳐 줬을까?”
“…….”
묘족 야누르가 엘프들의 노예 해방을 도왔다.
“너, 저기 기록 내용은 아냐?”
“알고 있나이다.”
수호는 아직 저 멀리 우뚝 솟은 빌딩 같은 세계수를 보며 천천히 걸었다.
뛰면 한달음이지만 느긋했다.
“이야기해 봐. 들은 대로.”
그 구전이니 뭐니.
“선조들은 드래곤과 오크들에게 핍박받고 있었지요. 그때 지구에서 엘프 무리를 이끌고 오신 엘프퀸 야누르께서 선조들을 구하셨지요.”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리오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드래곤과 오크 무리를 내쫓고 어머니께서는 스스로를 희생하여 이 세계를 지키는 나무에 깃드셨고, 함께 왔던 하이엘프들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이 세계를 지켜왔지요.”
“…….”
“어머니는 세계수가 되기 전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새기시어 엘프들의 평화와 안녕을 비셨습니다.”
수호는 리오라를 보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만 보자면 전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구나?”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자애로운 어머니가 왜 글을 써두고 읽게 하질 않았을까?”
“…….”
수호는 대답하지 못하는 리오라를 채근하듯 물었다.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봤어?”
“…….”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수호는 애초에 이들이 하이엘프라 칭한 무리에 대해 지적했다.
“리오라는 이곳에 혼자 왔지. 애초에 같이 왔다는 무리는 그녀가 처음 구한 엘프 부족이겠지.”
“억측이나이다.”
누구나 자신의 믿음이 부정당하면 부인하고 본다.
“아니, 내 생각이 그렇단 게 아니고,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다니까?”
“…….”
“하이엘프라고? 허. 내가 봤을 땐 그놈들이 주도한 짓 같은데…….”
수호는 하이엘프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묘족과 혼혈도 아니다.
야누르는 출산한 적이 없다고 하니까.
‘모습은 차이가 없는데 수명이 달라.’
하이엘프들은 오래 산다.
왜 그것이 가능한가?
겉모습은 같은데 피가 달라서?
아니면 축복?
“야누스 짓 같은데.”
축복이라고 할 만한 힘을 일으킬 존재라면 떠오르는 게 야누스뿐이었다.
창조주의 첫 번째 피조물.
약속의 나무에 종속되어 자유가 억압된 요정.
생명력을 근원으로 하는 조화력을 다루는 정령왕.
수호는 생각할수록 그 녀석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화력의 근간이 되는 나무정령의 힘도 사실 생명의 기운이니까.
녀석이 무슨 짓을 한 것이 틀림없다.
“엘프들은 본래 정령을 다뤘나? 그런 기록…….”
수호는 말을 삼켰다.
이놈들은 기록이란 걸 하지 않는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건 없냐?”
“어머니의 자애로우신 희생으로 정령들이 엘프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의 나무에 잡아 삼켜지고 나서네.”
야누르는 분명 거래를 했다고 했다.
자신의 지구 루나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남는 선택을 했다.
그 대가인지, 최초로 하이엘프를 자처했던 엘프들과 정령왕과의 밀약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엘프들이 정령을 다루기 시작했다.
“역사가 짧네.”
“구전 이래 수많은 정령사들이 났사온데 어찌 짧다 하십니까?”
“그 이전에 노예로 부림당한 역사는 더 길 테니까.”
“…….”
수호는 아직 만나 보지도 못한 야누르의 고충의 일면을 본 것 같았다.
‘실컷 노예 해방 시켜놨더니 막막했을 거 같은데.’
수호는 혼란에 빠진 듯한 리오라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들은 기록을 포기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것마저 포기해버렸을까?
이 순간 수호가 누군가가 떠올랐다.
“가즈라가 낫네.”
정령왕과 계약한 자신의 운명과 종족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고뇌한 엘프.
조상의 말을 신언처럼 받들어 살아온 엘프 신녀보다 고뇌하는 대마법사가 더 나아 보였다.
“크네.”
어느새 세계수 기둥이 벽처럼 보이는 곳까지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까마득한 높이까지 가지도 없이 매끈한 기둥이다.
“어디 있으려나.”
약속의 나무에 숨겨진 지팡이를 찾으라 했다.
지팡이도 나무로 만들어졌다면 가지 어딘가에 있을 텐데.
혹시 엘프들이 숨겼나?
뒤통수 친 거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데…….
‘야누르도 어렴풋이 알았겠지.’
자신이 이용만 당했단 걸 알았을 터이니, 엘프들에게 굳이 글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적절히 안배를 해 뒀을 것인데.
수호는 대충 나무를 살펴보다가 세계수를 향해 걸었다.
여태 잘 따라오던 리오라는 멈춰 섰다.
“조심하십시오.”
세계수와 50미터 정도 남은 거리였다.
리오라의 말에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왜, 잡아먹힐까 봐?”
“…….”
리오라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세계수는 무지막지한 마력을 끌어들인다.
엘프 신전인 야누르 부족에 엘프 마법사들이 몇 없는 이유?
모두 잡아먹혀서다.
그들의 어머니 세계수는 마력이 담긴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 혈석도, 마법사도, 심지어 이 행성 자체의 생명력까지도…….
저 인간 신이라고 다를까?
아니, 어쩌면 기대가 된다.
저 무섭게만 느껴지는 인간신마저 우리들의 어머니가 잡아먹어버릴 터였다.
그리되면 우리 엘프들은 계속해서 번성하겠지. 이 평화를 쭉 누리겠지.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살겠지.
이게 맞는 걸까?
‘…….’
리오라는 애써 혼란스러워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신과 신의 대결을 보게 생겼다.
정령왕은 상대도 되지 않는 엄청난 힘을 가진 인간 신이다.
어머니 야누르는 어떨까?
리오라의 기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수호는 거대한 나무에 닿았고 손을 뻗었다.
척.
단단한 나무를 만지자
수호는 세계수를 만질 때마다 공통적으로 뜨던 그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기다렸다.
곧 코드 확인하고 승인해주겠지.
세계수의 역할은 차원 균열을 억제하고 내부 네트워크를 관리하기 위한 것.
그것을 위한 행성 관리 툴 그 자체다.
이 세계수에 대한 권한이 없어도 현재 상태 정도는 보여주겠지.
오룬이 그러했고, 주울이 그러했다.
하지만…….
대뜸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 수호는 잠깐의 당황과 곧 기쁨의 미소가 지어졌다.
기대하긴 했지만, 기계 같던 다른 세계수와 다르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가?’
야누르가 세계수에 갇히기 전을 떠올려보면 어떠한가.
그때까지 약속의 나무로 불리며, 차원 관리자 역할을 하던 야누스도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랬으니 야누르와 대화하고, 협상해서 자유를 얻었겠지.
수호는 기꺼운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나 수호.”
“엘프들은 너랑 말 못 했나 봐?”
야누르의 반응에 수호는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더 격한 반응이다.
“진정해. 그래도 불쌍해서 도와줬던 거 아니었나?”
야누르의 음색은 냉소적이었다.
“가축이라…….”
수호는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엘프들은 숲지기 임무를 사명으로 받들지만, 오직 그것만을 위해 마력을 공급할 뿐이다.
세계수가 되어버린 야누르 입장에서는 엘프들은 그저 마력 공급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록을 봤어. 뒤통수 맞은 것 같던데? 그래서 엘프들을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격한 반응의 야누르를 보며 수호는 잠시 기다려주었다.
아마 그 옛날 아루카 행성에서 정령왕과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묘족인 야누르뿐이었던 모양이다.
그 자격이란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것 같은 수호다.
‘레벨업 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지.’
각성이란 걸 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다.
엘프나 무림인은 몬스터를 죽여도 경험치를 얻지 않으며, 레벨업도 없고, 각성도 없다.
묘족 야누르는 루나 출신의 각성자로서 차원 관리자 야누스와 대화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거 미안하긴 한데, 난 묘족이 아냐.”
수호는 연속된 격한 반응에 야누르가 참 감정적인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수천수만 년 갇혀있다 보면 그리 변하는 걸까?
“너, 내가 안 보이냐?”
“누구? 야누스?”
지금 야누르의 음색만 듣자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