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398
398화
‘뭐 잘못 들었나? 머리카락에 관한 전폭적인 지원이겠지?’
당황하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하이다이 메타비스가 대화의 주제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그 전에, 어제 우리 모두의 잘못으로 어긋났던 절차를 제대로 밟도록 하지. 우선, 묻겠다. 알테어의 피오드 재상은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기에 이종족 연합지역을 말리고자 한 건가?”
“아, 예…….”
나는 영문을 몰라하며, 더듬더듬 피오드가 주장한 불안점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잘게 쪼개진 연합국 병력. 정신 차리고 보니 일천만 가까이 죽고, 빛의 수호자가 사라져도 악감정에 창칼을 거두지 않는 인간들. 몬스터를 막을 수 없게 되어버린 인류의 무력.
화해를 하려 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며 이기심을 드러내는 무리. 몇 년에 걸친 전쟁을 틈타 세력을 회복한 몬스터의 습격. 그 끝에 올 멸종사태까지.
내 설명을 모두 들은 하이다이 메타비스가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는 가정이다.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낮지도 않다.”
수인족 2선 의원 골드버리의 스승이자 보좌관이자 사령관이자… 여러 직책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피스트 마스터 카보머가 내게 물었다.
“피오드 재상은 종전을 위해 어떠한 대안책을 제시했지?”
“재상은 전장의 분리를 강조하셨습니다. 표면 세계의 전쟁은 전선을 고착화하여 시간을 끌고 그 와중에 이면 세계에서…….”
“하! 이면 세계라니. 르암인의 포장 본능은…….”
“마스터 카보며.” 에레스발다 여왕이자 2선 의원인 플레버리가 낮은 목소리로 카보머의 무례를 지적한다.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침착한 기색이었다.
“흠. 미안하오. 공작.”
카보머가 작게 묵례를 하여 미안함을 표했다. 나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이어 말했다.
“이면세계에선 이종족 연합지역과 저희가 빛의 수호자의 본진을 부수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선동에 놀아난, 아, 죄송, 놀아난 척을 하는 연합국의 전쟁 지속력이 감소한다고 하셨죠.”
뻐끔. 플레버리가 담배 연기를 토하며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해피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전장의 분리와 나뉜 결말. 그럴듯하지만, 실속이 없다. 말만 쉬워. 그 결말을 위해 어떠한 산을 넘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나?”
“그건…….”
나는 앵무새처럼 피오드가 한 말을 고대로 반복했다.
“그것이 장기적인 인류의 생존만이 아니라 단기적인 전쟁 측면에서도 현재 중앙이 유지하는 작전보다 더 큰 피해를 내지 않을 거란 보장은?”
플레버리에 이어 다른 1선 의원, 여전히 내게 곱지 않은 눈치를 보이는 원로원이 혀로 나를 썰어 죽이려는 듯이 무자비한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나는 몇 개월 동안 이때를 대비해 작전을 세운 알테어 엘리트의 문답지를 밤새 외운 덕분에 막힘없이 그들의 질문에 답했다.
“나도 질문하겠소. 또한 내륙 깊숙이 파고들며 후방에 ‘절반의 점령’만 달성하고 남겨두어야 할 르암인 국가에 대한 대비책은? 그리고 그들이 현 상황을…….”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진다.
나는 근 30여 분 동안 답하고, 답하고, 또 답했으며. 서기관 젤 포이만은 여전히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대회의의 모든 발언을 유려하게 저었다.
사각사각.
침착한 대회의장. 질문과 대답. 그리고 젤 포이만의 펜이 새하얀 종이를 채우는 소리만이 들린다. 나는 대답을 하다가 그의 손에 들린 펜을 힐끔 보았다.
저건 수십 년 전, 웨일이 퍼트린 불완전한 연필의 발전형이었다. 사소한 것에서 문명의 힘을 느낀 나는 어제 느꼈던 정체 모를 답답함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신했다.
근 한 시간에 이르는 문답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르데앙이 복잡한 심기를 숨기며 내게 물었다.
“쟈기 공, 하지만 여전히 문제점이 두 가지 남아있습니다. 하나. 이종족 연합지역이 중앙 대륙, 르암인 국가에게 가진 악감정은 어떻게 해소하실 생각입니까.”
“지당하십니다. 계속하십시오.”
“아니, 사실 그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르암인이 이종족을 납치, 인신매매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결국 이와 같은 일이 또 반복될 것입니다. 그것도 이번에는 저희 쪽에서 무력을 일으키겠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울 테니까요.”
“재상께선 전선을 밀며 후방에 절반의 점령만 하고 남겨둔 르암인 국가에게 빛의 수호자가 그리한 것처럼 지속적인 선동을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속적인 선동의 방안이란……”
내 답변을 듣고 카보머가 턱을 쓰다듬었다.
“칼에는 칼, 피에는 피. 선동에는 선동인가.”
칼에는 칼, 피에는 피라니. 속담 한번 살벌하다.
눈에는 눈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주먹에는 주먹이라고 해주면 안 될까? 이러니까 내가 이세계가 야만인만 넘쳐난다고 오해하지.
내가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르데앙이 두 번째 문제점을 말하려다가 우물거렸다.
“그… 쟈기 공작은 어떻게…….”
묻고 싶은 게 있지만, 묻지 못해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 노회한 정치인과 달리 감정을 완벽히 숨기지 못하는 그녀는 내게 ‘이따위’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질문하고 싶다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녀의 시선이 대놓고 젤 포이만에게 닿았다가 원위치한다. 결국, 포기한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며 하고자 하는 질문을 뱃속으로 꾹 밀어 넣고 다른 질문을 했다.
“하아~! 하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것입니까? 이면 세계에서 빛의 수호자를 종식시킨다 할지라도 르암인 연합국의 병력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겁니다. 한곳에 모인 그들이 수백만 단위의 연합국 병력을 보고 도리어 자신이 생겨서 전쟁을 지속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나세르 2세가 르데아의 말에 동의하며 그녀의 질문을 보충했다.
“그렇지. 압도적인 무력을 쓴다면 결국엔 이러한 논쟁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러하기에 피오드 재상님은 전선을 중앙 대륙 오대 강국으로 밀집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셨습니다. 한곳에 모인, 어쩌면 2천만이 넘는 무장병력. 그 엄청난 수가 한곳에 모인 힘을 보고 자신감이 아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호오?” 나세르 2세가 눈을 빛내며 관심을 드러냈다. 나는 탄력을 받아 연이어 설명했다.
“중요한 건 군중심리입니다. 긴장감을 극도로 올리는 거죠. 연합국에게 ‘빛의 수호자가 없어도 우리끼리면 할 수 있다.’ 가 아니라 ‘여기서 이 인구수가 죽자 살자 싸우면 더는 미래는 없다.’라는 것을 확고히 고지시키는 겁니다.”
플레버리가 나른한 어조로 태클을 걸었다.
“그 또한 말만 쉽다. 마법 같은 수단을 쓰지 않고 어떻게 양측 천만이 넘는 병력의 마음을 쥐고 흔들 건가?”
“거기서 제가 나서겠습니다.”
“공작이? 무슨 수로?”
“자고로 지배자가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는 본인들은 망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 때문이죠. 하지만 제가 전쟁 중에 그들에게도 긴장감을 선사하겠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희 입맛에 맞지 않는 왕족들을 치우죠. 그리하면 그들도 죽음을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치운다?”
“예.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암살입니다.”
이거, 이 말 해도 되나? 서기관이 기록하는 대회의에서 암살을 대놓고 입에 담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거침없이 이어 말하고, 말하는 정도를 넘어서 그들에게 내 능력을 보여주었다.
“증거를 보여 드리죠. 마법… 관저는 허락되지 않는 마법 발현을 막았군요. 하지만 저는 소드 마스터이기도 하니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암살을 하는 겁니다.”
번쩍! 마법으로 빛을 내서 나를 가린다. 단상을 거닐며 빛의 결속에 숨었다. 다음으로는 불을 끈다. 어둠을 생성하여 어둠과 함께 거닌다.
시각을 속이고, 감각을 속인다. 육체적인 사각과 정신적인 사각을 파고든다.
단 10초의 시연. 나는 10초 만에 대회의장에 모인 300여 명의 감각을 속이고 내 몸과 기운을 숨겼다.
소드 마스터와 고위 마법사, 정령사가 모인 용담호혈속에서, 그들 모두가 대놓고 지켜보는 자리에서 선보인 간 큰 은신술에 대회의장이 침묵에 잠겼다.
경악과 공포심마저 엿보이는 놀라운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심지어 일부는 대회의라는 사실조차 잊고 마나를 끌어 올려 영역을 발현하기도 했다.
우뚝!
거침없이 펜을 놀리던 젤 포이만 서기관이 손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단 하루의 만남이지만, 늘상 잔잔한 미소만 짓던 그의 표정에 약간의 당황과 황당함이 깃들었다.
나는 침묵을 즐기며 추가로 설명했다.
“머리가 사라지고 양떼만이 남았습니다. 그나마 남은 머리도 제 섬세한 판별 작업에 의해 저희 입맛에 맞는 놈만 남았지요. 상황이 그리 된다면, 그리 복잡한 수를 쓰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여론을 조작할 수 있을 겁니다.”
“……”
침묵 속. 엘프 장로, 2선 의원 하이다이 메타비스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공작. 이런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할 수밖에 없군. 지금은 서로가 협력하는 관계이지만, 향후 게리소님과 이종족 연합지역의 사이가 벌어지면 공작이 제거 대상 1순위가 될 것이라는 걸 알아주게.”
“알고 있고, 각오하고 있습니다. 다만, 궁금한 게 있는데 원래 제거 대상 1순위는 누구였습니까?”
“가급적이면 있지도 않은 최악의 가정을 입에 담아서 서로 간의 기분이 상하는 일은 피하고 싶군.”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은요?”
“공작은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인물로 보인다만?”
맞았다. 어차피 게리소님이 망하면 혼자서 도망치면 되니까. 그런 거 별로 내 알 바 아니었다.
“흠! 흐음!”
플레버리가 헛기침과 함께 당황스러운 감정을 수습했다. 그녀가 나를 가리키며 내가 한 발언을 정리했다.
“크게 한 방을 터트리자는 거군.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러나 가능성만 믿고 따르기에는 사안의 중요성이 막대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무익한 아군의 피해를 감수하는 것도 별로다.”
수인족 2선 의원인 골드버리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전쟁을 멈추자는 이상론을 상대가 들을 리도 없고, 지배자를 모두 죽인다면 남은 르암인이 자신들끼리 싸우다 공멸할 것 같으며, 우리가 그들을 지배한다면 빛의 수호자의 불쾌한 선동이 결국 사실이 되니.”
산악족 2선 의원인 안식이 다음으로 말했다.
“싸움으로 멸망을 주지시켜선 아니 된다. 이종족 연합지역이 적대자가 되어서 싸움을 멈추어도 아니 된다. 결국, 네 말대로 그곳에 모인 귀족, 왕족, 지배자. 심지어는 일반 병사마저 멸망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경계하여 스스로 창칼을 버리도록 설득해야 한다. 불쾌하지만, 네 주장이 맞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모든 의견을 하이다이 메타비스가 정리했다.
“그러니 게리소님을 포함한, 빛의 수호자에 대항하는 르암인 집단이여. 서쪽뿐만이 아니라 남쪽과 동쪽에서도 오대 강국 포위망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이것이 어젯밤에 결정한 우리의 의사다.”
“어, 어어…….”
뭐야?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뭐가 스무스하게 쭉쭉 흘러가더니 갑자기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결정됐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정도를 넘어서 180도 반전된 분위기.
심지어 어제 내게 유난히 분노를 표출했던 몇몇 1선 의원과 원로원도 못마땅해할 뿐, 2선 의원의 발언에 대놓고 반대표를 던지지 않는다. 이미 다 합의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단 하룻밤 사이에.
실험체인 특별 의원회는? 애초에 그 애송이들은 발언권이 없다. 어딜 사회 초년생 따위가 어르신들 대화 하는 데 끼어들어.
내가 물었다.
“지, 지원을… 해주시는 겁니까?”
나세르 2세가 단칼에 내 질문을 잘랐다.
“단순한 지원이 아님을 명심하길 바란다. 이것은 지원의 탈을 쓴 시험이다. 무엇이든지 간에 말은 말에 불과한 법. 르암인, 이종족 연합지역을 설득하고 우리의 방향성을 바꾸고자 한다면 단지 말 뿐이 아니라 네게, 르암인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라.”
원로원의 숨겨진 고수. 은퇴하였지만,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이름 모를 이종족 노인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너희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우리 페이스대로 전선을 밀고 나가 오대 강국을 포위하겠다. 만약 게리소님, 알테어, 그리고 나머지 자잘한 국가의 능력이 부족해서 때를 맞추지 못하고, 포위망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우리도 초기의 뜻대로 밀고 나갈 것이다.”
침착함을 되찾은 르데앙이 마무리를 했다.
“쟈기 공작. 아직 모든 의원의 의사를 모으지 않아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 당장 약속드릴 수 있는 지원은 소드 마스터 둘, 4결 이상의 마법사 서른, 이종족 혼성 연대 둘, 기사단 다섯 부대…….”
르데앙이 줄줄이 지원을 입에 담았다. 천공기 서른 대로 당장 내일부터 이종족 곳곳에서 게리소님으로 무장 병력을 지원해줄 것이며, 선박 수십 대로 병력과 물자를 날라 라그랑쥬, 알테어, 데일리케에도 도움을 주고, 마법 무구하고 포션하고…….
“후방 치안 유지를 위하여 치안군과 특별 의원회의 신(新) 성자단도 파견을 나가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참여인원을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스무 명 이상의 신 성자단이 민심을 살피어 후방의 소란을 막아줄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어, 어. 어어……….”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이렇게, 바보처럼 어어 소리만 내었다.
그런 나를 르데앙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절실하면서도 기대감을 품고 있는 초조한 얼굴. 그녀가 절박하게, 애원하듯이 내게 물었다.
“공작. 이것이 이종족 연합지역의 본심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수천 만의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꾸욱! 나는 내 볼살을 꼬집었다. 생생한 고통이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그들에게 확답했다.
“여기서 제 목숨이 의미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군요.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목숨을 걸고 성취하겠습니다.”
타악!
내 장담과 서기관 젤 포이만이 책을 닫는 소리를 신호탄삼아 대회의가 끝이 났다.
* * *
대회의가 끝난 이후부터는 혼란의 연속이었기에 나도 정신이 없어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몇 명의 전쟁참모에게 게리소님과 알테어의 전선 현황을 알려주고, 지원을 해준다면 가장 신속하게 달성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참모들끼리 지저귀는 소리를 듣다가 어디로 불려 나가서 뭘 받고, 또 어디로 불리고, 또 불리고… 정신을 차리니 그날이 훅 저물었다.
그날 밤. 나는 내 방에 앉아 해피에게 물었다.
“왜 저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거죠?”
해피가 고심하다가 말했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가정은 해 볼 수 있군.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면, 어젯밤에 새로운 정보가 전해졌다는 뜻이고, 우리와 이종족 연합지역 사이를 바꿀 변수가 그 정보를 통해 만들어졌겠지.”
“오, 그럴듯하군요. 그 변수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다.”
척, 하고 해피가 나를 가리켰다.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헤 벌렸다.
“혜응?”
“공작. 너 때문이다. 그들이 태도를 바꾸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이유는 너 말고 합당한 이유가 없다.”
“…어째서죠?”
“우선, 절대로 나는 아니다. 해피는 사소한 인물이고, 천재검은 의미가 없다. 게리소님은 중요하지 않다. 알테어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 이하의 소거법을 따르자면, 네가 원흉이다.”
“저도 의미가 없고 중요하지 않고, 가치가 없습니다만?”
“하지만 너는 본왕도 모르는 비밀을 숨기고 있지 않나?”
“…….”
기습하듯이 물어온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해피는 나를 관찰하듯이 내 표정을 샅샅이 살피다가 이어 말했다.
“그들이 공작에게서 무엇을 관측하였고, 어떠한 가능성을 느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네가 숨기고 있는 무엇인가가 이종족 연합지역이 전략을 수정하는 데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말고는 합당한 설명이 되지 않는군.”
나는 그의 말에 깊은 고민에 잠겼다. 내가 변수를 만들어 냈다면 어떤 변수가 탄생한 걸까.
설마 저 늙은이들이 쉰둘이 본 막장 드라마의 부잣집 도련님처럼 ‘어머? 나한테 이런 건 네가 처음이야.’라고 두근거린 건 아닐 테고.
고민을 거듭하지만, 주어진 정보가 너무나도 적어서 뭐라고 확신할 수 없다. 심지어 해피조차 그가 한 말이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일축했다.
그렇게 본인의 주장을 일축한 해피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고했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곤 방문으로 향했다. 그가 나를 치하하며 방을 나섰다.
“앞으로 바빠지겠어. 오늘 하루만이라도 푹 쉬어라. 수고했다.”
딸칵! 해피가 나간다.
나는 해피가 떠난 이후에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오늘 있었던 충격적인 이종족 연합지역의 선회를 계속해서 떠올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깊은 생각에 빠진 내 방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나는 문을 열기 전부터 그자의 정체를 짐작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대회의의 총보좌이자 서기관인 젤 포이만이 들어왔다. 그가 긴팔 니트 조끼를 입은 채, 내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공작. 잠시 산책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 *
중앙은 밤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알테어와 다르지만, 그네들 나름대로 발전을 이룩한 끝에 개발한 마나등이 길거리 곳곳을 비춰주었고, 한낮과는 다른 복장을 한 가지각색의 종족이 밤거리를 돌아다닌다.
젤 포이만이 계단과 골목길 일색인 시장을 걷다가 어느 음식점에서 음료수 두 개를 사와 내게 다가왔다.
“드시죠. 코난이라는, 외지인의 입맛에도 맞는 열매 주스입니다.”
코코넛과 비슷한 형태의 단단한 과육을 자랑하는 열매. 윗부분을 동그랗게 파고, 줄기로 빨대를 대신했다. 한 입 음료를 빨자 달달하고 상큼한 주스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마찬가지고 코난을 한 모금 마신 젤 포이만이 나를 시장 밖으로 안내했다. 일견 서늘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유한 걸음걸이로 외진 곳까지 향한 그가 빈 공터로 나를 이끌었다.
공터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때를 위해서 미리 출입을 통제한 것처럼. 그 빈 공터, 가까운 벤치에 앉은 그가 나도 바로 옆자리에 앉힌다.
어제 처음 봤으면서 친화력 한번 엄청나네. 나는 어색하게 그의 옆에 앉고, 소심하게 엉덩이를 옮겨서 거리를 살짝 벌렸다.
젤 포이만이 그런 나를 보고 슬며시 웃는다. 나는 민망해서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어제는 어땠습니까?”
“바빴죠. 아주 바빴습니다.”
“…….”
어, 그게 끝이야? 먼저 불러놓고는 그거 한마디 하고 아무 말 없어?
쪼르륵!
나는 가만히 코난을 마셨다. 나는 어색해 죽겠는데 젤 포이만은 혼자서 작은 허밍을 하며 발을 흔든다. 아주 편해 죽겠어요.
그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 그 순간, 젤 포이만이 기습적으로 내게 던진 질문이 내 정신을 또렷하게 긴장시켰다.
“공작. 인간에게 실망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