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2
62화
‘성운.’
이미지를 떠올리자 귓가에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흑옥의 힘과 뒤섞인 시푸른 별구름이 이해운의 머리 위로 내려앉은 순간.
꽈앙!
물리적으로 떠밀린 충격에 하반신이 찌릿 거렸다.
중심을 잡으려 뻗은 뒷발 아래, 긁힌 흙들이 수북이 쌓였다.
가드를 올려 곧 다가올 후폭풍을 대비하고, 후욱. 한차례 뜨거운 바람이 불었을 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짜 야비하네. 거긴 SS급. 나는 S급. 당신은 도와줄 사람만 삼천 명, 나는 한 명. 너무 불리한 거 아닌가?”
이해운에게 쏘아 보낸 공격을 쳐낸 건 나에게도 익숙한 얼굴.
서이본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안면을 깔아보며 툭툭 찢어진 옷자락을 털어냈다.
평범한 사복 속에 장비했던 무저갱의 사슬 갑옷이 투박한 빛을 발했다.
사실, 이 사슬 갑옷은 철제 장비 중에서도 중.
잘 쳐준다 하더라도 중상급의 성능을 발휘하는 장비였기 때문에, 암 속성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크게 쓸모는 없었다.
더 좋은 걸 쓸 마음이었다면 화랑 창고에서 몇백 배는 더 희귀하고 강력한 갑옷들을 꺼내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들을 다 포기한 채 이 사슬 갑옷을 다시 껴입은 이유는 한 가지.
‘철제라서.’
염동력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물질.
‘머큐리아의 눈물’을 덧바를 수 있는 갑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거 발라도 되는 거 맞아요……?”」
포탈 시작 전, 회의를 나누던 때.
구서복의 질겁한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치지지직. 끓는 소리를 내며 탄 연기가 피어오르는 본인의 판금 갑옷을 보며 그는 연신 안절부절못했다.
“이거 진짜 제 몇 달치 소중한 월급 차곡차곡 모아서 산 갑옷이거든요. 내구성 떨어지면 수리비도 엄청나다구요, 아가씨. 아가씨? 제 말 듣고 있는 거 맞죠? 예?”
“아, 진짜!”
이게 얼마나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건데.
윗입술을 말아 올리며 성난 표정을 짓자 그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흉포한 새벽의 플레이트 아머.
구서복의 등급에 비해 꽤 번듯한 장비인 것은 확실했으나.
“염동력 붙들려서 꼼짝도 못 하고 이미 처맞고 저리 처맞고 하든가, 그럼.”
중얼거리는 말투에 기가 죽은 강아지처럼 얌전히 꿇어앉은 그를 보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옆에서 과학 실험을 지켜보듯 흥미롭게 바라보던 주서윤도 말을 얹었다.
“머큐리아의 눈물이 자기장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어. 위험한 독성 물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냥 액체 상태로 있을 때는 쓸모없는 독극물 맞죠, 뭐. 외에 다른 갑옷에는 절대 쓰면 안 돼요.”
머큐리아의 눈물은 모든 것을 산화시키지만 유일하게 철제에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쓰임을 아는 사람들은 아마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인챈트가 먹히질 않으니 뭘 발라볼 생각이나 했겠냐고.’
그렇다.
철제 갑옷들은 다른 갑옷들보다 단단한 방어력을 자랑해 탱커 역할을 하는 각성자들에게 극성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부수적인 효과를 노리는 각성자들에겐 무용지물인 장비와도 같았다.
재료 수급이 부족해 비싸기는 또 얼마나 비싸.
나 같이 컨텐츠 부족 망겜 소리 운운하던 애들이나 이것저것 해봤던 거지.
시답지 않은 효과를 알아보겠다고 얼마나 많은 장비들을 파괴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지금으로선 그 경험들이 참 다행으로 여겨졌지만…….
“근데 모아, 너는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가끔 보면 정말 기발해.”
화들짝 놀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윤의 입장으론 별거 아닌 칭찬의 물음이었겠지만, 나는 괜히 뚝딱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충 포탈 돌다 알아냈다.
머큐리아를 터트렸는데 그 체액이 내 갑옷에 튀었다, 등등.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과정 같은 거창한 변명이었다.
말을 마쳤을 때야 그냥 학교에서 배웠다고 하면 될 걸…… 하는 단순한 변명이 떠올라 흔들리는 동공을 숨겼다.
다행히도 주서윤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나만 찔렸을 뿐이지.’
바짝 마른 침을 넘겼다.
어쨌든 적어도, 주서윤과 구서복은 나처럼 염동력의 제한을 받지 않을 것이다.
쉽게는 당하지 않겠다.
네가 날 알고 있다고 여기듯.
‘나도 네 속셈을 알고 있다고.’
내 의사를 극대화시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탁탁.
서이본이 각궁의 활대 끝을 매만졌다.
상하진 않았는지 확인하듯 들여다보던 눈이 곧장 내게로 향했다.
“지원군을 부르는 건 어때요? 이대로 가면 너무 뻔하지 않나, 이모아가 진다는 게.”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하늘은 이미 채본 각성자들과 화랑 길드원들이 엉켜 어지러웠고, 주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끔 눈에 띄는 주서윤이나 도 학은 다른 채본 팀원들이 이쪽을 향해 몰려오지 않게 막아서는 것만으로도 분주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놓는 도발.
한 번 눈을 굴린 서이본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오빠는 어디 있고?”
“…….”
“평생 지켜줄 것처럼 굴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명백한 목표물을 설정한 그녀가 귀기 어린 사냥꾼의 눈빛을 하곤 말했다.
“원한다면 채본으로 와요. 지금이라도 받아주죠.”
언제 쏘아질지 모르는 화살촉을 바라보며 작게 조소했다.
“요즘도 스카웃 제의를 협박으로 하세요?”
그녀가 명함을 내밀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이겸이 그 사이를 막아주었던 것도.
내가 눈앞에서 그 명함을.
‘태워버렸던 것도.’
서이본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필요하다면요.”
“맘에도 없는 소리만 하시네.”
투웅.
그녀의 손을 떠난 현이 거세게 진동했다.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의 궤도를 작은 마나 뭉치로 비틀었다.
송곳처럼 솟아오르는 땅을 [공중 뒤돌아 차기]로 피하고, 뒤이어 쏜살같이 다가오는 화살 역시 아슬아슬하게 쳐냈다.
아무리 수많은 공격이 쏟아진다 하더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특히나 서이본이 가진 사수 스킬들은 범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계수만 알고 있다면 피하기만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공격할 타이밍 잡기가 어렵다는 거지.’
후두둑.
내가 피한 자리에 가시처럼 꽂히는 깃대를 보며 척척한 뒷목을 쓸었다.
잠시라도 멈칫거리는 순간 저 화살들이 내 전신에 박히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화살은 무한하지 않다.’
서이본은 아주 찰나라도 다시 화살을 채우기 위한 차징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빈틈.
바로.
‘지금처럼.’
그녀가 활대에서 손을 뗀 순간, [마나 파도]를 펼치며 돌진했다.
확실한 데미지는 주지 못하더라도, 밀도 있는 방어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것이 1차 적인 목표였다.
그래야 뭐라도 쥐고 흔들 기회라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
파동에 쓸려 내려가듯 유유히 뒷걸음질 치던 이해운의 손이 허공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드드드드드.
땅이 조금씩 흔들리고…….
‘그림자.’
빽빽한 송곳 같은 그림자가 등 뒤로 커다랗게 졌다.
지표면에 단단히 박혔던 화살이, 모조리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쐐애애액―!
오로지 나를 향해 날아드는 수백 개의 화살을 피해 달렸다.
“화우!”
하늘에서 빗발치는 불비에 잠시 꺾인 촉이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것 같았지만, 땅에 박힌 화살들은 다시 부들부들 떨며 대가리를 들어 올렸다.
유수처럼 창공에 맴도는 마나의 흐름을 틀어 궤도를 변경해도 잠시뿐.
이해운이 조종하는 화살은 표적을 꿰뚫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것처럼 나를 뒤쫓았다.
게다가.
‘내가 잠시 빡대가리였다.’
화우의 불길이 옮겨 활활 타오르는 불화살을 보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도망치기만 하면 끝도 없어.’
화살에, 돌에, 흙에…….
온갖 솟구치는 것들을 피하느라 광대처럼 쏘다니는 나와 다르게, 이해운과 서이본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유유히 공격을 퍼부었다.
그것만으로도 어떤 전력 차가 나는지 선명히 파악할 수 있었다.
비린 맛이 나도록 입 안쪽의 연한 살을 아득 깨물었다.
‘신성 스킬만 제대로 쓸 수 있었으면.’
성운이 아무리 화염계 상위 스킬이고, 강력한 힘을 지녔더라도 신성 스킬을 사용하는 감각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존재했다.
적어도 꺾겠다 마음먹은 상대에게 농락당하듯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89%.’
딱 1%만 더 채워졌더라도.
“내가 그렇게 나쁘게 산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그냥 좀 채워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예!”
누구에게 건네는지도 모를 원망을 소리치며 땅 위로 몸을 부딪쳤다.
물론, 나쁘게 안 살았다는 말을 정말 검증하겠다고 달려든다면.
‘나도 확신이 없긴 한데.’
어쨌든 투덜대는 것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나는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부러뜨려도 다시 기어오르고.
불로 태운다 하더라도 화살촉 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염동력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완전한 물질 소멸.’
그러니까…….
‘이런 거.’
지팡이 끝으로 고이는 새빨간 홍염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보석 같은 빛살을 뭉쳐 쥐었다.
[광염].그리고 [빛무리].
“하이브리드 가보자고.”
콰아아앙!
손바닥을 맞부딪치자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두개골을 뒤흔들었다.
빛이 쏟아져 잠시 하얗게 날아간 배경이 서서히 상을 되찾았다.
후두둑. 폭발을 이기지 못하고 가루가 된 화살들이 연기처럼 검게 흩어졌다.
원래 마나 슬롯에서 융합돼 사용하던 [빛의 메아리]보다는 분명히 떨어지는 공격력이었지만, 확실히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다만.
‘우웨에엑.’
혼재되는 두 속성을 각각 사용하느라 뱃속이 꼬이는 기분을 감당해야 했을 뿐.
목구멍을 치미는 신물을 참아내며 뛰어올랐다.
아직도 활대를 쥐고 나를 조준하고 있는 서이본에게 돌진했다.
잠깐의 틈을 벌렸으면 됐다.
공격권은 이제.
‘나에게 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시푸른 마력의 회오리가 모여들었다.
귀 옆으로 흑옥의 파동이 둥, 둥 울렸다.
쑥쑥 마나가 빨려 나가는 감각과, 수식을 쌓아 올리듯 견고해지는 문자들이 손끝으로 퍼져나간다.
내가 원하는 만큼.
그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게.
“어디 니들도 한 번 막아 보시던가.”
하늘을 가린 황금빛 주문진 아래, 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큭……!”
어깨에 운석을 직격으로 맞은 서이본이 팔을 감싸 쥐며 뛰어올랐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빛무리]를 쏘아 보낸 뒤, 조금 더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확인했다.
이제 웬만큼 거리는 벌어졌다.
목표는 처음부터.
‘니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인영을 좇았다.
이해운은 무너진 건물 잔해를 들어 올려 가볍게 운석들을 쳐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다.
여전히 나긋한 웃음.
어떤 것도 위협적이지 않다는 듯, 평온한 손길.
그녀는 아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만심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탁탁탁탁!
나는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서복!!!”
외치자, 알겠다는 듯이 체념한 마나가 그의 방향으로 기운다.
“레인지(Range).”
범위 최대로.
손을 떠난 자그마한 정육면체가 순식간에 부피를 부풀려 이해운을 가뒀다.
진공에 갇힌 그녀의 염동력이 응집되어 소멸한다.
쿠웅.
허공에 떠 있던 자재가 비스듬히 이해운의 머리를 가리고.
“이름 내놔, 이 새끼야.”
동요한 얼굴 위로 빛을 쏟아부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