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489
489화
그리운 이 공간으로 다시 왔도다.
백색의 세상. 위를 올려다보면 은하보다도 거대한 퍼랭이 인간이 스노우글로브를 바라보듯이 나를 내려다보는 괴상한 풍경.
그그…….
어라?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 평소에는 정신을 차리면 탱탱볼하고 아이 옆에 뿅! 하고 등장하는데, 지금은 둘이 저만치 멀리 있다.
리젠 포인트가 잘못 잡혔나? 열심히 일 한 사람을 이따위로 대우하다니. 능력 없는 탱탱볼 같으니라고.
그그그……!
‘어쩔 수 없지.’
이런이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몸은 마음 넓은 사람이니까. 이번만큼은 내가 가주마. 나는 폴짝폴짝 뛰며 둘에게 달려갔다.
여어! 나 성공 해버렸다구! 이만큼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했는데, 다음 생에 특전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들 간섭 못 한다는 거 다 개뻥인 거 알고 있으니까 얼른 주머니 털 준비해라!
그그그그………!
그런데 아까부터 이 소리는 뭐야? 하늘이 통째로 바스러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과 흡사하다.
음. 하늘… 하늘이라…….
‘하늘?!’
세상에나! 그런 것까지 준비했어? 대체 얼마나 많은 걸 주려고 그러셨어요? 에이!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는데.
나는 주지 제곱에 육림 세제곱하고 삼백처 사백첩이면 만족하는 소소한 사람이다. 하지만 준다는 걸 안 받으면 예의가 아니지. 감사한 마음으로 보상을 받도록 하자.
‘세상까지 구했으니까 이젠 진짜 싸움이고 나발이고 은퇴하고 편하게 살아보자. 딴 건 다 필요 없어. 내 집 중심으로 5*5 배열의 집에 나만 바라보는 소꿉친구가 있고, 학생회장 200명이 나를…….’
쿠웅!
“으억?!”
푸른색 무언가가 떨어져 내려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희희낙락하는 웃음을 멈추고 나를 가로막은 푸른색 벽을 바라보았다.
“이건… 후원자?”
하늘을 채우는 우주적 크기의 푸른색 인간. 탱탱볼이 칭하기를, 후원자. 그가 은하수를 으스러뜨릴 만큼 거대한 손바닥으로 손날을 만들어 백색 땅을 탁! 내리쳐 나와 둘 사이를 막은 것이다.
손날은 어찌나 큰지 위를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푸른색 벽 왼쪽 끝, 왼쪽 시야를 가리는 푸른 벽이 위로 올라간다. 나는 그것이 후원자의 팔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벽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더니, 후원자의 몸과 연결이 되었다. 보기만 해도 원근감이 망가질 것 같은 존재감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후원자가 크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니 상상 이상이어서 놀랍고, 여태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으니 또 두려웠다.
– …….
‘저것’이 내게 의사를 보낸다.
“아, 어… 어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정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개미가 영화관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우는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를 보고,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절대로 없다고 확신한다. 지금 내 기분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정보의 폭풍이 나를 괴롭힌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영혼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 …. ……?
후원자가 곤란해(아마도) 하는 것 같았다. 내 영혼을 녹이는 정보의 폭풍이 사라지고, 출아법(出芽法)처럼 푸른 벽 한쪽 귀퉁이가 불쑥 솟아오르더니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졌다.
그리고…
“어, 어르신?”
인간을 따라 하는 푸른 살점은 이윽고, 다두가 게리소님에서 보았던 쉘리 반데스로 변했다. 얌전한 노신사 복장을 한 쉘리 반데스가 푸른 벽 앞에서 등장했다.
푸른색 쉘리 반데스가 내게 말했다.
“아, 음… 내 말 들리나?”
“어, 아……. 아?”
갑자기 어르신이 여기서 왜 나와?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런 내 모습이 퍽이나 웃긴 걸까? 푸른색 쉘리 반데스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가장 신뢰하는 인간의 모습을 빌렸어. 원래 형태로는 의사소통할 수 없어서 말이네.”
아아!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쉘리 반데스한테 나도 모르는 숨겨진 설정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어찌나 놀랐는지 후원자가 어째서 그의 모습을 빌려 내게 나타났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도리어 침착해진다던데,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나는 놀람이 전해준 침착함을 무기 삼아 푸른색 쉘리 반데스에게 물었다.
“정상적으로 들립니다. 그보다 서로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데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나는 과거에 얀(YAN) 이라고 불렀네. 하지만 지금은 이름이 의미가 없지. 그냥 편한 대로 부르도록 하게.”
편한 대로 부르라니. 쉘리 반데스? 나이 처먹고도 욕심 한가득인 노인네? 거지 같은 영감탱이?
수많은 후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꾹 참았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는 인간이다.
“그러면 탱탱볼의 말을 빌려, 후원자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게 편하다면.”
쉘리 반데스, 후원자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자신의 이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나는 후원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후원자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하게나. 그걸 위해서, 자네의 수준에 맞는 설명을 하기 위해 이 몸을 빌린 거니까.”
“하……. 예. 알겠습니다. 제 질문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어째서 이곳에 나타나신 거고, 또 하나는 왜 탱탱볼하고 아이에게 가는 저를 가로막으신 겁니까?”
“첫 번째 질문은 아까 대답했고. 두 번째 질문의 답은… 간단하네. 자네는 ‘저기’로 갈 수 없기 때문이야.”
아니, 평상시에는 구경만 하다가 보상받을 차례가 오니까 못 간다고 막는다고? 마음 같아선 쌍욕을 박고 싶지만, 후원자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꼈기에 꾹 참는다.
나는 최대한 조신하게 자세를 잡았다. 무릎을 수그리고, 양손을 깍지 끼고는 가슴 앞에 모았다. 있는 힘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 어째서죠?”
“어째서라니?”
후원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은하수를 쥐고 으스러뜨릴만한 거대한 푸른 벽, 손날로 만든 장벽 너머를 가리켰다.
“자네는 ‘저기’가 어디인지 들어서 알고 있지 않나?”
탱탱볼과 아이가 있는 ‘저기’. 후원자의 도움으로 신의…….
내 생각의 흐름을 읽었다는 듯이, 후원자가 기습처럼 물었다.
“미래의 후보자들이지. 그렇다면 어째서 자네도 저곳에 있었을까?”
“그건…….”
어?
“아.”
나는 자세를 풀었다. 그랬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다. 탱탱볼과 아이가 저곳에 있는 건 이해 가지만, 어째서 나까지 저기에 있었지?
‘그거는 설마…….’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너무나도 희망적이면서 편의주의적인 가설이었다.
인생 기대하다가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인가? 심지어 이거는 평범한 기대도 아니고 무려 내 목표와 관련된 일이다.
침착하자. 나는 눈을 빛내며 후원자에게 물었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맞네. 아니, 맞았네.”
과거형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박탈당한 거군요. 자격이든, 가능성이든 뭐든 내게 남아있는 그것이 사라졌어요.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장난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원자가 나를 가리켰다. 상처 하나 없는 알몸에 순백의 커튼을 그리스 로마 시대 복장처럼 몸에 걸친 나, 다두의 몸을.
“본래의 너라면 괜찮겠지. 하지만 다두는 마지막에 자신이 보유한 죽음을 악신에게 나누어주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설명을 부탁합니다.”
“쯧쯧.”
후원자가 혀를 찼다. 그것은 아마도,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혀를 찬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나가는 마지막에 와서.
* * *
“자네가 하나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순서를 밟지. 우선, 물방울을 반으로 갈라보게. 그러면, 갈라진 반쪽도 물인가?”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찰흙을 반으로 갈라보지. 그렇다면? 반으로 나뉜 두 쪽의 찰흙도 반쪽자리 찰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물은 나뉘어도 물이고, 찰흙도 나뉘어도 찰흙이니까? 반으로 나뉘든, 백 조각으로 나뉘든 ‘물’ 또는 ‘찰흙’이라는 개성을 오롯이 보유해서?
“잘 따라오고 있어.”
좋아. 정답인가 보다.
“다음으로 가겠네. 이게 핵심이야. 그렇다면, 인간을 반으로 가르면 그걸 반쪽짜리 인간으로 볼 수 있나?”
“그건…….”
나는 여기서 고민했다. 반으로 나뉜 물도, 찰흙도 물이고 찰흙이다. 그렇다면? 반으로 나뉜 인간은?
“아니… 라고 생각합니다.”
“왜?”
반으로 가른 인간은 반쪽짜리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개성을 지닌 망가진 존재에 불과하다.
후원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질문이네. 그렇다면 반으로 나뉜 죽음은? 반으로 갈라진 가능성은 반쪽자리 죽음이고, 반쪽짜리 가능성인가?”
“아아!”
나는 질문을 들음과 동시에 어째서 내가 저곳으로 갈 수 없는지를 깨달았다.
“저는… 답안지를 찢어버렸군요. 반으로 나뉜 답안지는 50점짜리 답지가 아니라, 답안지도 뭣도 아닌 찢어진 종이에 불과합니다.”
“그러하다네. 마치 자네처럼 말이지.”
그랬다. 다두가 마지막에 악신에게 건네준 죽음이 문제였다.
나는 나를 완성시키는 죽음을 억지로 찢었다. 찢어져서 일부만 남아있는 죽음은 더 이상 나를 완성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혼잡하게 흐트러진 기운에 불과할 뿐. 물론 반쪽짜리 인간 시체가 미생물의 집이 되듯이, 찢어진 죽음도 내게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만 ‘저기’에 들어갈 자격은 얻지 못하게 되는군요. 어디까지나 미생물의 집이 될 뿐, 인간은 되지 못하니까.”
“정확하네.”
후원자가 팔을 꼬곤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건가?”
“…….”
“그 단계에 도달한 자들은 실로 많지.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고꾸라진 자들은 더욱더 많아.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네. 하지만… 자네처럼 갈 수 있는데도 스스로의 가능성을 찢어서 타인에게 나눠준 예는 없어.”
“아무도 없습니까? 정말로 아무도?”
“아무도.”
후원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누가 그걸 포기하겠나? 아니, 포기한 자는 있긴 하지. 하지만 도달할 가능성을 찢어서 타인에게 나눠준 일은, 내가 알기로는 자네가 최초네.”
“최초라고요? 정말입니까?”
“세상 어느 미친놈이 그런 아까운 짓을 하겠나? 자네 같으면 할 건가?”
말 되는 소리다. 나도 알았으면 절대로 안 했다. 이세계고 나발이고 멸망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일이지, 미쳤다고 그걸 찢어서 악신에게 나눠줘? 세상 누가 그딴 짓을 하냐.
아니, 했네. 나는 그 짓을 했다. 알든 모르든, 나는 내 행동에 관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것이 지금 이 상황이었다.
나는 허탈하다는 듯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것 참… 허무한 마무리군요.”
신이라는 권좌를 거머쥐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 션부터 백 년 넘게, 이세계를 좁다 하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파랑새는 내가 키우고 있었고, 나는 내 집 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버렁뱅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파랑새를 헐값에 팔아버렸다.
한 번 떠난 파랑새는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걸로 끝.
후원자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야. 나에게는 별 의미 없지만, 자네에게는 더욱 중요한 사실이 남아있어.”
“그게 무엇입니까.”
“다두가 끝일 가능성이 농후하네.” 라며, 후원자가 푸른색 스태프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 * *
잠깐.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데.
나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니까… 제 전생이 이어지지 않는다고요?”
“아마도.”
“아마도? 얼마나 아마도?”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어, 왜? 왜……. 왜죠?”
“왜냐니. 그만한 가능성을 찢어버렸는데, 설마 자네에게 아무런 악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 생각한 건가?”
“하…….”
뭐야. 갑자기 이제 와서 끝이라고? 나는 허망한 웃음을 지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성을 내고 싶지만, 후원자에게 통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당신 수준의 존재가 하는 말이면, 사실상 확정된 일이나 다름없겠군요. 제가… 영원히 죽는다는 게.”
“확정은 아니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
가능성은 무슨. 은하가 장난이야? 은하보다 거대한 생명체가 ‘아마 이러할 것이다.’라고 말하면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보다 당연히 이루어질 거로 생각하는 게 더 올바르지 않나?
“가능성을 지닌 자가 포기한 적도, 실패한 적도 많지만 찢은 적은 없어. 그걸 타인에게 나누어준 적은 더더욱이나. 그러니 내 진실로 말하는데, 나도 잘 모르겠네.”
와. 미치겠네. 내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자네는 죽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거야.”
“…….”
맞다. 힌트는 있었다. 죽음이 우리를 완성시켜. 탱탱볼이 한 말이 이번 삶의 내 머릿속에 끊임없이 맴돌았다.
죽음이 나를 완성시키면, 그리고 초월자가 넘쳐나는 승천자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괴물을 완성시켜줄 힘이라면, 나에게 말로 하지 못할 이득을 전해준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려버렸지.”
후원자가 키득대며 웃었다. 나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안 그래도 아쉬워 죽겠는데, 자꾸 성질을 긁네.
내가 그에게 투덜댔다.
“어째 기뻐 보이시는군요.”
“아쉽지 않나?”
“뭐를 말씀이시죠?”
“다시는 손에 넣을지 모르는 귀중한 가능성을 타인에게 전해준 게.”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목소리. 마치 원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내게 가능성을 돌려줄 수 있다는 듯이, 나를 시험하듯이 묻는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 습니다만, 버리는 게 맞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왜냐면 저는 첫 번째 삶부터 버려왔으니까요.”
나는 첫 번째 삶의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 여태까지 첫 번째 삶의 내 인적사항을 자세하게 말한 적이 없지.
그야 당연하다. 나는 첫 번째 삶의 내 이름, 가족과 친구. 어디서 살았고, 무엇을 했는지가 단 하나도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첫 번째 삶의 나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지극히 적었다. 이십 대 후반, 전(前) 고등학생, 멸망한 세상에서 독고다이로 10여 년을 생존 등등의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어째서라고 생각하십니까?”
후원자는 답하지 않았다. 그라면 당연히 답을 알겠지만, 내 입으로 답을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나는 킬킬대며 웃으며 머리를 가리켰다.
“꽝! 하고 머리를 박았거든요.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스스로 기억을 잃으려고.”
첫 번째 삶, 지구가 망가지고 초창기의 일이다. 미친 과학자가 또는 미친 과학자가 국가와 협력한 미친 실험이 실패하여 수천만이 넘는 그림자가 장벽을 넘어 지구로 왔고, 나는 초능력자가 되었다.
물질을 투과하는 검은색 괴물이 세상 천지에 넘쳐났고, 사람들을 죽였다. 막 초능력을 각성한 나는 인간을 찢어 죽이는 검은 괴물을 보자마자…….
“도망쳤습니다.”
가족을 버리고, 비명을 뒤로하고, 친구들을 무시하고. 도망치고, 도망쳐서 나 혼자 살아남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어. 옛날에 만화책에서 봤던 말인데,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건 어중간하게 도망쳐서 그래. 완벽하게 도망치면, 그게 바로 낙원이야.
그리하여 나는, 첫 번째 삶의 나로서 가진 모든 것에서 도망쳤다.
방법은 간단하다. 초능력자의 회복력을 믿고, 심호흡하고, 철근 콘크리트를 굳세게 마주 잡고는… 꽝! 하고 박치기를 해서 뇌세포를 죽였다.
꽝! 박치기 한 번에 나의 이름을.
꽝! 박치기 한 번에 가족의 얼굴을.
꽝! 박치기 한 번에 친구들의 모습을.
몇십 번, 몇백 번, 몇천 번을 반복했을까. 정신이 들었을 땐, 기억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내 안면과 박살 난 철근 콘크리트와 H빔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옆에 나뒹구는, 눈물 자국이 가득한 일기.
그렇게 첫 번째 삶의 나는 내 인연은 물론이고 여태까지의 나조차 버렸다.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괴물이 되어버렸다.
밥 먹고, 똥 싸고, 섹스하는. 말초적인 쾌락에 집중하는 짐승이 되었다. 첫 번째 삶에서 나를 죽인 아저씨가 한 말이 맞았다. 나는 너무 미쳤고, 세상이 미쳐 돌아가도 너무 미친놈은 죽어야 했다.
“저는 시작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웠습니다.”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간성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버리고 버려서 얻은 경지가 지금의 나였다.
“주먹으로 흥한 자, 주먹으로 망하니. 버린 걸로 흥한 자, 버린 걸로 망해야 균형이 맞겠지요.”
“음.” 후원자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는 그런 인간이었어.”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하염없이 나를 응시했다.
“…….”
대화가 끊겼다. 후원자는 만족한 모양이고, 나는 뻘쭘하게 서 있었다. 이거, 보통 분위기가 이렇게 되면 알아서 이 공간에서 퇴출당하는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내 표정을 읽었는지 후원자가 말했다.
“어차피 끝났는데 내가 억지로 내보낼 필요가 있나? 원한다면 알아서 나가게. 나는 막지도, 말리지도 않을 터이니.”
그러며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나는 어영부영,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의 친절에 기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르암인은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음…….”
후원자가 턱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이것까지 말해줘도 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괜찮겠지. 이제 큰 고비는 하나 넘겼네.”
“뭐, 시팔?”
욕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네. 그 지랄을 했는데 큰 고비 하나 넘긴 게 다라고? 이놈들은 대체 어디까지 가야 만족하는 거야?
얼굴이 절로 붉어진다. 나는 씩씩대다가 숨을 골랐다. 그래, 나도 끝났는데 너희가 이후에 멸망하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뭐, 됐습니다. 저는 할 만큼 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지들이 알아서 하라죠.”
“그 지경이 돼도 타인을 생각한다니. 자네는 그들을 사랑하는군.”
“생각하는 병신들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존재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후후… 하고, 후원자가 웃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원자의 본체, 우주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푸른 인간이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아 어쩐 표정을 짓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본체를 올려다보자니, 쉘리 반데스의 모습을 빌린 후원자가 물었다.
“할 말은 다 한 것 같군. 이제 떠날 건가?”
“하하…….”
마른 웃음만 나온다. 떠난다니, 어디로?
“…….”
나는 신이 되고 싶었다.
아니, 영원히 살거나 영원히 죽기를 바랐다. 죽는 건 싫으니 영원히 살기 위해 신이라는 허황된 목표를 잡았다.
그리고 이제 내 앞에 남은 길은… 영원히 죽고 살기를 반복하거나 영원히 죽는 일만 남았다.
“틀렸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도 있어.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희박한 확률로 가능성을 재획득할 수 있지 않겠는가?”
희망찬 말 참으로 감사하십니다. 말 뿐인 위안이라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위안은 필요 없었다. 영원히 살 수 없다면, 영원히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후원자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뭘 말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들어 푸른색 쉘리 반데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굳이 이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제게 사정을 설명해주신 것이요.”
“…….”
“당신은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하고 위대한 존재가 분명할 겁니다. 그런 분께서 저따위를 위해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었겠죠.”
은하보다 커다란 존재라면 아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나 따위는, 길가의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겠지.
“제게 친절을 베풀어주려고 어르신의 몸을 빌려 이렇게 하나하나 설명해줄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그 이전에 아이와 탱탱볼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아도 됐고요.”
멍청한 선택지를 골라 끝없이 실패하고 절망하는 나를 보며 낄낄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배려를 해주었고, 아이에게 그리고 탱탱볼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나는 몸을 틀어 후원자의 본체로 향했다.
“때로는 신을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하늘 위에 있는 존재가 우리에게 친절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에 온 가치가 있었군요.”
나는 후원자의 본체로 절을 올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절은 어색했지만, 내 나름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당신께 기도하는 모든 이들을 대표해서, 제가 대신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허!”
후원자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일으켰다.
“나도 감사하네.”
“뭘 말이지요?”
“그 불쌍한 것들에게 자네의 귀중한 가능성을 전해주어서.”
불쌍한 것들이 설마 몬스터를 말하는 건가? 아주 사고방식도 우주적인 스케일을 지니신 분이다.
“아까 말했지. 실패하거나 차라리 포기하고 죽지. 자신의 가능성을 타인에게 전해준 예는 없어. 그 누구도. 하지만 자네의 선택 덕분에 그들도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네.”
몬스터 놈들한테 죽음을 전해준 게 그렇게나 큰일인가? 어쨌든 나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대화는 다 끝났고, 나는 내 선택의 대가를 치르러 가야 했다.
뚜벅.
나는 몸을 돌렸다. 푸른 벽 반대편, 아이와 탱탱볼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백색 땅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후원자가 멀어지는 나를 향해 물어왔다.
“다두여. 어디로 가려는가.”
“어디든지 가겠지요.”
죽으러 가든, 다시 살러 가든. 어디든 가긴 가겠지.
“다두여. 어디까지 가려는가.”
“어딘가든 도착하겠지요.”
죽든 살든. 어디든 도착하긴 도착하겠지.
간략히 대답한 나는 빛을 향해 걸어갔다. 과거의 내가 누군가에게 한 말이 있다. 누군가를 죽였으면, 자신의 죽음도 받아들이라고.
나는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걸었다. 빛의 끝이 설령 나의 영원한 죽음이라 할지라도 도망치는 발걸음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고 멈추지 않고, 똑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