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9
제128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끔찍했던 고통을.
이마에 꿀밤을 맞았을 뿐인데 두개골이 박살나는 듯했고 전신의 뼈가 일시에 분질러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일시적인 통증이 아니었다. 쇄골(碎骨)의 극통은 무려 일 년이나 지속되었다. 날이 흐리면 뼈마디가 쑤신다는 촌로들의 푸념이 헛소리가 아님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권왕의 횡포에 이를 갈았지만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데다 무엇보다 상대가 권왕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용을 쓰더라도 그가 어찌 해 볼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성대진으로서는 그저 하늘에 닿을 분노를 꾹꾹 누르며 인내신공을 수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의 반백 년 전에 겪은 악몽이었지만 성대진은 오늘날까지 이따금 진저리를 쳤다.
“쯧쯧, 엄살하고는. 머리가 홀라당 벗겨지는 나이가 되도록 어째 나아진 게 없냐?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꼬맹이.”주먹을 휘두르는 시늉만 했던 권왕이 혀를 찼다.
그가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오금을 펴지 못하는 정파 무림의 동배들과 후배들 앞에서 치욕적인 모습을 보인 성대진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남신룡을 닦아 세우며 한껏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미흡한 점을 깨우쳐 달라고 했더냐? 그래, 네놈과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 정도 친절쯤이야 베풀지 않을 것도 없지. 한 번만 말할 테니 귀를 후비고 잘 들어라.”
권왕이 장내를 휘둘러보았다. 행여나 역신(疫神)이란 별명을 지닌 괴걸과 눈이 마주쳐 트집을 잡힐까봐 너도 나도 허겁지겁 시선을 내렸다. 권왕이 그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이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엎드리거나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군중은 안절부절못했다. 집법단주의 위축은 과한 바가 있었으나 누구라도 권왕의 심술에 걸리면 좋은 꼴을 보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아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권왕이 다시 성대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역지사지라는 말을 아느냐? 남의 허물을 따지려면 자기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뜻이니라.”
틀린 정의였지만 아무도 바로잡으려 나서지 않았다.
“아까 아비의 죄는 자식이 지고 스승의 과오는 제자가 물려받는다고 했더냐?”
성대진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대답 안 해? 집법단준가 뭔가가 됐다고 이젠 내 주먹 따윈 우습다 이거지?”
주먹을 흔드는 권왕의 유치한 위협에 성대진은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권왕의 일자 눈 속에서 매서운 안광이 폭사되었다.
“이놈아. 네 말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네 자식 놈들도 네 죄를 대신 지고 목을 내놓아야 할 게 아니더냐? 안 그래?”
“…….”
“또 내 질문을 묵살하는 구나. 아무래도 너는 말보다는 주먹으로…….”
성대진이 다급히 소리 질렀다.
“경우가 다릅니다. 그날의 변고는 어디까지나 사고…….””닥쳐라, 이놈. 술 처먹고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에게 행패를 부려 네 명이나 저승으로 보냈으면서 사고라니. 너는 되고 남은 안 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더니 염치가 있어야지.”
또 부적절한 비유였지만 역시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중인 대부분은 권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칠십 대 이후의 노장들만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사십 년 하고도 칠 년 전이었다.
그날 용봉대전에서 고암 설가의 신성 설주명(薛柱明)에서 석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던 성대진은 성대한 친목회장을 벗어나 홀로 뒷골목의 허름한 객잔에 들어가 탁주로 심화를 삭혔다. 정파 무림의 일백 삼십여 정영들 중 이등을 차지했으니 자랑할 만한 성과가 아닐 수 없으나 성대진에겐 성에 차지 않았다. 결승까지 오르며 거뒀던 일곱 번의 승리는 한 번의 패배로 인해 빛이 바랬고 성대진은 스스로를 낙오자로 규정하며 자학하고 있었다.
객잔 이층의 표사들과 시비가 붙은 것은 우연이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술자리를 즐기던 표사 무리가 일행 중 한 명을 놀린 것이 발단이었다. 동료가 선물 공세를 퍼부으며 공을 들였음에도 연모하던 여인에게 차인 까닭이 ‘작은 키와 지나치게 두꺼운 종아리’ 때문이라는 한 표사의 조롱에 터진 박장대소가 성대진의 신경을 긁었다. 공교롭게도 그 두 가지는 그가 자신의 약점이라고 여기는 신체적 특징이었다.
이어진 누군가의 말이 성대진의 솟구치는 화에 기름을 끼얹었다.
‘사내가 오 척도 되지 않아서야 사내구실을 하겠는가? 그 자체로 패배자일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성대진은 이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고는 방금 개소리를 지껄인 개자식들은 대가리를 박으라고 윽박질렀다. 고주망태로 취해 객기를 부리는 청년을 본 표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청년은 오 척도 안 되는 단신에 과도하게 튼실한 하체의 소유자였다. 그들의 놀림의 대상이었던 동료의 외관과 놀랍도록 흡사한 자가 난데없이 나타나 콧김을 뿜어내며 씩씩거리고 있으니 표사들로서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웃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청년이 성주 성가의 후기지수들 중 으뜸으로 꼽히는 신성이기 때문이었다. 나름 무공을 익힌 표사들이지만 성대진에겐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성대진은 그와 체형이 비슷한 자를 뺀 일곱 명 모두를 순식간에 때려눕혔다. 때 아닌 소동에 객잔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주변을 순찰하던 정맹 외찰단(外察團)소속의 무인들이 소란을 감지하고는 들이닥쳤다.
외찰단 무인들은 운이 좋았다. 그들 중 조장이었던 자가 성대진을 알아본 덕분이었다. 만약 그를 제압하려 했다면 표사들 짝이 되었을 공산이 컸다. 아직 절정의 경지에 이르려면 멀었고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었지만 성대진은 외단 무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보고를 받은 본단에서 비중 있는 인사가 달려오고 성대진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다음에야 사태가 수습되었다. 여덟 명이었던 표사들 중 무사한 이는 키 작고 종아리가 두꺼운 표사뿐이었다. 나머지 일곱 중 넷은 즉사했고 셋은 불구가 되었다.
객잔에서의 일로 성대진에겐 근신 한 달의 처분이 내려졌다.
그에게 맞아 불구의 몸이 된 표사들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질책만 들었다. 그들은 그나마 나았다. 죽은 이들은 염왕전 외에는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다.
성대진에겐 행운과 불운이 겹쳤다.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원주 강가의 강운이 맹주 위에 오른 다음에 사건이 벌어졌더라면 한 달 간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정도의 처벌에 그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오대세가의 자제이나 뇌옥 신세를 져야했을 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불명예로 남을 터이니 성대진으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성대진의 불행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협객 놀이를 하고 있던 일권무적 태진광의 촉수에 객잔의 사건이 걸려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삼 년이 지나 성대진이 꿈에 그리던 용호단 입단을 앞두고 있을 때 불쑥 성주로 찾아온 태진광은 그날의 진상을 고하라고 다그쳤다.
가문의 어른들은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했다. 태진광은 수틀리면 성주 성가 전체와도 싸우려고 들 작자였다. 그리고 그리 되면 성가가 승리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성대진은 열심히 스스로를 변호했다. 자기가 들은 내용과는 다르다며 태진광이 엄포를 놓았지만 끝까지 버틴 덕분에 횡액은 모면했다. 태진광은 꿀밤 한 대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의 확약을 받고는 행패를 마무리 지었다. 태진광이 두려워 성대진은 불구가 된 표사들과 죽은 표사들의 가족들에게 후한 보상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권왕의 억지에 성대진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찌 젊은 날 잠시 정신이 나가 저질렀던 과실과 천하 악종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동급으로 취급한단 말인가. 얼토당토않고 천부당만부당했다. 당장 한 무더기의 반박을 쏟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성대진은 자중했다. 이치를 설명한들 권왕이 알아들을 위인이던가. 조목조목 따져가며 반론해 봤자 괜히 긁어 부스럼만 될 터였다. 수십 년이나 노망기를 달고 다니는 늙은이에게는 떠들도록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었다.
성대진의 침묵을 반성의 표시로 받아들였는지 권왕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내 말의 요지는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거다. 아니, 그게 아니지. 아비든 사부든 잘못을 범했으면 자신들이 책임져야지 자식이나 제자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라? 그것도 아닌데.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더라?”
권왕이 진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천은 그가 ‘아우야, 도와다오.’라고 할까봐 조마조마했다. 그와의 관계가 밝혀지면 삼보장의 덫으로 장왕을 유인하려던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기실 지금도 반쯤은 물 건너 간 형국이었다.
진천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권왕이 다시 성대진을 주목했다.
“저 아이의 사부란 놈들은 백 번을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악종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저 아이가 그 악종들처럼 악종이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죄를 대신 지라고 하는 건 과도한 처사다. 그렇지 않으냐?”
성대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선을 그을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의 사부들은 공히 강호십대악인에 꼽혔던 천하의 악귀들입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누가 묵과하자더냐, 이놈아.”
성대진은 울컥했다. 듣지 않을 거면 뭐 하러 물어본단 말인가. 그리고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어째서 말끝마다 놈, 놈인가. 환갑을 지나면 누구나 동년배가 된다는 것도 모르는가.
심중에서 올라오는 말들을 목구멍에 가둔 성대진은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권왕의 압기를 견디는 것은 초절정에 들어선지 오래인 그로서도 버거운 일이었다.
권왕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기회를 달라지 않더냐?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다만 다들 부끄러운 줄 알아라. 명색이 정파랍시고 그 동안 네놈들이 정천(正天)의 실현을 위해 한 게 뭐가 있더냐? 나도 허송세월로 보냈으니 할 말은 없다만 네놈들 중 누구라도 목숨을 걸고 마련의 마귀들에게 맞서 싸운 자들이 있더냐? 곳간마다 곡식이 썩어날 지경이면서 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준 적은 있었더냐? 너희가 제 뱃대지 불리는 일에만 혈안이 된 사이 저 아이는 참다운 정파인의 행동을 실천하고 있었다. 칭찬하고 지원하지는 못할망정 저 아이가 원치도 않았던 사승의 인연을 빌미로 죽이네, 살리네 하며 염병을 떨고 있으니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누가 네놈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더냐?”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저 아이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정맹도 같이 져야 한다. 전날 모야평에서 민초들을 태워 죽인 건 귀도마의가 아니라 정맹이 아니더냐? 천수원의 의원들이 시간만 주면 괴질의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 거라 했는데도 그 새를 못 기다리고 참화를 일으키지 않았더냐? 당시 정심원에 몸담았던 높으신 작자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그 가여운 목숨들에게 동정을 표한 자가 있었더냐?”
권왕이 발산하는 어마어마한 압기가 군중을 짓눌렀다. 이십 년 전 모야평의 천민들에게 행했던 처사를 두고 권왕이 북천도왕과 대판 싸운 일은 유명했다. 군중은 권왕이 그때처럼 불물 가리지 않고 분기를 폭출(爆出)할까 봐 공포에 떨었다.