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eless martial arts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296
295화 한중(5)
갑작스러운 사과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검군이 누구던가.
하나같이 고수 아닌 이가 없다는 무황성 오천 무사들 중에서도 정점에 선 이가 아니던가.
신공절학 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아니면 스승을 잘 만나서 출세한 이들과 다르게 하급 무사부터 그 자리에 올라온, 그야말로 무협지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자존심을 꺾고 사과부터 해 온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다.
어쩔 수 있겠나.
으른이 먼저 사과를 했으니 받아 줘야지.
정파 무림의 젊은 영도자로서 말이야.
“크흠,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감정이 상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저도 막 나가기도 했고요.”
“역시 마음에 들어.”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기왕 사과한 김에 하나 부탁해도 되나?”
“한중상련을 넘기라는 부탁만 아니면요.”
“설마?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네.”
검군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산서상방의 사정을 좀 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네.”
“……사정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몰라서 하는 소린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가?”
“말씀을 해 주셔야 알죠.”
“정말 모르고 있군.”
“거참, 귓구멍에 판관필을 박으셨나……. 진짜 모른다니까요?”
“…….”
잠시 침묵하던 검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천상단과 한중상련이 산서상방을 견제하고 있네. 지금이야 버티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더라고.”
“예?”
처음 듣는 이야기에 살짝 놀랐으나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럴 법도 했다.
어찌 되었든 우리 쪽의 최대 경쟁자는 휘상과 산서상방이었으니까.
묘향과 양령이라는 두 여성 CEO의 기질상 충분히 상대를 말려 죽이려 들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녀들을 막을 이유는 없다.
경쟁자를 제거하는 건 반사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닌가.
더군다나 독과점법도 없는 무림 세계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검군의 설명은 나를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다.
“산서상방이 무너지면 장성도 함께 무너지네.”
“…….”
“산서의 상인들은 천 년도 전부터 장성에 물건을 대는 군상의 역할을 해 왔지.”
“…….”
“한데 최근 들어 군납을 하는 물품의 가격이 최소 배는 올랐더군.”
“……왜 그렇습니까?”
“왜긴 왜인가. 한중에서 산서로 들어가는 물자의 흐름을 끊었으니까 그렇지.”
“…….”
설마 이 정도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북천이 중원의 전통적인 중심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추운 지방이다.
식량이고 옷감이고 풍족하게 나는 땅은 아니다.
그런 와중에 남쪽에서 올라가는 물자의 흐름을 끊었으니 가격이 배로 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군납하는 상인을 바꾸는 것도 문제다.
어지간한 규모로는 감히 손도 대기 힘든 게 군납이다.
필시 휘상이나 한중상련과 거래해야 하는데 무황성 입장에서는 어느 쪽도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휘상은 사자맹이, 한중상련은 우리 전왕문이 가지고 있었으니깐 말이다.
“……상의를 한번 해 봐야겠습니다.”
“고맙네.”
“아직 안 정해졌으니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비록 제가 주인이라도 엄연히 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있는 거니까요. 만약 그들이 반대한다면 저도 도리가 없습니다.”
이미 묘향에게 맡긴 살림이다. 그녀가 반대한다면 나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부탁하는 처지가 아닌가. 고려만 해 줘도 고마울 따름이지.”
“뭐, 그러시다면야…….”
그렇게 야밤의 회담이 종료되었다.
* * *
사흘 뒤.
나는 떠나는 검군과 주효용을 배웅하기 위해 한중 바깥으로 나왔다.
“잘 쉬다 가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어지간하면 오지 마쇼. 귀찮으니까.”
“으핫핫핫, 이러니까 더 오고 싶군. 내 한가해지면 다시 들르겠네.”
“저 역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봤자 저는 여기 없을 겁니다. 구룡성에 가 있을 테니까요.”
“그럼 사천으로 찾아가면 되는 일이 아닌가.”
“겸사겸사 구룡성도 볼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나 다름없겠습니다.”
“…….”
두 사람은 가벼운 걸음으로 한중을 떠났다.
산서상방과 한중상련이 MOU를 체결했으니 걱정거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한중상련은 중원 서부와 남부에서 나는 물자들에 약간의 수수료만 붙여 공급할 것이고 대신 산서상방은 가죽과 인삼 같은 북천의 귀한 특산물을 보내 주기로 했다.
나름 공평한 결론이었지만, 양령은 끝까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주님의 뜻을 따르긴 하지만…… 아쉽네요. 한 십 년만 밀어붙이면 산서상방을 통째로 가질 수 있었을 텐데요.’
정말 독한 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재준이가 하루라도 빨리 이 모습을 봐야 하는데…….’
회담의 성과는 또 있었다.
조속한 시일 내로 무황성과 구룡성 간에 불가침 조약을 맺기로 한 것이다.
자세한 건 양측의 군사끼리 만나 협의를 해 봐야겠지만, 무황성과 사자맹과의 동맹을 막은 것만 해도 작은 성과는 아닐 터다.
떠나가는 두 사람이 내 손을 붙잡았다.
“호의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오 공녀와 혼인할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게나. 내 언제든 밀어주겠네.”
“…….”
끝까지 두꺼비를 내게 붙이려는 검군이었다.
* * *
그 뒤로 열흘을 더 한중에 머물렀다.
“위생이 이렇게 개판이니까 장사가 안되지?! 그런데도 요리 가짓수를 늘리겠다고유? 가격도 올리고? 그럼 망하자는 소리예유!”
“아, 아니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한 것인데…….”
“내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정상화해 놓지 않으면 영업 정지 시킬 테니 그리 알아유. 알았어유?!”
“허억! 제발 한 번만 봐주시오! 돈향루가 문을 닫으면 박룡문은 굶어 죽소이다.”
“시끄러워유! 제대로 하지 않으면 치안대고 뭐고 밥줄을 다 끊어 놓을 줄 알아유!”
이렇듯 북궁장환의 돈향루를 기습 방문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했고.
“와아아! 당주님 천세!”
“당주님 멋있습니다!”
“저와 혼인해 주세요!”
성 밖에 사는 빈민들을 위해 구휼미를 풀기도 했으며.
“여기 정말 좋네요!”
“…….”
적화란의 끈질긴 권유에 근처 계곡으로 외유도 나왔다.
“안 그래도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꼭 이렇게 나와야겠냐?”
“내일 출발하니까 이렇게 나오죠. 이때 아니면 언제 와 보겠어요?”
“계곡은 구룡성 근처에도 널렸는데…….”
첨벙!
“와! 시원해라!”
계곡에 발을 담근 적화란이 밝게 웃었다.
‘하긴…….’
저 어린 것이 얼마나 놀고 싶겠는가.
평생을 적룡당에 갇혀 지냈을 테니 가끔 나와서 놀고 싶겠…….
“어푸! 어푸! 가가! 살려 주세요!”
“에라이! 수영도 못하면서 왜 들어간 거야?”
그렇게 곧장 물에 들어가려던 찰나,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떠올라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그물을 가지고 있는데 뭐 하러 몸을 적신단 말인가.
그냥 던져서 걷어 올리면 되지.
촤확!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그물이 적화란의 몸을 덮은 걸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끌어올렸다.
“쳇.”
물에 흠뻑 젖은 적화란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뭐야? 뭐가 또 불만이야?”
“들어와서 직접 구해 주셨어야죠! 어떻게 여인을 그물로 끌어 올릴 수가 있어요?!”
“황제가 애지중지했다는 보물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면 나름 영광스러운 일 아니겠냐?”
“누가 진짜 수영을 못해서 빠진 줄 알아요? 이래 봬도 나름 고수라고요!”
“…….”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대책이 없는 계집애다.
파드득.
고개를 젓고 있으니 적화란과 같이 딸려 온 물고기들이 몸부림치는 게 보였다.
“우리 이거 구워 먹을까?”
“지금 물고기 구워 먹을 때예요?!”
“그럼?”
“저를 위로해 주셔야죠.”
“……어떻게?”
“무서웠냐고 물으며 포옥 안아 주시든가 아니면 옷을 벗어서 닦아 주시든가…… 뭐…… 입도 맞추고…… 겸사겸사 거사도 치르고…….”
“술도 있겠다, 경치도 좋겠다. 몇 마리 더 잡아서 한잔하는 거 어때?”
헛소리를 무시하며 묻자 그녀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안 먹어요!”
“나중에 한 입 달라고 해도 안 준다?”
“안 먹는다니까요?! 가가는 진짜 바보 멍청이야!”
“구우면 먹을 거면서…….”
그녀를 무시하고 칠감도를 펼쳤다.
‘저쪽에 많군.’
촤확!
황실의 보물인 천라포망이 어업용 그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타닥타닥.
강한 화력을 내며 불타는 모닥불 위로 나무 꼬챙이에 꽂힌 민물고기들이 나란히 세워졌다.
“츄릅.”
적화란이 한 마리 야생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며 먹잇감을 골랐다.
“안 먹을 거라면서?”
손을 내밀던 적화란이 흠칫하며 멈췄다.
“먹어. 이럴 줄 알고 네 것까지 잡았어.”
“헤헤, 역시 가가는 배려심이 있으셔요.”
적화란이 신나 하며 술병을 꺼냈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아그작.
바삭한 물고기의 껍질과 잔가시, 살에서 나오는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소금조차 뿌리지 않아 결코 맛있다고 할 순 없었지만, 이렇게 계곡 옆에 앉아서 먹으니 천하 진미가 따로 없었다.
“좋네요.”
“그러게.”
목숨을 걸고 혈종주와 싸운 게 어제 같은데 이렇게 평화롭다니.
무림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세계다.
‘마음도 커지게 하고…….’
현대 의학으로도 불가능한 수술 없는 확장이 가능하다니 말이다.
“어멋? 가가, 지금 어딜 보시는 거예요?”
시선을 느꼈는지 적화란이 음흉하게 웃으며 마음을 내밀었다.
풍유환을 먹은 게 걸렸을 때만 해도 나라 잃은 사람처럼 울었던 주제에 이제는 자랑스러운가 보다.
“뱃살 삐져나왔다.”
“진짜 미워 죽겠어!”
“크크크크.”
배도 부르겠다. 술도 한잔했겠다. 노곤함이 몰려와 바닥에 누웠다.
쏴아아.
물이 흘러 내려가는 소리에 절로 마음이 평안해진다.
‘좋다.’
그렇게 자연을 즐기고 있는데, 적화란이 은근슬쩍 옆에 눕더니 내 팔 위에 자기 머리를 얹었다.
“저리 안 꺼져?”
“좋다. 헤헤헤.”
“어휴,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그녀가 뒤통수로 팔근육을 탐색하려는 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잠시 평화를 즐기고 있던 그때 적화란이 뜬금없이 물었다.
“가가, 그거 알아요?”
“그거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저…… 묘향 언니에게 허락받았어요.”
“허락? 무슨 허락?”
“가가와 이어져도 좋다는 허락이요.”
“뭣?!”
깜짝 놀라 되묻자 그녀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허락받은 지는 조금 됐어요. 가가가 묘향 언니와 혼인하기 전에 받았으니까요.”
심지어 혼인식 전에 허락했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건…… 가가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
“그런데 이젠 더는 못 참겠어요. 다 가가 탓이에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가가는 너무 튼튼해요.”
당황하여 가만히 있으니 적화란이 몸을 밀착시키며 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입맞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피하면 진짜 울 것 같았거든.
문제는.
퍽!
얘가 키스란 걸 해 본 적이 없다는 거다.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도 본인의 주둥이를 내 주둥이에 때려 박았을 뿐이지.
“푸하. 하아…… 하아…….”
지도 아픈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이, 이제 입도 맞췄으니까 채, 책임져요.”
정말 마지막 피니시 멘트까지 완벽했다.
정말 엉뚱한 계집애다.
등천각 시절에도, 적룡당의 금지옥엽인 주제에 아무것도 없는 길거리 태생인 나를 지극정성으로 챙겨 줬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렇게나 거절당했으면서 몇 년이나 쫓아다니질 않나, 내가 계속 거절했던 이유인 마음까지 키워 오질 않나.
더군다나 곤륜산맥에서는 목숨까지 내놓고 나를 기다리기까지 했고.
사실, 지금까지는 그녀를 내 동반자로 삼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철딱서니 없는 동생이라고만 생각했지.
들이대는 것도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리면 그만둘 줄 알았다.
지금이야 내가 전룡당주지, 당시에는 외당의 일개 조장이었으니 신분상으로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인 나를 백 번도 훨씬 넘게 찍었다.
덕분에 내 마음은.
“그래, 책임지마.”
그녀 쪽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요?! 채, 책임지신다고 했어요!”
“그래.”
“꺄아아악!”
행복에 차 소리를 지르며 뛰는 그녀의 모습이 기나긴 이번 여정의 끝을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