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30
신필천하(神筆天下) 130화
순간 막사 내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서로가 불편한 침묵을 피부로 느끼며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진양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많은 백성들이 기나긴 내전으로 지치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또한 몽골족에 대한 불안감도 있으니 나라가 안팎으로 위기이옵니다.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스스로 황제의 신하임을 인정하시고 이만 물러가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지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야말로 대범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바로 도연이었다.
그는 진양이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주체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체는 진양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좋은 말이오, 참으로 좋은 말이오. 예로부터 영웅은 시대를 잘 알아야 한다고 했소. 그런 의미로 보면 과연 양 장문은 이 시대의 영웅이오. 나 역시 양 장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소. 지금 이 나라는 안팎으로 위기를 겪고 있다는 그 생각 말이오.”
주체는 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자, 다시 앉아서 이야기 나눕시다. 다들 앉으시오.”
모두가 다시 탁자로 돌아와 앉자 주체는 병사들을 시켜 진양이 쓴 글씨를 막사 한옆에 걸어두도록 했다. 그러고는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던 말을 계속하겠소. 이 나라가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다 무엇 때문이겠소? 양 장문의 말씀처럼 황제 곁에 현명한 신하가 없어서 그렇소이다. 충신은 사라지고, 간신만이 들끓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설 리가 있겠소? 이에 나는 그 간신들을 척결하려는 것이오. 해서 나는 정난군을 일으켰다오.”
“하오나…….”
진양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주체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내 말을 마저 하겠소. 오늘 그대는 나에게 같은 글자를 두고 서로 뜻이 달랐다고 했는데, 나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소. 뜻은 같으나 방법이 다르다고 말이오. 내 진정 이 나라의 충신이 되기 위해서라도 정난을 멈출 수는 없소이다.”
주체의 마지막 말투와 억양은 굉장히 단호하고 명백했다.
진양은 주체를 도저히 말로는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심각하게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무능함을 탓했다.
‘내가 아직도 멀었구나. 글자로 뜻을 전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왕야를 설득하지 못한 것이다.’
진양은 결국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왕야의 뜻, 잘 알겠습니다.”
“그대가 알아주었다니 기쁘오. 어떠시오, 양 장문도 나와 함께 대업을 이루지 않겠소? 그대와 같이 현명한 무인이 나를 도와준다면 분명 내게 큰 힘이 될 것이오.”
하지만 진양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불초한 제가 어찌 왕야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저는 왕야께서 말씀하셨듯이 서로 방법이 다르므로 도와드리기가 힘들 것입니다.”
말투는 조곤조곤했지만, 결론적으로 주체의 뜻에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에 주체의 표정이 짐짓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술잔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하면 그대는 나의 일을 방해할 생각이오?”
진양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제가 생각하는 도리를 따를 뿐입니다. 그 행동이 왕야께 방해가 될지 득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요.”
주체는 가만히 진양을 노려보다가 이내 파안대소했다.
“하하하하! 좋소! 좋소이다! 과연 양 장문의 기개는 천하영웅이라 할 만하오! 자, 드시오!”
주체는 다시 술병을 들어 진양의 잔을 채워주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진양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체는 막사 밖까지 나와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오늘 이렇게 융숭한 대우를 해주셔서 황공하옵니다.”
“하하. 별말을. 나 역시 그대들을 만나서 반가웠소. 다음에 인연이 되면 또 보도록 합시다. 잘 살펴가시오.”
“예, 전하.”
진양 일행이 한차례 읍을 하고는 물러가자, 주체 역시 막사로 돌아왔다.
그가 막 들어서자 우측 한편에 진양이 쓰고 간 ‘충신(忠臣)’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마침 뒤따라 들어오던 천의교 무인 중 갈지첨이 말했다.
“왕야, 저들을 이대로 보내셔서는 안 됩니다. 훗날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체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가 술잔에 술을 채우는 동안 파천일왕 마천강도 갈지첨의 의견을 거들었다.
“저 역시 삼왕과 같은 생각입니다. 저들을 그냥 보내시면 분명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신, 곽연도 같은 생각입니다.”
마지막엔 곽연까지 나서서 말했다.
주체가 술잔을 매만지며 도연을 돌아보았다.
“흐음. 군사는 어찌 생각하시오?”
도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인재를 아끼고 되도록 아군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한데 오늘 진양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아군이 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조아리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적어도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흐음.”
주체는 다시 한번 침음을 흘리더니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지금 이 순간 그로서는 큰 결단을 앞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결단이 앞으로의 행동에서도 기준이 될 수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대리석 위로 던졌다.
쨍그랑!
술잔이 산산조각 나면서 깨졌다.
그가 뱃속부터 올라오는 취기를 느끼며 단호히 말했다.
“쳐라.”
“명 받들겠습니다!”
천의교 무인들과 곽연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대답하며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주체는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옆에 걸려 있는 ‘충신’이라는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이 글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진양이 무슨 뜻에서 그 글자를 썼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부정하려고 해도 그의 필체에서 그 뜻이 전달되어 왔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순간, 그가 기합성을 터뜨리며 검을 휘두르자 큼직하게 적혔던 ‘충신’이라는 글자가 정확히 양분되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 너저분한 것을 당장 치워라.”
그의 명에 병사들 몇이 신속히 다가와 찢어진 천을 수거해 갔다.
주체가 바닥에 칼을 내리꽂으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든 내 뜻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앞으로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십 족을 멸하고 가문을 덩굴째 뽑아 버리는 한이 있어도!”
훗날 그는 황제로 등극한 후, 자신의 뜻을 거부한 방효유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정말로 십 족을 멸한다. 그 당시 무고하게 죽은 자들만 무려 팔백칠십여 명에 달했다.
또한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경청(景淸)을 죽이고, 그의 가문의 묘소를 파헤쳤으며 고향마저 멸적해 버렸다. 당시 경청의 고향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경청과 조금이라도 관련있는 자들은 모두 잡아 죽였다고 하니, 그 잔인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지경이리라.
이렇듯 주체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자가 있으면 매우 무서운 형벌을 가했는데, 어쩌면 이때부터 이미 그러한 비정함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2. 대군과 맞서다
진양 일행이 막 연왕의 진영을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한데 갑자기 뒤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섰다.
“양 장문! 잠시 기다려 주시오!”
진양 일행이 고개를 돌려 보니 천의교 무인들과 곽연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주변 병사들의 동태도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서요평이 침을 탁 뱉더니 말했다.
“에잇, 퉷! 이놈들이 우리를 그냥 보내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개 같은 놈들!”
서운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또 그리 부정적인 생각이시우? 헤어지는 마당이니 뭔가 우리에게 선물을 주려는 것이 아니겠수?”
그러나 이번만큼은 진양도 서요평을 거들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느낌이 좋지 않군요.”
흑표가 말했다.
“그냥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들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요,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에요.”
유설이 흑표의 말을 거들었다.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대로 갑시다.”
진양 일행은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반면 진양 일행을 쫓아오던 천의교 무인들은 이를 보고 다시 소리쳤다.
“양 장문!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소? 잠시 멈추시오! 전하께서 여러분께 전하라는 선물이 있소이다!”
결국 서요평이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소리쳤다.
“흥! 그딴 수작에 넘어갈 성싶으냐? 그렇게 말해놓고 우리를 치려는 속셈이겠지?”
진양 일행은 이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천강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들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잡아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삽시간에 진양 일행을 포위했다.
아직 진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일행이었기에 포위망은 순식간에 겹겹이 둘러싸이고 말았다.
흑표가 서요평을 탓했다.
“그걸 참지 못해서 일을 크게 만드십니까?”
“흥! 무섭냐?”
“누가 무섭다고 했소?”
“무섭지 않으면 무슨 불만이 그리 많으냐?”
흑표는 한마디 더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서요평이 가장 먼저 땅을 박차고 쏘아져 나갔다.
“길을 열어라! 감히 어르신 앞을 막아보겠다니 배짱들이 좋구나!”
순식간에 그가 병사들 서너 명을 베어내며 길을 뚫으려 하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를 공격했다. 이에 흑표가 그에게 바짝 다가가 뒤를 받쳐 주었다.
진양 일행은 이제 어쩔 수 없이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 무기를 꺼내 들어야만 했다.
진양과 유설, 흑표, 그리고 사상이괴와 가신풍까지 현란한 몸놀림으로 포위망을 이리저리 뚫으며 내달렸다.
진양 일행이 움직일 때마다 포위망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이동했다.
이들은 잦은 전쟁으로 단련된 병사들이었다.
머릿수도 어마어마하게 많거니와, 노련한 전술을 펼쳐 포위망이 쉽게 뚫리진 않았다.
진양이 일행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말을 타지 않는 이상 힘들겠소!”
“말이 있어야 탈 것 아니겠나?”
서요평의 외침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말 울음소리가 길게 울렸다.
이히히힝!
일행이 돌아보니 바로 위교사왕과 곽연이 도착한 것이었다.
서운지가 껄껄 웃었다.
“말이 생겼구려!”
찰나, 그가 몸을 번쩍 솟구치더니 곧장 마소장왕 범릉에게 쇄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검이 범릉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범릉은 급박한 상황 속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몸을 훌떡 뒤집더니 검을 피해냈다.
서운지는 범릉의 어깨를 왼손으로 짚으며 재빨리 몸을 휘돌렸다.
그 순간 범릉이 오른손을 불쑥 뻗어냈다.
“위험합니다!”
가신풍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리더니, 그야말로 빛살과 같은 속도로 서운지의 몸을 낚아챘다. 그 바람에 범릉의 오른손은 허방을 때리며 파공음을 일으켰다.
파앙!
허공에서 터진 소리만으로 짐작컨대, 만약 서운지가 제때 몸을 피할 수 없었더라면 내장이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서운지가 가신풍을 돌아보며 눈인사로 감사의 표현을 대신했다.
서요평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흥! 이제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그래, 왕야께서 전하라던 선물이 그 무뎌빠진 장법이라더냐?”
“후후후. 여러분은 당대 최고의 무인들이 아니오?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해야 하지 않겠소?”
마천강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서요평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