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 * *
삐이꺽!
굳게 닫힌 선장실 문이 열리고, 잔뜩 긴장한 해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총 여덟 명. 활과 작살, 투망을 꼭 부여잡지만, 내 손에 들린 두 개의 모가지를 보자마자 안색이 창백해진다.
몸통만 한 통나무도 일격에 자르는 괴물, 스칼라 급에 다다른 대장 둘의 목이 내 양손에 들렸다. 나는 두 목을 갑판 위에 내던졌다.
대구르르르!
막 아침 해가 떠오르는 바닷가 한가운데. 희미한 태양 빛이 잘린 목이 만들어내는 피의 길을 비췄다. 해적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걱정하지 마. 다 죽일 거니까.”
“!!”
“귀찮게 반항하면서 시간 끌지 말고 빨리빨리 끝내자. 보니까 노예 몇 놈이 보이는데, 너희는 무기 버리면 살려줄게.”
쨍그랑!
작살을 든, 허름한 복장의 성인 남성 넷이 당장 무기를 버리고 양손을 위로 들었다. 한 해적이 활을 노예에게 겨눴지만, 내가 단도를 던져 녀석의 가슴에 박았다.
“끄흐흑……!”
왜 반항하고 그래. 진짜… 짜증나게.
나는 혀를 차며 나머지 해적 셋을 향해 달려들었다. 둘을 초살하고, 한 놈을 살려둔다. 유일한 생존자가 질질 짜며 내게 양손을 비볐다.
“사, 살려주세요.”
“그럼. 너는 오래 살려주마. 이름부터 말해.”
“저, 정말입니까? 헤, 헤헤! 팔로입니다.”
“그래. 팔로. 우선, 그 전에 내 얼굴부터 확인해.”
나는 상체를 덮은 우의를 치웠다.
“허… 억?!”
팔로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기절할 듯이 놀랐다. 당연하지. 팔로는 내게 신고식을 치렀던 그 새끼다. 나는 팔로의 어깨를 찔러서 근육을 마비시킨 뒤, 머리채를 붙잡았다.
“히이!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준다니까.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잠깐.”
나는 버둥거리는 팔로를 선장실로 끌고 가다가 생각난 게 있어서 멀뚱히 선 네 생존자를 보았다.
“너희 넷.”
“예, 옙!”
네 노동 전문 노예가 빠릿한 자세로 대답한다. 나는 시체가 널린 갑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지하까지 시체 치우고, 피 닦아. 그리고 3층, 아니… 창고에 있는 애들 있잖아. 외눈하고 병신하고 다리.”
“아, 옙!”
“걔네도 꺼내주고 피 덜 묻은 방에서 자라고 해. 지하 1층에 방 몇 개는 깔끔할 거야. 다 끝나면 너희도 남는 방에 들어가서 쉬어.”
“알겠습니다!”
“기절한 여자 한 명 있는데 깨워서 사정 설명하고, 일 시키지 말고 쉬라고 해. 많이 힘들어 보이더만.”
“예!”
“그리고… 지금 생각난 건데, 지하 2층에 해적 말고 너희 같은 노예도 있었더라. 시간이 없어서 구분 없이 다 죽였거든. 미안하다.”
“아닙니다!”
대답 하나는 똑바르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팔로를 끌고 선장실로 들어갔다. 선장실에 팔로를 집어던지고는 침실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여자 둘에게 말했다.
“누나들은 힘 남아있지? 시체 처리 돕고 쉬어.”
“아, 알겠습니다…….”
여자 둘이 발끝을 세우고 살금살금, 벽을 기듯이 이동해서 선장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선장실 구석으로 팔로를 끌고 온 뒤, 손을 꺾었다.
“팔로야. 우리 서로 대화할 게 아주 많아. 그치?”
“으흑! 흐흑! 사, 살려주세요!”
살려준다니까. 그리고 죽인다. 나는 원한은 꼭 갚는 남자였다.
* * *
팔로에게 들은 지르바 해적들의 속사정은 정말 별거 아니었다.
피랄 연합체를 이루던 소국의 멸망한 기사들. 그들은 생존자 무리 사이에서 패악질을 부리며 권력의 단맛을 맛보았다. 하지만 중앙 대륙과 이종족 연합지역이 오고, 박살이 났다.
시간이 지나자 도망친 왕족들도 되돌아왔다. 충의(忠義)를 버린 죄는 사형. 하지만 죽기는 싫다. 그런 마음을 먹고 전 기사, 현 약탈자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자기 잇속을 챙길 수 있는 곳에 안착했다.
지르바 해적을 이끄는 세 스칼라 무인이 그 기사 중 일부였다. 녀석들은 우연히 버려진 배를 훔쳐서 왈짜 패를 모아 지르바 해적단을 결성했다고 한다.
지르바의 어원은 세 기사의 이름을 한 음절씩 땄다는 소소한 정보도 얻었다. 너무 소소해서 보답으로 팔로의 손가락을 하나 뜯었다.
“끄흐으윽…!”
팔로가 운다. 나는 미안해서 반대편 손가락도 뜯어서 균형을 맞춰주었다. 팔로가 내 상냥함에 감동하여 계속해서 정보를 풀었다.
나를 키운 보스도 그 기사들 무리에 속했다고 한다. 귀족들에게 인신매매를 대놓고 하는데 안 걸리냐고 물어봤는데, 뒷돈을 두둑이 챙겨줘서 봐준다고 한다.
“…….”
역시 피랄 연합체. 내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네. 어떻게 된 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골고루 썩었냐.
생각해보면 해적인 지르바 놈들이 정박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이놈들도 똑같이 뒷돈을 바쳐서 안전을 얻어낸 거다.
“아니, 어떻게? 아무리 뒷돈을 준다 해도 해적을 용인해?”
“그게…….”
이 세계에서 해적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충각 돌격이나 대포를 쏘면 은폐 마법장을 끼어도 해저 몬스터에게 들키니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그래서 해전도 거의 안 일어난다.
때문에 지르바 해적단은 말이 해적이지 망한 영지, 만만한 녀석들의 물자를 약탈해서 그걸 싼값에 영지 권력자에게 판다고 한다.
무기, 식량, 사치품, 책 중앙 대륙의 책 따위를 판다고 가끔씩 나처럼 인신매매도 하고. 그래서 해적이다.
“잘했어. 팔로. 아주 유익한 정보였어.”
대강의 사정을 파악한 나는 팔로를 칭찬했다. 팔로가 내 말투에서 생존의 가능성을 읽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나도 마주 웃으며 단도를 들었다.
“어, 저기…….”
“왜, 뭐. 빨리 끝내자고. 나 할 일 많아.”
팔로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에는 이 녀석의 중요도가 너무 하찮다. 나는 팔로를 처리한 뒤, 선장실을 뒤졌다. 이 세상의 정보를 더 얻어야 한다.
보스네서 살며 알음알음 얻은 정보로는 한계가 있다. 해도와 지도를 뒤져 정확한 위치를 조사하고, 시대가 얼마나 지났는지를 먼저 파악했다.
“어허……?”
조사한 지 한 시간 째. 최근의 역사책을 펼친 나는 의문에 잠겼다. 나는 책을 덮고 웨일 이후 내가 얼마나 되는 시간을 겪었는지 계산했다.
‘어디 보자. 똥은 다섯 살이고, 그 이전에 두 번 정도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어. 그 시간을 더하면 7년은 될 거야.’
그러니 지금은 웨일 사후 최소 7년은 지났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를 더해야 한다. 바로 쇼콜라로 살았던 시절이다.
쇼콜라라는 귀여운 이름을 지었지만, 실제로는 멸망한 세상을 돌아다니는 괴물. 그림자의 최종 진화형이자 그쪽 우주의 인류가 그림자와 인류와 융합하여 탄생한 역겨운 생명체.
나는 그 쇼콜라로 최소 40년을 살았다. 솔리아를 만나기 전까지의 시간감각이 애매하지만, 그쯤 된다. 그러니 이 세상은 웨일이 죽고 최하 47년이 지나있어야 했다.
“그런데…….”
6년 전에 출판된, 가세티노라는 학장이 저술한 ‘격동하는 세계’라는 현대사 책. 그 현대사 책에서 이종족 연합지역을 설명한 챕터의 주석에 (현 출판본 기준으로는 악신 사태 이후 9년이 지났다.)라고 적혀있었다.
악신 사태 9년. 즉 웨일이 죽은 지 겨우 9년. 지금을 기준으로 하면 15년이다. 47년이 아닌 15년. 내 예상을 한참이나 빗나간 숫자에 머리가 새하얘진다.
“…어? 음?”
내가 계산을 잘못했나? 종이에 숫자를 적어가며 산수를 다시 해 봐도 역시나 30년 이상이 빈다.
아니면 쇼콜라로 살았던 시절이 엄청 짧았나? 절대 아니다. 초월자인 솔리아가 십 년이라는 시간을 입에 담았다. 그 시간을 대조군으로 삼으면 쇼콜라는 아무리 적어도 40년을 살았다.
‘1~2년이 아니라 30년이 빈다고?’
어라. 이건 내 예상에 없던 일인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시간적 오류가 발생하자 나는 혼란에 빠졌다.
빈곤한 머리를 굴려가며 답을 찾지만, 빈곤한 머리답게 전혀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한참을 끙끙대다가 겨우 그럴듯한 가설을 하나 세웠다.
‘우주마다 시간이 다른가? 여기서는 1년이 다른 곳에서는 10년일 수도 있는 건가?’
하지만 어째서? 우주의 시간이? 왜?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을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이기에 이 가설에서 사고를 발전시킬 수 없다. 나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어루만졌다.
“서…! 그, 대, …선장님!”
쾅쾅쾅!
가만히 선장실에 앉아있자니, 선장실 문을 남자 노예가 두들겼다. 생각이 방해받자 잠시 짜증이 났지만, 어차피 여기서 콕 박혀있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전생하는 이유도 모르는데 우주의 시간이 다른 이유를 알 리가 있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털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여자 셋과 외눈, 병신, 심지어 다리까지 우물쭈물하며 선장실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저, 저저저! 저거 말입니다!”
노예 남자가 침을 튀기며 밖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를 따라 우르르, 갑판 끄트머리까지 이동했다. 배 너머, 광활한 바닷가를 작은 보트가 바다를 가로질렀다.
비상용 보트에는 내 앞의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남자 노예가 타고 있었다. 그들이 열심히 노를 저으며 도망친다. 남자가 그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나, 남은 녀석들이… 도망쳤습니다!”
그거 때문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한 삼십 분 전부터 부시럭대더니 보트 내리고 도망치더라.”
“예?! 왜 그걸 내버려… 아, 안 잡았습니까?”
“잡는다고? 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려는 건데, 다시 데려올 필요가 있나? 아니, 너는 같이 안 도망치고 뭐한 거야?”
굳이 나 싫다고 떠나는 사람 일일이 붙잡고 설득해야 해? 그냥 멀리서나마 안녕을 빌어주는 게 더 낫지 않나? 왜 나한테까지 와서 자유를 위한 도피를 꼰지르지?
더군다나 그들도 오랜 노예 생활로 눈치가 있는지 식량과 보물도 딱 내가 참을 수 있는 정도만 가져갔다. 내가 그리 설명하자 노예 남자가 입을 떡 벌렸다.
“아뇨, 그…….”
식은땀을 흘리며 턱을 바르르 떤다. 내게 할 말이 있는데 두려워서 차마 말하지 못하는 거다.
“괜찮아. 안 죽이니까 가감 없이 말해.”
이렇게 말해도 용기가 나지는 않겠지. 나는 느긋하게 노예 남자가 용기를 내기를 기다리며 나머지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여자 셋은 씻고 옷까지 갈아입었는지 아주 말끔하다. 외눈과 병신, 다리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성인의 것이라서 기장이 맞지 않지만, 이전의 걸레 쪼가리와 비교하면 양반이었다.
우물우물!
다리와 병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어디선가 치즈를 가져와서 냠냠쩝쩝 잘도 처먹는다. 다리의 안색이 창백한 게, 배가 아픈 티가 나는데도 먹는 걸 멈추지 않는다. 나는 다리에게 다가가 하복부를 쓰다듬었다.
여자들이 ‘어머어머!’ 한다. 오해하지 마라. 몇 주를 굶은 년이 농밀한 지방질을 먹다가 탈이 날 수도 있어서 신체 강화 초능력을 전해주는 거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보트가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사라져가던 시점. 남자 노예가 용기가 났는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배를 몰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배…를?”
어… 배?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을 멈췄다. 참으로 멍청한 똥의 얼굴을 보고 노예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그가 기둥을 가리키며 흥분해서 마구 주절댔다.
“예! 저 혼자서 돛을 올리고 밧줄을 조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꼬마들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고, 여자들은 막노동을 해 본 적도 없고… 그리고 선장님은 조타와 해도를 볼 줄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우리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멀리 떠나는 보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런 썅!”
내가 막 급하게 갑판을 벗어나 바닷가로 뛰어들려는 그 시점.
퍼어엉!
갑자기 보트 밑에서 거대한 어류 형태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5층 건물만 한 크기의 몬스터는 푸른 등을 자랑하며 돌고래처럼 높게 솟구쳤고, 보트와 보트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점프에 휘말려 하늘을 날았다.
“으아아아!!”
도망친 노예 남자 셋의 비명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첨벙! 하고 흰 포말과 함께 몬스터가 잠수하고, 남자 셋의 신형도 물보라 사이로 사라진다.
이들은 모르지만, 나의 시력은 푸른색 바다 사이로 붉은빛이 언뜻 비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고요만이 남았다.
은폐 마법장이 없어서 몬스터한테 들킨 것이다. 아이고. 은폐 마법장. 고걸 까먹었었네.
아니, 이 등신들은 은폐 마법장을 안 깔아줄 거면 왜 탈출용 보트를 준비한 거야? 이세계 인류의 머릿속을 알고 싶어지는 한 때였다.
“아…….”
누가 한 지 모를 탄식이 우리 사이에 퍼졌다.
그랬다. 우주의 시간이고 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배를 몰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내 앞에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머리가 아파오자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표류가 시작되었다.
* * *
경사스러운 표류 첫날.
항해 일지와 지도를 보면 피랄 연합체는 남쪽, 정확히는 남동쪽에 있다. 지르바 놈들은 대륙붕 외곽을 타고 북동으로 이동하여 다른 영지로 갈 계획이었다.
밤에 출발해서 일이 끝난 건 오전. 거의 반나절 동안 항해를 했으니 아무리 적어도 100 킬로미터 이상 이동했겠지.
북동으로 100 킬로미터. 서쪽으로 수십 킬로미터만 가면 바로 해안선이 보일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도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옮는다고. 남자 노예(이름을 물어보니 탁센이라고 했다.)는 풍향에 따라 돛을 펼치는 최소한의 지식은 있었다.
나는 탁센과 함께 돛을 달리 펼쳐서 서쪽으로 향하게 배의 방향을 틀었다. 때문에 느긋하게 ‘하루만 기다리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조타는 어떻게 틀어? 왼쪽으로 돌리면 왼쪽으로 이동하겠지?”
“그, 글쎄요?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씨발. 저 앞에 있는 삼각형 돛의 역할은 뭐야?”
“모, 모르겠습니다.”
“야, 이거 둘이서 하면 답이 없을 것 같은데 돛 두 개는 접자. 기둥 하나만 펼쳐도 이동은 하겠지? 하나라도 바람은 받잖아.”
“모르겠쏘요…….”
“뭐? 뭐, 머스… 뭐? 밧줄은 또 왜 이렇게 묶고 풀 게 많아? 밧줄 역할 다 알아?”
“아이! 저도 모른다니까요!”
겨우 둘만 가지고 돛을 어쩌고, 밧줄이 저쩌구 하기에 배라는 괴물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탁센의 지식도 완전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나와 탁센은 첫날 하루를 꼬박 낭비했고, 그만큼 배는 해류를 타고 엉뚱한 대륙에서 멀어졌다. 그날 밤. 나는 선장실에서 책 한권을 발견하자 탁센을 데려왔다.
“탁센. 너 글 읽을 줄 알아? 선장실에서 돛 펼치는 법에 관한 책을 찾았거든.”
“하… 제가 무슨 말 할지 아시죠.”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읽어줄게. 크흠! 흠! 어, 포… 푸?”
“…….”
“미안하다. 너무 전문용어가 많아서 나도 읽기 힘드네. 알아서 공부해. 아니, 같이 하자.”
“으흐흐!”
탁센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애매한 신음을 내며 페이지를 넘겼다.
고생을 많이 해서 겉늙어 보이지만, 탁센의 나이는 이십대 중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다 큰 성인까지 공부란 건 담 놓고 살다가 이 나이에 새로운 걸 공부하니 고역이겠지.
하지만 안 하면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굶어 죽거나 몬스터에게 죽는 일만 우리를 기다리니 안 할 수도 없다. 탁센은 어깨와 허리를 주무르며 열심히 그림을 보고 돛을 공부했다.
“탁센. 아프냐?”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프다고 고백하면 버려질 것 같아서 그러는 건가? 노예 근성이 뼛속까지 스며들었군. 탁센이 안마를 멈추고 자세를 꼿꼿이 세워서 책에 집중했다. 하지만 몇 분도 유지하지 못하고 금세 허리가 굽혀졌다.
나는 초능력 파동으로 탁센의 몸을 살폈다. 관절은 성한 데가 없고, 척추하고 어깨는 장애인 수준으로 뒤틀어졌다. 이걸 방치하면 안 되지. 나는 잠시 공부를 멈추고 탁센을 침실로 끌고 갔다.
“탁센. 누워.”
“예… 헥?!”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닥치고 누워.”
추나요법으로 어그러진 골격을 바로 세우고, 성력과 마나를 불어넣어 아작 난 관절의 재생을 돕는다. 사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돛을 관리할 노동자가 나하고 탁센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표류가 며칠을 갈지 아무도 모르는데, 몸살이라도 나거나 쓰러지면 곤란하잖아. 나는 섬세하게 탁센의 전신을 쓰다듬어주며 그의 몸을 고쳐주었다.
뚜두둑!
“그! 아, 아, 앗!”
“야, 비명이 뭔가 이상하잖아.”
오해의 여지가 있는 탁센의 비명과 함께 표류 첫날의 밤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