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97)
498화 바다의 신 (4)
당진철이 피식 웃었다.
“내 것이 아니니 왈가왈부할 게 없군.”
그가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섰다.
대강 이야기도 끝냈다.
수호가 우르르 끌고 간 야수 무리에 백사가 빠졌다기에 그의 의중이 궁금하여 들렀을 뿐이다.
‘회귀를 경험한 영물이니.’
백사는 그것에 가장 근접한 존재이니, 한번 그 의중을 떠보러 온 것이다.
“동향 사람 만나 반가웠네.”
[용 보고 사람 취급이니 이것은 모욕인가 칭찬인가.]“클클, 다음에 봅세.”
투덜거리는 백사를 뒤로하고 당진철이 자리를 떴다.
휘적휘적 걸어 고요한 숲을 걸었다.
‘내 고향은 지옥이나, 죽어서 돌아가기 전까지 내 몸 뉠 곳은 이곳이다.’
혼란한 지구의 상황이나, 이 또한 좋지 않은가?
무림엔 없는 가족이 있고, 사천당문이 새로이 세워진 땅이 아닌가.
당진철이 떠나자 융은 어색하게 웃으며 뱀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나뭇가지 하나만 주워가도 되겠는지요?”
[흥, 내가 지키고 있다 하나 이 또한 내 것이 아닐진대 어찌 내게 묻느냐?]드워프 융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것은 신께 진상할 무구입니다. 평범한 나무로는 창대로 달 수 없으니, 세계수의 가지를 찾은 게지요.”
[예사 물건은 아닌 것 같구나.]아직 창대를 달기도 전이지만 핼버드의 대가리가 품은 기운이 심상찮다.
백사에게 있어 인간 기준의 품평은 의미도 없고, 볼 줄도 모른다.
그저 품고 있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 높이 평할 뿐이다.
신의 나무를 달아 신께 진상한다니, 백사가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라.]“옙!”
백사의 허락에 드워프 융이 신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아 창대로 견줘볼 요량이었지만…….
[멍청한 난쟁이로구나. 세계수의 가지를 탐하면서 어찌 땅만 보느냐?]“예? 떨어져 나온 가지가 있는지 찾아…….”
대답하던 드워프 융은 깨달은 게 있어 제 머리를 쳤다.
“아직 한 번도 없군요.”
[무슨 소리냐?]“어느 정도 자란 세계수 나무는 한 번씩 가지를 떨어트립니다. 대마법사 엘프들은 그것을 지팡이로 쓰지요. 하지만 가이아 님께서는 아직도 성장 중이시니 가지를 떨어트린 적이 없겠습니다.”
드워프 융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세계수를 쓸 수 없다면 창대로 통짜 쇠를 써야 하나?
그가 고민하던 때에 백사가 쪼로로 세계수 줄기를 타고 올랐다. 무성한 수풀 사이에서 부스럭하더니 뭔가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어?”
투둑.
뒤이어 떨어져 내린 백사가 무심한 듯 나무를 툭 쳤다.
[써라.]“어어!?”
화들짝 놀라 먼저 떨어진 것을 보니, 부러진 나뭇가지였다.
“부, 부러뜨리면 어찌합니까?”
[난쟁이들은 전부 멍청한 건가? 나뭇가지를 쓰려면 꺾어야 쓰지.]“아아! 어찌 신성한 세계수를…….”
엘프들이 봤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그들에게 세계수는 나무 그 이상의 의미.
부족의 어머니와 같으니까.
숲지기가 아닌 드워프의 시선에서도 이는 황당한 일이었으니.
신성의 영역보다는 좀 더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다.
“세계수가 스스로 내어주는 가지가 아니면 그 힘이 담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냥 나무와 하등 다를 바가 없으니 무슨 소용입니까?”
[그래?]백사는 혀를 날름거렸다.
[내 알 빠냐?]“…….”
드워프 융은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부탁하는 처지에 잠시 흥분했습니다. 도와주려 하신 것인데. 무례했습니다.”
백사는 꼬리를 흔들어 세계수를 툭툭 쳤다.
[자꾸 남들이 지켜주기만 바라지 말고 뭔가 하나라도 해보는 게 어떠신가?]쏴아아아아아.
세계수는 바람결에 흩날리기만 하였다.
그때 떨어진 나뭇가지가 저 스스로 뒤척이더니 융이 들고 있는 핼버드 날을 향해 움직였다.
“헛!”
융이 놀라 그것을 떨어트리고 뒷걸음질쳤다.
투둑, 투두둑.
잎사귀 몇 개가 달린 나뭇가지는 저 스스로 살아 있는 양 움직여 핼버드 머리에 몸을 끼웠다.
그것으로 모자라 스스로 길이를 늘이고 분기된 가지들끼리 꼬이고 꼬여 핼버드 머리도 칭칭 감았다.
꽈드드득.
꽈배기처럼 꼬였고, 여기저기 아직 잎사귀가 붙어있어 매끈한 모습의 창대는 아니지만 외려 그래서 더 괜찮아 보였다.
“허!”
드워프 융은 기다란 창대와 조화를 이룬 핼버드 날을 보며 저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시, 신의 무기로다.”
드워프 장인이 쇠를 두드리고, 세계수가 스스로 나뭇가지를 내어 손잡이를 만들어냈다.
드워프 융이 바로 꿇어앉아 의식을 진행했다.
“드워프 뮴과 브랄, 그리고 융이 제작한 무구를 신께 바치노니, 이것으로 위엄을 보이소서.”
파파파팟.
신묘한 빛이 무기 전체를 감쌌으나 수 초 후에 그 빛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아!”
드워프 융이 깊이 탄식했다.
신께서 응답하지 아니하셨다.
[주인도 취향이 까다롭군.]백사가 투덜거렸다.
이 지구에 신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박수호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아아아.”
융이 괴로운 듯 고개를 처박았으나 곧 신색을 회복했다.
“후우. 완벽한 신의 무기라 생각했건만, 아직 수행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쯧, 고객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백사의 신성모독에 드워프 융은 웃고 말았다.
지구에 오길 잘했다.
까마득하고 막연한 신이란 존재가 아닌, 바로 옆에 살아 있고 함께 생활하는 신이란 존재는 또 다른 느낌이니까.
“신께서 거부하셨으니, 그의 힘을 나눠 받은 반신들에게 전해주어야겠습니다.”
[그러든지. 볼일 다 끝났으면 썩 물러가라.]“예에.”
드워프 융이 거대한 핼버드를 들고 뒤뚱뒤뚱 걷다가 힘들었는지 아공간 가방에 넣어 숲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백사는 혀를 날름거리더니 이내 똬리를 틀었다.
[세상이 이리 꼬였으니 편하게 승천할 팔자는 아닌가 보오.]집 나간 주인 대신 세계수나 지키고 있으니, 자신이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인지, 용의 탈을 쓴 개가 된 것인지 헷갈렸다.
*
몬테비데오.
주민 대피가 거의 이뤄진 대도시에 남은 이들은 도시 방위군과 소속 용병들, 그리고 수호 길드에서 파견 나온 이들 뿐이었다.
포탈 허브로 이어진 이동포탈망을 타고 다수의 엘프들이 모습을 보였다.
“오우, 이곳이 행성의 반대편이군.”
“가장 긴 거리의 이동이라 그런지 혈석 소모가 많군.”
“캬, 돈이 좋긴 좋습니다. 1초 만에 행성 반대편이라니.”
그 어디보다 보유 혈석이 많은 수호길드 소속의 엘프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잠깐 토론 후에 길을 나섰다.
오가는 군인들이 힐끔거리는 게 보였으나 저마다 바빠 보였다.
“초급 마법사들도 있으니 탈것이 필요할 터인데.”
“으음, 드론이라도 한 대 빌려야 하오리까?”
“되었소. 그저 구경을 목적으로 자리해 놓고 민폐요.”
가니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일행을 이끌었다.
“항구로 가십시다.”
지금도 수십 대가 착륙과 이륙을 번갈아 가며 행하는 드론들을 뒤로하고 게이트를 넘어 항구로 향했다.
항구에 정박 중인 수백 대의 배 가운데 적당한 요트 하나를 골라 탔다.
해양 몬스터의 출몰 이후 레저는 고사하고 어업 활동도 거의 금지되었기에 배들의 상태는 모두 좋지 않았다.
그중에 그나마 물에 잘 떠 있고, 넓은 배를 골라 올라탔다.
세일링 요트였다가 어업용으로 개조한 배는 갑판이 넓고 돛을 다는 마스트가 존재했으나 돛은 없었다.
후미에 달린 엔진은 녹슬고 따개비가 달라붙은 프로펠러는 돌아가는지가 의심스러웠지만 상관없다.
배는 구멍 뚫린 곳 없이 잘 떠 있기만 하면 된다.
“읏차.”
지금 배에 탑승하는 엘프 중에 대마법사가 둘이나 있었으니까.
“가봅시다.”
“이거, 아주 설레는군요.”
가니언이 손짓하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배들이 밀리며 길을 만들어냈다. 엘프들을 태운 배가 그사이를 부드럽게 나아갔다.
촤아아아!
바람을 받을 돛이 없어도 바람의 힘으로 나아간 배는 곧 바다의 끝에 도달했다.
“우오오오! 이게 무슨!”
“허, 과연 신화시대로다.”
세상이 끊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며, 대홍수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가 신화시대다.
알고 있던 세상의 법칙이 무너지는 시기이기도 했으며, 여러 생물이 죽어나는 절망의 시기이기도 했다.
신의 탄생으로 세상이 요동치는 시기.
그 광경의 한가운데 엘프들이 도착했다.
“바다의 끝이로군요.”
“세상의 끝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바다가 끝이 났다.
바닷물이 폭포처럼 떨어지진 않았으나, 절벽처럼 수직을 이루며 저 아래의 심해까지 바닥을 보였다.
“안 되겠군. 내 살펴보고 오리다.”
가니언이 참지 못하고 비행 마법으로 몸을 띄웠다.
바다의 단면을 보니 수족관에 온 듯 여러 물고기와 해양 몬스터가 모습을 보였다.
쐐애애애액!
그 와중에 호전적인 어류 몬스터 하나가 물살을 헤치며 점프했다.
촤아악!
“어딜?”
물의 단면을 뚫고 창처럼 쏘아진 몬스터는 가니언을 물지 못하고 그가 펼친 마법에 머리가 동강 나며 아래로 추락했다.
고개를 돌린 가니언이 바다의 절벽 맞은편, 검은 절벽을 보았다.
그것은 모든 걸 빨아들여 파멸로 이끌 것만 같은 짙은 허무의 공간이었다.
우주를 보는 듯 존재하지 않는 암흑뿐인 곳이라, 계속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빼앗길 것만 같았다.
“으음.”
그사이 해양 몬스터들이 가니언을 표적으로 몰려들고 있는지라 서둘러 배로 복귀했다.
“어떻던가?”
“종말이 존재한다면 그걸 눈으로 본 기분이 지금 심정이네.”
“한데 거리가 더 멀어졌군.”
“맞아. 못해도 500미터는 되는 것 같네.”
바다와 침식공간의 분리가 생각 이상으로 멀다.
방송으로 봤을 때는 불과 삼사 미터 정도 분리되어 보였는데, 그사이 이정도로 분리시킨 걸 보면 사제들의 합류가 박준호에게 큰 힘이 된 모양이다.
“위로 가 보지.”
“그럽세.”
쏴아아아.
바닷물을 떨쳐낸 배가 둥실 떠올랐다.
하늘에 이미 떠 있던 몇 대의 방송 드론이 그들을 비췄으나 무시하고 배를 더 위로 띄웠다.
아쉽게도 침식구역에 접근할 수는 없다.
저 구역에 발을 디뎠다가는 연기처럼 흩어져 침식에 흡수되고 만다.
“신에게만 허락된 공간이군.”
검은 공간 위에 반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기도하는 김미소는 미동도 없었고, 사제들이 오가며 분주히 조화력을 모아 박준호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더 올라갑시다.”
배를 더 올려 여덟 개의 물기둥이 만나는 곳보다 더 위로 향했다.
여덟 개의 물기둥이 하늘로 올라 둥근 머리 접시를 만드니, 물의 기둥으로 만든 돔 형태의 신전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천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박준호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는데, 여러 사제의 힘을 모으니 부담이 훨씬 덜 한 것 같았다.
“오, 이대로 신전만 생겨나면 드디어 신을 뵙겠군요.”
“혼탁한 세상이 끝을 향해 가니, 새로운 세상이 오겠구려.”
그 두 가지가 겹치는 것이 신화시대다.
종말과 탄생의 혼돈이 그 시기니, 바로 지금이다.
이제 머지않아 새 세상이 열린다.
신이 부재중이지만, 반신들의 존재로 인해 이 혼란의 마지막은 제법 순탄했다.
“으음?”
“허억!”
그때 저 멀리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에 엘프들의 시선이 한데 모여들었다.
화르르르륵.
거대한 불의 새가 구름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