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488
488화
* * *
“흐흐……!”
드디어 죽였다. 내가 아니다. 웨일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 승리가 아니다.
인류의 힘으로. 수천 년간 시체의 산을 건너고, 피의 바다를 넘어가며 아득바득 발전한 집단이 고대의 멸망 원인인 악신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뭐? 승천자하고 지구 무기의 도움이 있었다고? 에이, 멋없는 소리는 그만 하자. 그 정도면 우정, 노력, 승리의 공식에서 엇나가지 않지.
“흐흐흐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군. 이게 진정한 승리의 쾌감이었다. 나는 실실 웃으며 악신을 향해 걸어갔다.
“아…….”
“다두, 당신…….”
악신의 시체를 앞두고 환호성을 지르는 검사들이 다가오는 나를 보고는 자세를 바르게 잡았다. 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발을 놀려 악신을 향해 걸어갔다.
“…….”
척! 처적!
야, 좀 도와줘. 사람이 옆구리에서 피 흘리면서 걸어가고 있잖아. 왜 검 세우고 인사하고 지랄이야. 너는 또 왜 무릎을 꿇어? 아니, 무릎을 꿇는 건 검사만이 아니다.
멀리서 코피를 줄줄 흘리며 마법을 쓴 마법사, 승천자의 도움으로 몬스터를 압도적으로 눌러 죽인 일반 병사들까지. 수만 명이 숨을 멈추고 내게 시선을 집중한다.
그리고는 하나둘… 스태프를, 완드를, 마법총을, 무기를 들고는 내게 각자 경례를 했다. 천공기와 비행정에 탄 조종사도, 신 성자단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다.
나는 수만 명의 경례를 받으며, 옆구리와 안면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악신에게 다가갔다.
‘이거 웃기는 놈들이네.’
내가 지금 인사 받으려고 이 개고생 하는 줄 알아? 나는 인사보다 부축이 필요하다. 그런데 뮤온 보트라마저 내게 검사의 예의를 표하니… 진짜 아파서 미칠 것 같다.
“…….”
젤 포이만을 바라본다. 그가 실로 묘한, 기쁨과 슬픔이 얼굴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팔. 한 명도 안 도와주는구먼. 너네 다 얼굴 기억했어. 나중에 두고 보자. 나는 복수심을 마음속에 새기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악신을 앞에 두었다.
검은 피부를 자랑하는,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거인.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어르신.”
“어, 음…….”
쉘리 반데스가 조신하게 착지했다. 그가 민망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무슨 그런 소리를. 레이스 막았잖아요.”
션과 싸웠던 울타르 대장로가 제어한 레이스의 양은 쉘리 반데스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조차 부하들의 목숨을 희생양 삼아 이룬 업적이다.
레이스를 모으는 암흑의 휘광. 아무리 아이의 도움으로 완성한 최고위 마법이어도 쉘리 반데스라는 출중한 실력자가 없었으면 수천이 넘는 레이스를 놓쳤으리라.
도망친 놈들은 승천자라 할지라도 행성 자체를 뒤엎지 않는 한 되찾지 못한다. 그렇게 세상으로 퍼진 레이스는 제2의 투쟁의 시대를 불러올 분란의 씨앗이 되었겠지.
쉘리 반데스는 그걸 단독으로 막았다. 그는 나를 포함한 이 장소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공적을 달성했다.
다두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전생한다는 사실을 들켜 앞날이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알았다. 쉘리 반데스가 아니었으면 이 계획은 엉망진창으로 실패했다.
“감사합니다. 쉘리 반데스 태상왕이시여. 당신 덕분에 인류는 투쟁의 시대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인류를 대표해 감사 인사를 올렸다. 쉘리 반데스가 묘한 얼굴을 했다. 처음 보는 표정인데, 아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 건 그만이 아니다. 에일이라는 거짓 설정을 지껄인 내 발언을 최초로 믿어준 트라칸이 있어서 이후의 일도 유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트라칸 부왕도 감사드립니다.”
“흠! 뭐… 감사까지야. 별일도 안 했는데.”
사실 별 일 안 하긴 했지. 원래 검사라는 인종은 싸울 일이 없으면 밥만 축내는 돼지 새끼니 그 정도는 봐주도록 하자.
나는 다음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젤 포이만 서기관과 저 멀리 계신 옥시아 마법사님도. 수백 년을 헌신한 이종족 연합지역을 배신하는 거나 다름없는 결정을 내리면서까지 저를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다두, 저는 당신을 믿었으니까요.”
“…….”
옥시아는 워낙 멀어서 뭐라고 말하는지 안 들린다. 뭐라고 말했긴 했겠지. 나는 르데앙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르데앙 성자님도 감사드립니다.”
“당신에겐 빚이 있으니까요. 감수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르데앙이 덤덤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악신의 발등을 공격하는 조에 포함되어 있어서 옷과 피부가 거뭇거뭇하게 탔지만, 미모는 빛이 바랠 줄 몰랐다.
애가 성격이 거지같은 거 빼고는 참 참하단 말이야. 능력도 있고. 솔직히 라코아보단 르데앙이 결혼 매물로는 훨씬 뛰어난데, 왜 지금까지 미혼인지 알 수가 없다.
모르겠다. 알아서 잘 살겠지. 나는 르데앙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뮤온 보트라, 황제시여. 당신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고꾸라졌을 것입니다.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을 방기하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미치광이의 계획을 도와주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니다. 필요한 일이어서 했고, 해야 할 일이어서 도왔다. 그저 그뿐인 일이다.”
여전히 무뚝뚝한 사람이다. 언제 저 인간이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웃기는 하나? 나는 뮤온 보트라가 웃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징그러워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뮤온 보트라가 몸을 떠는 나를 이상하게 본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손짓하고는, 후련한 얼굴로 악신에게 다가갔다.
‘할 거 다 했지? 까먹은 거 없지?’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나중 일이 걱정이어서 말이야. 사람이란 게 치사한 생물이라 자기 공을 목놓아 외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대놓고 한 명 한 명 지목하며 고맙다고 말한 게 그 때문이지. 이렇게까지 안전장치를 해두었으니 각자 자리로 복귀하는 것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막이다. 죽은 악신, 녀석의 (깨진) 정수리에 여전히 남아있는 막. 나는 깨지고 터져서 거무죽죽한 뇌수를 질질 흘리는 악신의 머리통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정말로 죽였군.”
목소리가 절뚝거리며 악신에게 다가가는 나를 부축했다. 롤랑이었다. 그가 사정을 파악했는지 악신과 모순적인 막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연 차원문을 닫으려고 이 사고를 친 건가?”
“맞습니다.”
“방법은?”
열린 지옥문을 어떻게 닫는가. 과거의 기록을 다 훑어봐도 지옥문은 여는 방법만 있었지, 닫는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앞날이 깜깜해지는 미래. 그러나 우연하게도, 다른 이유로 되살린 악신이 막을 닫는 데 중요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악신을 태어나게 해서, 녀석의 몸에 남아있는 신력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막의 활동을 일으킵니다.”
“신력… 그걸 그렇게 부르는군. 알겠다. 신력을 어떻게 이끌어 낼 생각이지?”
“성력과 가능성으로.”
나는 막에 간섭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보고 겪었듯이, 악신의 몸에 남아있는 신력(神力)이라 할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은 막에 간섭한다.
그리고 신력은, 과거 웨일의 탄생이 그러했듯이 마법과 성력으로 간접적으로나마 다룰 수 있다.
마법의 가능성과 성력의 힘으로 신력의 발생 방향성을 조절한다. 그렇게 신력의 힘을 이용해 막을 덮는다. 언제까지? 막이 자연적으로 복구될 때까지.
물론 자연적 복구 시기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제대로 복구될지, 아니면 시간이 흐르고 다시 막에 위기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아이의 예측이 초장부터 엇나가서 이것도 제대로 된 방법일지 불안하긴 하다만…….’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입니다. 롤랑은, 위대하신 승천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흠…….”
잠시 고민하던 롤랑이 답했다.
“깔끔하지 못한 방식이군. 하지만 그걸로도 이후에 일어날 문제를 방지할 수 있다.”
“아, 괜찮은 겁니까? 어르신들! 괜찮데요! 계획한 대로 합시다!”
내 말에 어르신들, 쉘리 반데스와 뮤온 보트라가 움직였다. 뮤온 보트라의 손이 희끗해지고, 백색 섬광이 악신의 가슴을 갈랐다.
연속된 공격에 가슴이 쩍쩍 갈라지고, 울컥! 하고 치솟는 피와 함께 그것이 드러났다. 악신이 죽었음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두근거리는 거대한 심장.
뚜둑!
동굴만큼이나 넓은 혈관을 자른다. 피가 왈칵! 솟구치고, 악신의 심장이 분리되었다. 신장 200미터가 넘는 거인의 심장은 웬만한 집만큼이나 커다랬다.
쉘리 반데스가 심장에 마법을 걸었다. 약동하는 심장이 떠오르고, 울컥울컥 치솟는 혈액이 녀석을 감쌌다. 심장 박동과 스태프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하나가 되며, 악신의 육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드득! 뿌지지직! 꽈드득!
악신의 몸. 혈액과 근육과 뼈가 심장을 중심으로 공처럼 뭉쳐 압축된다. 녀석을 이루는 근본이 하나로 합쳐지고, 육체에 모인 모든 힘이 신력을 발동시키는 기재로 변한다.
천천히… 쉘리 반데스가 땀을 뻘뻘 흘리며 변해가는 심장을 막으로 이끌었다. 모두가 홀린 듯이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흠…, 하고 롤랑이 쉘리 반데스와 나, 변해가는 심장을 번갈아 본다. 그가 다른 승천자 부대원과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이며 심장과 막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의 귓속말을 들은 승천자가 작게 입을 달싹인다. 아마 우리가 하는 일의 능률과 성공 가능성을 계산하는 거겠지. 상의가 끝나고, 롤랑이 내게 물었다.
“다두. 혼자선 힘들어 보이는군. 도와줘도 괜찮겠나?”
“그럼요. 이건 도와줘야죠.”
애초에 이 일은 오로지 가정에 의해 진행된다. 아이도 악신의 육체와 신력, 성력의 합작품으로 막을 막는 것이 진정으로 통할지, 그도 아니면 헛 힘을 쓰는건지 확실하게 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확신하지 못하는 일인데, 승천자가 도와줘서 마무리해주면 나야 고맙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롤랑이 승천자 부대원에게 손짓했다.
“차원봉인 작업을 시작한다.”
뿌드득!
승천자가 뭔가 복잡한 걸 설치하곤, 복잡한 짓을 하며 복잡한 주문을 외운다. 솔직히 뭘 하는지 하나도 몰라서 복잡하다는 묘사 말고는 딱히 설명할 게 없다.
시간이 흐르고, 심장이 모순적인 막을 틀어막았다. 심장의 색이 사라진다. 검은 살점이 모순적인 막으로 억지로 쑤셔 박히며 색이 무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착!
나는 변해가는 심장에 손을 대었다. 따듯한 심장. 무진장한 기운이 감도는 그것에 접촉하고는 눈을 감았다.
아이가 전해준 충고를 떠올린다.
[마법은 필요 없습니다. 사실 필요 없다기보다는 현 수준에서 악신과 막에 간섭할 수 있는 고등한 마법은 쓸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군요.] [그러니 다두, 주술을 쓰세요. 주술과 텔레파시로 변화한 심장에 접촉하십시오. 오로지 한 가지 염(念)만을 심장에 불어넣으세요.] [원시 마법입니다. 힘을 전하고, 그저 바란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말 그대로 마법과도 같은 기적을 염원하세요. 그리하면 악신의 육체에 남은 신력이 당신이 바라는 걸 알아서 이루어줄 것입니다.]* * *
기도하라신다. 기도라는 단어와 가장 동떨어진 존재인 초인공지능 아이님이 해결책으로 기도를 언급하셨다.
중간마다 틀린 게 있긴 하지만, 아이의 말을 따르면 자다가도 초고위 마법이 생긴다. 그러니 기도라는 어처구니 없는 수단도 따르도록 하자.
“…….”
그녀의 말대로 간절히 기도한다. 무엇을 기도하는가.
막이 안전해졌으면 좋겠다. 검은 우주를 이루는 레이스가 다시는 이세계로 들어오지 않기를 바란다. 몬스터가 줄어들었으면 좋겠고, 악신도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밉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밉다.’
악신. 말은 안 했지만, 나는 네가 밉다. 필요에 의해서라지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너를 되살리고 살리자마자 죽일 정도로 네가 미웠다.
한 번이 아니다. 가능하다면 두 번이든 세 번이든. 능력이 된다면 연례행사처럼 너를 살리고 죽이는 걸 몇 번이고 반복할 정도로 네가 미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가 아니다. 내 첫 번째 삶은 레이스에 의해 망가졌다. 빌어먹을 상차원의 빌어먹을 통로를 연 것은 빌어먹을 미치광이 과학자들이지만, 내게 좀 더 직접적인 고통을 안겨준 것은 레이스였다.
그래서 레이스가 밉다. 검은 우주가 밉고, 몬스터와 악신이 밉다. 그리고 너희를 ‘너희답게’ 개성을 부여해 준 의문의 법칙이 미웠다. 되살리고, 죽일 정도로 미웠다.
‘하지만 쇼콜라가 되고 나서 알았지.’
너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레이스는 처치해도 끝이 아니며, 이세계를 돌아다니는 몬스터는 죽인다 해도 진정으로 ‘사망’이라는 상태에 놓이는 게 아니다.
악신은 그리고 쇼콜라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것이 몬스터라는 존재이다. 저것들은 생명체를 따라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삶과 죽음의 순환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몇 번이나 살리고 죽인다 해도 너에게 죽음은 의미가 없으니, 괜한 힘 낭비나 하는 거지.
쇼콜라로 살았던 나는 그 사실을 안다. 저것들의 진화의 끝은 쇼콜라와 같이, 불변하고 힘의 증감도 없으며 삶도 죽음도 없는 쓸쓸한 존재가 되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비은다각형-무한소. 내 안에 담긴 쇼콜라의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쇼콜라와 나의 힘을 억지로 한데 뭉친다.
“…다두?”
내 손에 모인 쇼콜라의 힘과 그것에 억지로 섞인 죽음에 롤랑이 경악한다. 누가 승천자 아니랄까 봐 이걸 느끼네.
척!
나는 악신의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의 성력, 마나, 생명력과 초능력은 물론이고 주술력에 쇼콜라의 힘.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를 죽이는 죽음을 담았다.
내 죽음을 너한테 줄 게. 심장을 통해 막으로, 막을 통해 검은 우주로, 검은 우주와 연결된 다른 모든 우주로. 내가 전해준 죽음이 퍼져 나가기를 기도한다.
‘악신. 레이스. 검은 우주. 누구든지 상관없다. 죽음을 느끼고, 죽음을 알아라.’
수많은 죽음이 우리를 완성시켜. 누구에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적절한 말이다.
내가 전해준 죽음이 너를 조금이라도 완성해 주기를 바란다. 삶도 죽음도 없이 검은 우주와 쇼콜라의 우주처럼 쓸쓸하게 불변하기만 할 뿐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너도 순환을 이루기를 바라며.
내가 쌓아온 죽음. 나를 완성시켜주는 수많은 죽음. 그것의 근본을 쇼콜라의 힘에 담아, 막을 이루는 악신의 심장에 전해주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삶을 알고, 생을 쟁취해라.’
그리고 그 끝에. 언젠가 미래의 내가 진정으로 너를 죽이기를 기다려라.
아니, 굳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승천자, 이세계인, 지구인 또는 무수하게 고립된 우주에서 너희에게 죽어간 수많은 종족이 진정으로 살아난 너희에게 피 값을 받아낼 그날을 기다려라.
내 첫 번째 삶. 전전전전 전전전전 전생부터 네게 바라왔던 일을…….
‘그리하여……. 그래서…….’
휘청……!
“아!”
나는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손을 떼었다. 심장은 완전히 투명해졌고, 모순적인 막은 공간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심장에 손을 올려,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기댈 곳이 사라지자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바로 서려 했지만, 힘이 하나도 없다.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초능력과 성력으로 죽음을 막고 있었는데, 모든 힘을 끄집어내니 몸이 진정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두!”
롤랑이 급하게 나를 끌어안고 성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의 성력이 들어오기 전, 텅 빈 나의 몸으로 일부 남은 죽음이 침투했다. 방어기재가 사라진 내 몸.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죽음이 세포 하나하나에 녹아들었다.
“다두! 눈을… 눈을 떠라!”
아, 이런 잠시 기절했군. 눈이 시퍼렇다. 왜 그런가 보니 롤랑만이 아니라 승천자들이 힘을 합쳐 내게 성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군.
그것 참… 미련한 짓을 하고 있다. 나는 히죽 웃으며 나를 끌어안은 채, 내 얼굴을 내려다보는 롤랑을 바라보았다. 푸른빛 탓에 그가 어떠한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그는 늘 무뚝뚝한 인간이었으니. 크게 안색이 바뀌진 않겠지. 나는 조용히, 푸른빛에 감싸여 내 얼굴을 쓰다듬는 롤랑을 보며 물었다.
“롤랑. 그러고 보니 저를 올가라고 부르지 않네요.”
“후…….”
롤랑이 작게 웃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올가는 죽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내 제자 삼사드다.”
“제자입니까? 저는 아직도 당신의 제자가 맞습니까?”
“그래. 넌 내 제자다. 내… 나의……. 마지막까지 말썽을 부렸던, 내가, 내 손으로 지키지 못했던…….”
롤랑이 말을 잊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턱에서, 푸르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떨어졌다.
갑자기 왜 저러나 몰라. 정작 죽은 나는 괜찮은데 죽인 사람이 미안해하고 있으니, 내가 더 미안해진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다, 다두! 비켜! 비키라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가 후다닥 달려오는 게 보인다.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이라고! 다 꺼져! 시팔!”
앞을 막는 승천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내게 달려오는 남자. 그가 울상을 지은 채, 밀치듯이 롤랑을 치우고는 나를 껴안았다.
뚝뚝! 하고 그가 흘린 눈물이 내 얼굴에 떨어진다. 승천자가 눈치 빠르게 푸른빛의 세기를 줄였다. 덕분에 나를 안은 자의 얼굴이 훤히 보인다.
어라? 잠깐만. 아까는 정신없어서 잘 몰랐는데 이거……?
나는 눈물을 맞으며 그에게 말했다.
“어? 아빠 젊어졌네?”
여든이 넘은 마호프 오먼. 1급 주술사로서 장수하였지만, 마스터의 벽을 넘지 못하고 전성기가 지나 서서히 꺾여가던 사내.
하지만 그의 얼굴은 거의 반년 전, 다두와 헤어지기 전에 보았던 그것보다 주름살이 확연히 줄어있었다. 혼탁해진 눈동자도 깨끗하고, 굽어진 등도 똑바르게 펴졌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내가 남긴 주술 익히고 경지를 넘었구나. 축하해.”
그 고집 내가 언제 꺾나 했다. 꼰대처럼 옛날 주술에만 집착하느라 당신 몰래 주술원 제자들한테만 신 주술 알려줬는데, 나 떠나고 결국 배웠지?
“너, 이……!”
내 축하 말을 듣자 마호프 오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30년은 젊어진 얼굴에 참혹함이라는 주름살이 생기고, 검은색을 되찾은 머릿결에 비참함이라는 흰색이 올라왔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 일그러진 그 얼굴! 여태까지, 한 살도 못 살고 죽은 수많은 짧은 생에서, 죽어가는 내 얼굴을 바라보던 부모님들의 얼굴!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이 말이 흘러나왔다.
“아빠. 거짓말해서 미안.”
“그래! 이 새끼야! 에일이고 뭐고, 미리 나한테 상의라고 하고 떠나지 그랬냐!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게……!”
면목이 없군.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 누가 알았겠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도 부탁했지.
떠오르는 변명은 수백 가지인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단 한 단어에 불과했다.
“…죄송해요.”
내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 한 적은 아마 지금이 처음이 아닐까? 한 번 사과를 하자 봇물 터진 듯이, 미안하단 말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자살해서 미안해. 휠리스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 실라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아버지를 참지 못하고 전부 죽여서 미안해. 여유가 생기자마자 어머니를 찾으러 가지 못해 미안해.
“미안. 미안해… 전부 미안.”
쉰둘의 삶이 감사로 가득했다면, 다두의 삶은 미안한 일 투성이었다. 나는 마호프 오먼에게 또 미안한 거리를 말했다.
“아빠, 또 미안한 게 있는데. 나 조금 있다 죽어.”
“아니, 이… 이놈 시키야……! 이럴 거면… 이럴 거였으면 죽어도 내보내지 않는 거였는데!!”
마호프 오먼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맨날 나보고 밖에 좀 나가라고 닦달을 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
아, 목소리가 희미해진다. 눈앞이 컴컴하고, 몸이 차게 식어갔다. 한두 번 죽어봤어야지, 죽음의 프로인 나는 앞으로 몇 초 후면 진정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내 말이 들릴지 모르겠군. 나는 감각이 없는 입을 벙긋거렸다.
“아빠. 오래 살아야 돼. 알겠어?”
[가지 마라. 다두. 이렇게 가면 안 된다! 어?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뭐라는 거야. 안 들려. 나는 계속 떠들었다. 살아있는 자가 살기를 바라며, 나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며.
“인생 별거 없어. 안 아프고, 건강하게 오래 살면 그게 다야. 그러니까. 진짜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야 돼.”
[제발……! 이러면 안 돼. 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마…….]할 말은 다 했다. 눈이 감긴다. 나를 덮치는 죽음과 함께 죽음 이후에 관해 생각한다.
다음은 또 어디로 갈까? 어디서, 누구하고 놀까?
그렇게 나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