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384
384화
* * *
적측은 단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독화초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마침 바람도 남풍이겠다. 이러다가는 싸우기도 전에 독에 중독되어 사망자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다.
해서, 독화초의 독기를 막기 위해 적군 병력에 포함된 마법사가 대거 빠졌다. 독기가 올라오지 않게 흙을 통째로 까뒤집는 작업에 마법사가 쓰인 것이다.
실로 적절한 인선이었고, 어쩔 수 없는 고위 인력 낭비였다. 하지만 안 하면 어쩔 건가.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가 25만 명이 독에 중독돼서 똥오줌 지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이를 악물고 마법을 써야 했다.
마법사들이 밤새도록 화재현장을 돌아다니며 대지 마법을 쓰는 것을 고소하게 구경하다가 몸을 돌렸다. 남들 구경은 그만 하고 나도 마법진 정비, 성벽 보강 등 할 일을 해야 했다.
쿵쿵쿵!
다음날. 수만 명이 넘게 죽어서 이젠 20만 명 초반대를 겨우 넘는 적군 병력이 성벽을 향해 진군한다. 그 기세는 비록 첫날보다 줄어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막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펜 슈라드가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저놈들은 지치질 않는군요.”
그렇다. 결국, 수가 문제다.
25만을 로테이션으로 돌리는 적과 달리 우리는 2교대로 병력을 운용해야 하기에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 내가 광범위 회복 마법장에 몰래 성력을 추가해줘도 3만 명이 넘는 인간의 피로를 미세한 성력 첨가로 해결하기는 불가능했다.
하루 이틀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6일째가 되는 오늘. 드디어 병사들도 맛이 가기 시작했다. 창을 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있는 힘껏 사다리를 밀지 못해 적의 침입을 조금씩 허용한다.
“창! 차, 창 찔……!”
“하악! 학! 끄… 어억?!”
어떤 머저리는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뎌서 굴러떨어지기까지 한다.
성벽 위에서, 내 보호를 받으며 병사들을 지휘하던 펜 슈라드가 통신기를 꺼내 참모진에게 급하게 명령했다.
“화살! 화살 더 가져와!”
“어, 없습니다!”
“왜 없어! 슈라드에만 백만 발을 보관했는데 그걸 6일 만에 다 썼다고?!”
“어… 어어……. 예, 예! 그,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뱉는 통신기를 보며 기가 찼다. 진짜로 백만 발이 동났어?
화살 백만 발. 미친 듯이 많아 보이지만, 궁병 5천 명이 있으니 한 사람당 200발을 쏘면 끝이다. 6일 동안 쉴 새 없이 싸워댔으니 200발은 옛 저녁에 다 쐈겠지.
펜 슈라드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성벽을 둘러보았다. 마침 그의 시선에서, 사다리를 밀지 못해 사다리를 타고 성벽으로 침입하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아웅다웅하는 동안 턱턱! 하고 두세 개의 사다리가 연속으로 놓인다. 성벽 일각이 적에게 점령당하기 직전. 재빠르게 기사들이 달려와 오러 광이 담긴 롱소드를 휘둘렀다.
푸슉!!
“다들 물러나라!”
기사 둘이 침입한 병사를 순식간에 베고, 위험천만하게 성벽 바로 앞에 서서 할버드를 휘둘러 사다리를 자른다. 그들이 적군의 침입을 막는 사이, 아군 병사들이 재빨리 빈자리를 채운다.
그나마 이렇게 기사들이 성벽에 넓게 포진해서 사다리를 자르고, 드문드문 올라오는 적군을 처치해서 난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로도 처치하기 힘든 강자들이 올라올 때가 있다.
“크와앙!”
황금 야수단. 똥 같은 괴물 말 새끼를 탄 기사들이 하나둘씩 성벽에 올라오는 일도 있었다. 발굽이 말발굽인데 대체 어떻게 앞으로 기울어진 성벽을 30미터나 타고 올라온 거야?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올라온 이상 뭔가 다른 수가 있겠지. 그렇게 한 번 성벽에 발을 디딘 황금 야수단은 일개 기사만으로 막기가 불가능했다.
한 번 들이박으면 코끼리 내장도 으스러뜨리고 척추를 부러뜨릴 수 있는 괴물 코뿔소의 돌진을 생각해보라. 그놈이 성벽을 뛰어다니는 게 황금 야수단의 돌진 공격이었다.
두두두두! 하고 미친 소가 뛰어다니듯이 성벽을 달리면 병사들이 트럭에 치인 오토바이 운전자 꼴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1톤을 가볍게 넘는 질량 병기의 돌격 앞에선 병사도, 기사도 의미가 없었다.
투확!
단 몇 번의 발 구름에 족히 서른 명이 넘는 병사, 두 명의 기사가 황천길로 직행했다.
“으하하핫! 죽어라!”
말 위에 탄 기사가 광소를 터트리며 폭발 마법이 걸린 파쇄추를 휘두른다. 성벽을 위에서부터 부숴버릴 계획이다. 그의 파쇄추가 막 성벽을 때리기 직전.
서걱! 선명한 적갈색 오러가 기사는 물론이고 체고 3미터가 넘는 말 허리를 일거에 갈랐다. 오러의 주인은 세로로 쩍! 쪼개진 기사와 절단 부위에서 내장을 흘리는 말을 귀찮다는 듯이 발로 퍽 찼다.
그자, 아니, 그녀가 우당탕! 떨어지는 말에 깔려 죽는 적군 병사들을 보지도 않고 높게 외쳤다.
“병사! 자리가 비었다! 어서 이쪽 성벽으로 오도록!”
막대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며 혼란스러운 성벽을 정리하는 여고수, 소니아 반데스였다. 소니아를 비롯한 여섯 명의 익스퍼트는 이처럼 성벽에 넓게 퍼져서 혹시 모를 황금 야수단 또는 고위 기사의 침입을 전문적으로 방어했다.
일격에 말과 기사를 죽였지만, 소니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여섯 명의 익스퍼트와 비교해서 성벽은 너무나도 길었고, 그들이 황금 야수단을 처치하는 시간이 1초씩 지연될 때마다 병사들은 열 명씩 죽어나갔다.
내가 광속의 섬광탄을 쏘면 신속하게 처치할 수 있다지만, 나도 바빴다. 이유는 끊이지 않는 물량을 자랑하는 공성 병기 때문이었다.
“저 빌어먹을 공사 자재는 왜 줄어들 기미를 안 보이냐.”
드르륵! 드르륵! 우렁찬 소리를 내며 굴러 오는 공성탑을 보니 절로 욕설이 나온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공성탑을 매일같이 만들어서 꾸준히 투입해 신경을 건드린다.
둘째 날 스무 기, 셋째 날 열 기. 넷째 날 열다섯 기를 부셨는데도 지치지도 않는지 오늘도 또 만들어서 왔다. 만들면 만들수록 숙련도가 늘어나나? 오늘은 어제 것 까지 포함해서 공성탑을 무려 마흔다섯 기나 제작했다.
마흔다섯이면 과장 좀 보태서 북쪽 성벽을 모조리 공성탑으로 막는 길이다. 공성탑 앞쪽 기둥에는 거대한 강철 방패를 든 정예병이 두 명씩 타서 섬광탄을 방어한다.
아무리 마나로 빚어냈다 해도 섬광 마법의 근본 성질은 빛. 적군은 분광(分光) 마법과 관통력 감소를 위한 유동성 강화 형질을 부여한 두꺼운 방패로 섬광 마법을 막는 방법을 고안했다.
‘덕분에 귀찮은 심리전까지 쓰게 됐어.’
나 쏠 거야? 어? 쏜다. 진짜로 쏜다? 하고 협박하듯이 마나석을 위아래로 흔들고, 방패를 든 정예병의 손이 바빠지면 그 빈틈을 노려서 광속의 섬광탄 발사!
투쾅!
이렇듯이 광속의 섬광탄으로 공성 병기를 부수고, 빈틈을 보이는 마법사를 죽이고, 뭔가 대형 마법진이 발동할 기미가 보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지성으로 섬광탄을 쏘아 일대를 파괴한다.
성벽에서 날뛰는 황금 야수단보다 멀리 있는 마법사 한 명이 더 위험하다. 저들이 성벽에 마법을 쓰지 못하게 견제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이느라 정신이 없어서 황금 야수단의 침입에 대응할 시간이 없다.
심지어 내가 감당해야 하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쉐엑!
잠시 한눈을 팔자 성벽 구석을 향해 빛덩이가 고아음속으로 날아든다.
빛덩이, 극한까지 응축된 오러의 창이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곤 성벽으로 전진한다. 나는 즉각 광속의 섬광탄을 쏴서 빛덩이를 격추했다.
꽝! 하고 요란스럽게 비산하는 빛의 폭죽. 오러와 섬광탄의 폭발에 휘말려 성벽을 오르는 적군 몇 명이 내장이 터져 즉사한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오러 창이 쏘아진 지점을 노려보았다.
저 멀리, 오러 창을 쏜 기사도 마주 나를 노려보며 부하에게 창을 받는다. 저 개새끼는 내가 딴 데 신경을 팔면 그때를 귀신같이 노려서 오러 창을 날려 성벽을 깎아 먹으려 한다.
이런 일을 대비해 성벽 외곽 자재는 마법으로 채울 수 있게 해두었지만, 익스퍼트 상급의 오러 창은 성벽 자체를 구조적으로 약화시킨다. 단 할 발만 허용해도 성벽의 내구도가 엄청나게 감소한다.
저 익스퍼트를 견제하는 게 내가 도맡은 가장 큰 임무였다. 좌우 수백 미터의 길이를 자랑하는 성벽. 그 길다란 성벽을 오러 창이 때리지 못하게 경계하느라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게 내 발목을 잡았다.
‘짜증나는 새끼.’
‘흥!’ 내가 노려보자 잡놈의 새끼가 나를 보며 코웃음을 친다. 저 개새끼가. 정면대결로 붙으면 10초 안에 죽을 놈이 건방지게 코웃음을 쳐???
전생자로 살면서 오랜만에 화가 나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수십 만의 인간이 맞부딪히는 전장은 전생자인 나조차도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뛸 수 없게 했다.
나는 화를 참으며 펜 슈라드에게 물었다.
“저 새끼는 뭐 하는 새낍니까?”
“에이레티노라는 인물입니다. 3년 전의 최신 정보에는 익스퍼트 중급이라고 했었는데, 지금 보니까 상급이군요.”
“3년 전이 최신 정보? 누구한테 얻은 건데요.”
“라그랑쥬입니다.”
라그랑쥬. 그래. 아군이 얻은 정보면 대놓고 욕하기 뭐하지. 내가 입맛을 다시며 화를 참자 펜 슈라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불벼락의 폭풍 한 번 더 쓰면 안 됩니까?”
나는 그의 부탁에 고개를 저었다. 마나석은 소모품이고, 화염의 크리스털도 다른 용도로 써야 할 일이 많다.
우두둑!
성벽 앞, 소수의 마법사와 스크롤 부대가 성벽을 올라가기 쉽게 돌길을 만든다. 저걸 부수고, 붕괴나 지면 흔들기 마법으로 성벽을 허무는 걸 막고, 마포를 방어하고… 기타 등등.
마나석이 필요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걸 기껏 수천 명 죽이겠다고 몇 번 쓰지도 못할 불벼락의 폭풍으로 낭비하면 방어력이 크게 줄어든다.
첫날의 충격적인 죽음에 겁을 먹으라고 크게 마음먹고 쓴 거였는데, 우직하게 수로 밀고 들어오니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
투쾅! 드르륵!
초조해하며 광속의 섬광탄을 쏘아 마법총을 쏘는 병사와 마법총까지 한꺼번에 박살 낸 그 순간, 최후열에서 제작된 투석기가 그 타이밍을 노리고 쏜살같이 뛰쳐나왔다.
“이런!”
어서 광속의 섬광탄을 쏘아 투석기를 부서야 하지만, 시기가 참으로 얄궂다. 바로 전에 섬광탄을 쏜 탓에 예열 등을 비롯해서 10초 이상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황금 야수단을 짐마차로 써서 끌고 오는 투석기는, 10초 안에 성벽을 타격할 정도로 가까이 올 수 있었다. 투석기에 탄 병사들이 격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투석기에 돌을 집어넣고, 발사 준비를 끝냈다.
“쏴! 죽음의 빛이 우리를 겨눈다고! 조준 안 해도 되니까 그냥 쏴!”
내가 급히 섬광탄을 쏘기 전, 한발 빠르게 투석기가 돌덩이를 던졌다.
슈슈슉!
투석기에 담긴, 작게는 주먹 크기에서 크게는 머리통보다 커다란 수십 개의 흙덩이가 세차게 하늘을 날아온다.
성벽 방어막의 허점을 노린 공략법이다. 성벽의 방어막은 상시로 얇은 방어막을 전개하다가, 마포나 커다란 돌덩이가 쏘아지면 투사체의 전진 방향에 방어막을 집중시키는 방식.
방어막의 집중, 유동체 성질 부여, 전체적인 방어막의 흐름 조절 등은 인간이(지금 같은 경우는 시즈믹스가) 수동으로 조작하기에 수십 개의 목표물을 일일이 포착하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작은 돌덩어리 수백 개가 날아오면 그것들을 하나하나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방어막이 어떤 것을 막아야 하는지 헷갈린다는 듯이 혼란스럽게 요동친다. 결국 커다란 흙덩이, 또는 한 번에 최대한 많은 흙덩이를 막을 수 있는 위치에 방어막 여러 개를 생성시키는 게 시즈믹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퍼벅!
그의 분전에 절반이 넘는 흙덩이가 방어막에 가로막혀 성벽을 넘지 못하고 추락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흙덩이는 성벽을 훌쩍 넘어, 도심지까지 날아왔다.
파삭! 하고 성벽이 아닌 엉뚱한 땅과 충돌해서 바스러지는 흙덩이. 갈색 흙 안에서 튀어나온, 거무튀튀한 잿가루가 섞인 흙뭉치가 인상적이다.검은 흙뭉치의 등장과 함께 풍기는 매캐한 향기가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나는 냄새를 통해 흙뭉치의 정체를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독화초!’
독화초라고 대대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대수림 옅은 곳에 쫙 깐 금속 독. 한 번에 많은 양을 흡입하면 금속 독이 폐에 침착해서 질식사하고, 조금만 들이마시어도 시름시름 앓다 가는 그 악랄한 녀석.
그게 성벽을 넘어들어온 흙덩이의 정체다. 저 개새끼들이 금속 독이 함유된 흙덩이를 투석기로 날리고 있다.
나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흙덩이를 한곳에 모으고는 대지 마법으로 독기가 새어나오지 않게 돌로 뒤덮었다.
“마법사! 하위 마법사는 모조리 후방으로 빠져! 흙덩이를 한데 모아서 독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돌로 덮어!”
성벽 위, 안전한 곳에 숨어서 대응 마법을 쓰던 하급 마법사 몇 명이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간다. 그들이 흙의 손, 대지의 감옥 등으로 도시 곳곳에 떨어진 흙덩이를 뒤덮었다.
슈슈숙! 퍼석!
그 위에서 야속하게 쏘아지는 흙덩이! 수십 발이 넘는 다양한 크기의 흙덩이가 성벽을 넘어 골목길, 건물 외벽, 옥상을 더럽힌다.
일 하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데 적군의 독 공격은 수십 개씩 마구잡이로 떨어져 내린다. 내가 병사들 몇 명에게 명령을 내려 마법사를 도우라고 말하려던 시점.
“!”
소름이 돋는 감각이 등 뒤를 치달린다! 오러 창을 쏘는 개자식이 내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또……!
“제길!”
나는 보좌병 허리춤에서 검을 끄집어내 감각이 향하는 곳으로 집어 던졌다. 비검(飛劍)의 묘리에 따라 회전하며 날아간 검이 성벽 좌측 중열 부분을 타격하려는 오러 창과 충돌하여 폭발을 일으켰다.
검신이 깨지고, 폭발한 금속 조각에 가까운 사다리를 타고 오르던 병사 몇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추락한다. 사다리에도 구멍이 뻥뻥 뚫려 마른 나뭇가지 쪼개지듯이 무너졌다.
에이레티노라는 익스퍼트 상급의 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에게 투창용 창을 잡고 이죽거리며 기회를 노린다.
‘너 진짜…….’
이번에는 나도 화가 났다.
인간은 내로남불의 생물이라 하던가. 내가 쓰는 독은 정의로운 독이지만, 적이 쓰는 독은 사악하고 치사한 사법이다.
‘아니, 솔직히 화낼 만하지. 우리는 그럴듯한 설정이라도 잡았는데 저놈들은 그딴 것도 없잖아?’
독화초라는 설정을 위해서 1년 간 얼마나 공을 들인 줄 아나? 슈라드 영지민들에게 독초의 대량 서식을 대대적으로 경고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느라 허리가 휘었다.
하지만 어디서든 꼭 말을 안 듣는 놈들이 나온다. 독을 채취해 쓰겠다는 아마추어 연금술사, 비장의 한수를 위해 독초를 찾는 얼치기 용병, 독초를 팔아 한 몫 장만하려는 평민들까지.
제 욕심에 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대수림으로 들어갔다가 독화초에, 정확히는 금속 독에 중독되어서 앓다 죽은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금속 독은 아무리 비활성 상태라고 해도 인체에 치명적이다. 그걸 생으로 들이마셨으니, 경고를 듣지 않는 놈들의 종착역은 죽음 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군의 피해까지 감수해가면서 1년 동안 공들여서 준비한 게 독화초라는 설정이다. 그래야지만 대놓고 적에게 독을 쓴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잖아.
하지만 저놈들은 그딴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막무가내로 금속 독이 포함된 흙덩이를 던진다.
결국 그날은 적과 아군의 마법사 모두가 대수림의 독, 영지로 침투한 독을 몰아내느라 전선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성벽과 인간의 힘으로만 20만이 넘는 물량을 막아내야 하는 싸움.
퍼석! 흙덩이가 또 날아들고.
“막아! 덮어!!”
파직! 정신이 딴 데 향하자 얌체같이 쏘아지는 오러 창을 격추하고.
“이런 썅! 너 진짜 이 개새끼가!!”
쏘고, 죽이고, 정신없이 막기를 몇 시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투가 해가 슬슬 저물어 갈 때 끝이 났다.
아무리 시즈믹스와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아군 병사들이 피를 닦지도 않고 파김치가 되어 성벽에 등을 기대 주저앉는다.
적군이 의기양양하게 물러나며 하는 말이 내 귓가에 닿았다.
“하하하! 내일 또 보자!”
누가 보면 우리가 진 줄 알겠다.
분명 전력 소모비는 1 대 10을 훌쩍 넘는다. 우리가 한 명 죽으면 적은 열 명이 사망. 하지만 내일은 그리고 내일모래는 이보다 더 불리한 싸움을 펼치게 될 것이다.
적들도 그것을 알기에 저리 환하게 웃는 거겠지. 아마 오늘부터는 야전(夜戰)도 치를 가능성이 높다. 적군 후열에서 몰래 꼼지락거리는 게 야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
아무리 마법사가 흙을 까뒤집는다고 해도 금속 독의 독기를 신속하게 막기는 힘들지. 해서, 적군은 독기에 병사들이 중독되어 픽픽! 쓰러지기 전에 얼른 슈라드를 넘어갈 계획을 세운 걸로 보인다.
아마 확실하게 그럴 테니 야전은 확정된 사항이다. 한낮에 싸운 피로도 다 풀지 못했는데 밤새 잠도 못자고 또 싸우게 생겼다. 나는 문제없지만, 병사와 기사들이 죽어나갈 것을 생각하니 막막해진다.
“이걸 어떻게 하냐…….”
삐빅!
물러가는 적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통신기가 긴급 신호를 발한다. 펜 슈라드가 통신기를 받자 시즈믹스가 담담한 어조로 무어라 말했다. 가까이 있던 나도 통신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시즈믹스의 통신을 듣자 나와 펜 슈라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펜 슈라드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펜 슈라드가 침울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펜로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곳으로도 중앙 대륙이 전쟁을 걸어왔다고 하더군요.”
슈라드 뿐만이 아니라 펜로스에도 이보다 조금 덜 되는 병력을 투입해서 게리소님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를 쓰고 있다. 중앙 대륙의 제안을 거절하자 완전히 왕따가 된 남쪽 대륙이다.
양쪽 동시 공격에 남들 눈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독 묻은 흙덩이를 거주 구역에 던진다. 인간끼리의 전쟁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 독을 쓰거나 일반인을 죽이는 짓을 적군이 거침없이 쓰기 시작했다.
이건 한 가지를 의미한다.
진흙탕 싸움이 시작됐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는 기사들의 등을 바라보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나도 똑같이 해주마.’
지금까지 나는 많은 것을 봉인하고 싸웠다. 과거의 션이 두려워했던, 내 신분과 명성이 내 행동을 제약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꼭 악독한 수를 쓰고자 한다면 신분을 숨기고 유격단이나 테러리스트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공식 귀족이 된 이상, 나의 티클은 나만의 티클이 아닌 게리소님 전체의 티클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적들이 먼저 선을 넘었다. 너희가 선을 넘었는데 나라고 안 넘을 수가 있겠냐? 아니다. 상대가 선을 한 발자국 넘으면 백 발자국으로 보답해야 하는 게 이 세상의 진리.
무슨 소리인가. 그날 밤. 나는 야행복을 입고 성벽을 나섰다. 내 손에는 상급 마력석과 급하게 조달한 화염의 크리스털, 그리고 단검이 들려있었다.
‘주님. 오늘도 정의로운 암살자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암살자 쟈기. 오랜만에 현역 복귀다.
일단 버마 후작, 너부터 죽인다. 최고 지휘관이 몽땅 암살당해도 오늘처럼 기세등등할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