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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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흰[白]
이후의 검단성 전투는 시시할 정도로 끝이 났다. 성벽 위를 점령했을 때 이미 벽 위에서 화로를 흔들어 성벽에 접근 중인 아군을 불러들인 백모 지파의 병사들은 곧바로 검단 성문을 열어 아군을 맞았다.
모진오의 갑옷만 보아도 힘이 솟던 조국의 병사들은 그의 죽음에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아니 흩어졌다 할지라도 후각이 좋은 범족에게 쫓겨 그 끝은 언제나 참살뿐이었다.
검단성의 십만의 인간들은 아비규환에 빠져 수라도로 변했다. 범인들은 마치 푸줏간의 고기를 썰듯 인간들을 잡아 산채로 조각조각 나누었다.
성을 넘는 것이 어려웠지 성안으로 이미 진입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내의 병사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그들은 백성을 학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날 전투에서 사망하여 땅에 묻어놓은 시체들까지 모조리 꺼내었다.
성내에 공간이 없어 화장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수가 묻혀있었다. 겨울이라 썩지도 않았기에 그들은 모조리 땅을 뒤엎어 시체까지 도륙했다.
검단성은 적들의 업화에 새빨갛게 타오르고 조각으로 나뉜 인간들의 시체는 그 연기에 훈제되었다.
인간들은 후퇴조차 하지 못하고 검단성 내에서 몰살당했다.
북문을 열어 후퇴하기도 전에 적들이 모두 들이닥쳐 학살했다. 그들의 지휘자인 모진오의 목이 매달린 창대는 모든 인간의 희망을 단번에 꺾기 충분했으며 극도의 혼란을 가중시키기에 적합했다.
조국의 검단성은 그렇게 완벽하게 염에 점령당했다.
* * *
“진격을 포기하자는 말이오?”
에할가흐가 머리에 핏대를 세우고 말했다. 그름타 또한 안색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네, 더 이상 진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마진츠가 이제 셋밖에 남지 않은 범족의 지휘관을 앞에 두고 당당하게 말했다.
“성에 나와서 이제 평야로 진입하여 적을 더욱 유린하고 약탈하는 일만 남지 않았소. 적이 아무리 많아도 평야에서라면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오.”
에할가흐의 말에 마진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했다.
“이미 우리는 반수 이상의 극심한 손해를 본 상태입니다. 물론 단병 접전에서 우리가 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지 않는다고 피해를 더 입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에할가흐 님의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십만에 가까운 적을 해치우고 한 지역을 완벽하게 약탈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더욱 욕심을 부리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아마 적 원군은 빠르면 하루거리에 있을 터. 더군다나 저희가 성을 불태웠기에 그 연기를 확인한다면 더욱 빠르게 지원을 올 것입니다.”
마진츠가 논리 정연하게 둘을 설득했다. 에할가흐는 아직도 미심쩍어하였으나 그름타는 어느 정도 이야기에 수긍한 듯했다.
하지만 그름타 또한 아직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 못했기에 한껏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기에 그도 에할가흐를 거들어 한마디를 던졌다.
“아직 우리들은 충분한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했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이 성을 나아가 조금 더 안쪽을 공략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마진츠는 대족장인 그름타의 말에 미간을 굽히고 진중히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족장의 말에 바로 반박하는 것은 어려웠다.
마진츠는 결국 꺼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껴둔 말을 내뱉었다.
“적 장수 중에 검단성에서 대치했던 궁술의 명인 같은 자가 몇 더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마진츠의 매서운 지적에 그름타나 에할가흐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도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마진츠는 그 틈을 타서 더욱 둘을 몰아붙였다.
“설혹 그자와 같은 자가 다시없더라 하더라도 현재 상황에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움직여야 할 듯합니다. 적의 병력 또한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필경 오만의 군세는 넘을 듯합니다. 저희가 1군단, 2군단의 병력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다면 저 또한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겠지만 지금 현재의 숫자로는 큰 모험이 될 줄 압니다. 그래도 두 분께서 출진하시겠다 하면 저는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한 바와 같이 위험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마진츠는 최대한 공손히 이야기를 끝냈다.
이미 마진츠의 언변에 둘의 마음이 확실히 기울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모진오과 같은 적장이 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마진츠가 그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그들은 그 활과 가공할 만한 원거리 공격을 기억해 낸 것이었다.
그의 존재는 범족에게 각인되어 이제 반수가 남은 범족의 군사들로 하여금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결국 에할가흐와 그름타는 마진츠의 손을 들어 군사를 회군하기로 결정했다.
지난날 나국에서 약탈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 성내의 물자까지 모조리 약탈하고 검단에 몰린 피난민들의 온전한 물자까지 전부 회수했으니 나국에서 약탈한 것보다 두 배는 족히 넘는 물량이었다.
피해도 컸지만 그만큼 얻은 이익도 크니 더 욕심부리는 것은 어찌 보면 사치일지 몰랐다.
회군이 결정되자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 이는 마진츠였다. 이로써 아버지가 부탁한 것까지 훌륭하게 성사해 낸 것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겨울. 검단성 이상으로 적을 노린다면 이 원정이 얼마나 더 시간을 끌게 될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단기전이 되긴 하겠지만 그런 단기전도 마진츠나 이소호칸에게는 꺼림칙할 뿐이었다. 원정군의 배급을 백모 지파가 전부 부담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큰 압박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마진츠는 최대의 이익을 볼 수 있는 수를 선택했고 그것은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 * *
11월 28일 저녁, 검단성을 점령한 지 하루 만에 범족들은 성을 철저히 약탈하고 그 물품들을 챙겨 서둘러 물러났다.
29일 검단성의 연기를 보고 나국과 조국이 연합한 칠만 육천의 보병대가 서둘러 검단성에 도착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직도 뻘겋게 열기를 내뿜고 있는 불타버린 잔해 속의 숯덩이들과 붉게 물든 성내 거리, 그리고 산처럼 쌓인 인간의 내장들이었다.
그 가운데 먼저 기마대를 이끌고 당도했을 모진오의 수급이 놓여있었다.
이날 인간의 병력들은 완전히 몰락한 검단성을 보고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으며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뼈에 사무치는 잔혹한 광경을 보면서 모두 생각하는 것은 범족을 이길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성내에 십만 가까이 있었던 병력과 백성 중에 살아남은 자는 약 300여 명. 우물 속과 똥간 및 숨겨진 동굴 창고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연맹한 자들이었다.
살아남은 그들도 반수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상태였다.
그들이 받은 충격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살아남아 입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다들 입을 맞추어 말했다.
그곳은 수라도(修羅道), 마치 지옥과 같았다라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지원군은 차마 하루거리에 있는 적을 쫓을 생각도 가질 수 없었다. 불타고 있는 검단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렇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장면일 것이 분명하리라…….
* * *
회색빛 하늘. 먹구름이 만연하게 끼어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날이 어두컴컴했다. 거기에 산발적으로 하얀 빛이 번뜩이며 눈을 어지럽혔다.
날은 시리도록 추운데 눈이 내리지는 않고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져 땅을 적시다가 이내 굵은 물줄기로 변모하여 갈대같이 내렸다.
그렇게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데도 검은색 옷의 행렬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흑의(黑衣), 행렬이 입은 옷은 단 한 사람도 색이 있거나 밝지 않았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단색의 검정색 옷을 입었다.
옷을 저미는 저고리조차 머리를 여미는 비녀조차 검고 검었다. 모두 비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시린 비가 흑의를 적시며 검은색 옷을 더욱 검게 만들었다. 행렬의 끝 선두의 한 사람만이 우산에 몸을 비로부터 피하고 있는 것이 묘했다.
빗속에 가려 명확히 보이지 않았으나 행렬이 목표로 하여 가고 있는 것은 궁궐이었다. 그들은 궁궐로 향해 닦여진 도로를 하염없이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매서운 비를 온몸으로 맞아가며 걸었다. 처량하리만큼 측은한 속도였다.
그들이 궁궐에 당도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붉은색 도포에 황금색 자수로 몸을 두르고 있는 자가 그 빗속에서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옷은 금세 젖어 축 늘어졌고 달림에 흙탕물이 분홍빛 버선을 물들였다. 그는 신발조차 신지 않았다.
그는 달려 나와 우산으로 몸을 보호받는 선두의 여인에게 다가갔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인의 품속에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가 검정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그 여인의 두 손 위에는 붉은색 상자가 얹어져 있었는데 궐에서 뛰어나온 자는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약 백 보 밖에서 서서히 달음질을 멈추며 고요히 검은 행렬을 주시했다.
수십 명이 서둘러 황금 도포를 입은 자를 쫓아 나왔다. 그들은 엄청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황금 도포를 입은 자에게 달려가 머리에 우산을 씌웠다.
그는 곁에 우산을 덮으러 온 자를 매몰차게 손으로 쳐내며 물렸다. 시녀 같은 자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검은색 장포를 덮어주었다.
그는 우산은 거절했지만 그것을 입혀주는 시녀를 고개 돌려 흘깃 바라보고는 우산처럼 거절하지 않고 고요히 장포를 걸쳤다.
빗속에서 행렬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결국 검은 행렬은 자신을 맞아주러 나온 궐의 사람들 바로 앞까지 도달하고서야 그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 앞에서 선두의 여인은 검은 장포를 몸에 걸친 자에게 무릎을 꿇어 울며 상자를 건네었다. 처절하고 처절한 여인의 울부짖음이었다.
때마침 번개를 대동한 천둥이 번뜩이며 여인의 울음소리를 더욱 크게 증폭시켰다.
검은 장포의 자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받았다. 상자 위로 우산이 씌워졌다. 궐에 우산을 들고 온 자가 서둘러 여인의 몸 위로 우산을 펼쳐 비를 막았다.
시린 비에 몸의 온도가 떨어져 추위에 손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손의 떨림은 단순한 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왼손으로 상자 아래를 받치고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상자의 덮개를 열었다.
그 속에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덮개를 떨어트렸다. 비어있는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다. 터져 나오는 통한의 울부짖음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입에서는 비참하고도 비통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여인과 같이 무릎이 꺾였다. 절로 허리가 굽어지며 상자 속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떨어졌다. 상자 속으로 한 방울, 두 방울 거침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여인의 하늘을 찌르는 높은 울음과 중년을 지난 노인의 낮은 울음소리가 이곳에 서있는 모두의 마음을 울렸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비탄에 절어 울었다. 시린 비가 마치 화살처럼 그들의 몸에 꽂혀 몸을 피로 적시는 것 같았다.
그 울음소리에 여인의 품 안에 있던 빨간 갓난아이가 눈을 뜨지도 못한 채로 입을 벌리며 울었다.
며칠 전만 해도 앞의 울고 있는 장포의 남자에게서 축복을 받은 아이였다.
아들 잃은 아비의 울음.
지아비를 잃은 여인의 울음.
아비를 잃은 아이의 울음.
군주를 잃은 백성의 울음.
모든 울음들이 한데 모여 빗속에서 메아리쳤다.
조국은 아들을 잃었으며 지아비를 잃었고 아비를 잃었으며 군주를 잃었다.
찬비를 쏟아내는 어두운 먹구름이 조국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했다.
산이여, 바다여, 강이여, 숲이여,
무정하고도 무정한 하늘이여,
우리를 원망하는 소리에
그 생명 덧없이 스러지누나.
============================ 작품 후기 ============================
2014-08-09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